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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어느 시인의 관객일기 -2악장에 관한 명상☆]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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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관객일기 - 2악장에 관한 명상◎]
조창환 산문집 / 푸른사상산문선 826 / 푸른사상(2019.10.25) / 값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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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2악장에 관한 명상
1994년 미국 유타주 브리검영대학의 한국학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 나는 미국 서부지역에서 캐나다 로키산맥까지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오래 꿈꾸고 계획했던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드넓은 신대륙의 장대한 자연과 문화를 직접 겪어보고 체험하고 싶었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보름간의 여행 일정을 짜면서 여러 가지 필요한 소품들을 준비했었다. 고추장과 라면, 김 등 입맛을 잃지 않을 먹을거리와 새우깡, 육포 등 간식을 준비함은 물론이고, 방문할 지역의 자연과 역사의 배경과 문화에 대한 기본 지식을 담은 책자와 함께 적당한 숙소와 레스토랑 등에 관한 정보를 구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몇 권의 시집과 필기도구와 노트북도 준비했고 차 안에서 들을 음악 테이프도 마련했다.
그것은 꿈같은 여행이었다. 꿈같은 여행이라는 말은 꿈꾸듯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여행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정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 쪽의 글래시어 국립공원에서부터 캐나다의 밴프, 재스퍼, 요호 국립공원들을 거쳐 밴쿠퍼 섬까지 가는 동안, 그리고 루이스, 몰린……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연녹색 호수들과 타카카우를 비롯한 장대한 폭포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동차를 가로막고 어슬렁거리는 엘크와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검은 새끼 곰 때문만도 아니었다. 공격성이 강한 크고 험해 보이는 그리즐리 베어를 만나 긴장하기도 했고, 캐나디언 로키에서 와이오밍주에 걸쳐 서식하는 큰 체격의 산양 빅혼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런 동물들을 만나 신기해하는 일이란 이 지역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흔한 광경이었다.
그 여행을 꿈같이 만든 것은 나의 내면으로 느낀 또 다른 아름다움의 체험 때문이었다. 나는 그 보름 동안의 여행을 위하여 여러 개의 음악 테이프를 준비했었다. 브람스의 현악 6중주 제1번 2악장, 베토벤의 현악 4중주 2악장,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엘비라 마디간>의 제2악장,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제3번 2악장, 그리고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중 상투스…… 이런 곡들의 2악장들만을 모아 편집한 음악 테이프를 자동차 안에서 끊임없이 틀었다. 이 음악들은 나의 캐나다 로키 여행의 배경이 되고 절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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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현악4중주 제2악장의 도입부는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애절하고 간곡하다. 깊이 가라앉아 심금을 울리는 현악기의 낮은 떨림에는 인간의 내면을 쓰다듬는 무거운 사색의 잔영이 스며 있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을 연모하여 이 곡을 그녀에게 헌정하였다. 이 곡의 2악장은 1958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연인들(Les Amants)>에 삽입되어 유명해진 부분이기도 하다. 이 6중주의 연주자 여섯 명 가운데는 바이올린에 아이작 스틴, 첼로에 파블로카잘스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 들어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엘비라 마디간’이라고도 불린다. 이 곡이 이런 별칭을 얻은 데는 이 곡의 2악장이 백작 가문의 청년장교가 서커스단의 줄 타는 소년 엘비라 마디간을 사랑하여 탈영하고 자살하는 줄거리의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되어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청순하고 맑고 밝은 피아노의 선율이 천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유연하게 녹아내리게 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제3번은 기품 있고 역동적인 첼로의 선율과 이에 조화를 이루는 피아노의 대화하는 듯한 리듬이 당당함과 서정성을 함께 어우르고 있다. 이 곡의 2악장은 느리고 가라앉은 전통적인 탬포를 배제하고 빠른 스케르초로 대체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오히려 이어지는 3악장이 느린 템포의 아디지오 칸타빌레로 되어 있어 피아노의 선율에 얹힌 첼로 특유의 서정적이고 풍부한 음색이 돋보인다. 다소 경쾌하면서 발랄한 느낌의 이 음악은 평온한 휴식 가운데의 귀족적인 기품이 돋보인다.
‘장엄미사곡’이라고 번역하는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는 성대한 규모의 미사곡인데, 나는 이 미사곡 가운데 키리에나 베네딕투스 부분 말고 상투스 부분을 유독 사랑한다. 경제적 궁핍과 악화된 건강 상태, 그리고 불우했던 가족사 등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온 베토벤이 만년에 이르러 정신적 평화를 갈구한 종교음악이 이 곡인데, 이 음악의 상투스 부분은 특히 하느님의 거룩함을 찬미하는 천상적 경건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음악을 들으면 나는 내 안의 영적인 변화가 인간적 감정을 넘어선 초월적 신비로 가득 차오름을 느낀다.
나는 음악을 전공하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내가 편애하는 음악들에 대한 해석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딜레탕트로서 내가 느끼고 감상하는 음악들은 내게 깊은 감성적 울림을 주었다. 나는 악곡의 2악장 부분을 유독 좋아한다. 느리고 사색적이면서 평화와 여운을 강조하는 부분이 2악장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거나 격정적이지 않지만,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아 혼의 부드러운 떨림을 가져다주는 길고 낮은 음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2악장은 1악장이나 3악장이나 4악장에 비하여 강인하거나 선명하지 않다. 악곡의 주제는 흔히 1악장 첫머리에 나오고 종결부에 가까운 부분은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격앙된 감정을 유도하는 예가 많다. 반면, 2악장은 느린 리듬에 실린 신비로운 애상감과 쓸쓸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휴식과 평온의 정서에 담긴 단아한 품격과 고상하고 깊은 인간적 사색의 궤적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다. 2악장이라 해서 무조건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제3번의 2악장은 스케르초로 되어 있다. 피아노와 첼로의 대화에는 해학의 감정에 담긴 비애감이 스며 있다. 그것은 슬픔을 품은 기쁨의 감정에 유사하다.
그렇다 슬픔을 품은 기쁨의 감정이야말로 진실하고 오묘하며 아름답고 신비롭다. 이 지상에서 생을 누리는 존재에게 부여된 이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감성의 하모니야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황홀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홀로 있음의 자유로움, 고독 속에서의 행복, 갈등으로 가득 찬 속세에서의 평화로운 초월의 세계인 것이다.
악곡의 2악장을 유독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한번 모아볼까? 모여서 2악장 감상하고 맛있는 거 먹고 바닷가나 숲길로 여행을 떠나볼까? 정치나 돈이나 종교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말기로 하고 그저 한없이 고독해지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모여 음악을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작은 펜클럽을 만들면 인기가수 쫓아다니는 여중생처럼 미쳐볼 수 있을까? ‘2악장 팬클럽’을 만들어 세상의 모든 2악장들을 모아 홀로 사색에 감겨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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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장 같은 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2악장처럼 평화롭고 안온하며 잔잔하고 그윽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뜻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하면서 애틋한 사랑과 휴식의 감정을 담아내는 시들이 귀한 세상이 되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든 반성적 상념과 무거운 사색의 잔영이 담겨 있는 시, 청순하고 밝은 감정과 초월적 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어 느끼게 하는 시, 귀족적 기품과 서정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는 시, 천상적 경건함과 영적인 평화가 신비로운 위안을 베풀어주는 시를 쓰는 시인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언어를 아껴 쓰고 은은한 여백의 미와 그윽한 여운의 향기가 행간에서 우러나는 시는 읽는 이의 내면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단아한 품격과 고상한 인간적 사색의 흔적이 묻어 있는 시는 읽는 이의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해학의 감정과 비애의 정서가 공존하는 시는 불가사의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풀 길 없는 질문을 던진다. 오묘하고 아름답고 신비롭고 진실한 정신적 상태는 슬픔과 공존하는 기쁨의 감정이며 고통 속에서 찾아지는 행복의 감정이다. 세상사에서 한걸음 비켜서 있는 자의 관조적 자세, 홀로 있음의 평화로움, 내면적 사색의 결과 얻어지는 갈등의 극복이야말로 시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추구해야 할 영원한 이상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지금은 한물간 지난 시대의 사고방식이라 할 것인가? 현대문학은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 속에서 우울과 절망에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주조음으로 삼고 있다. 고독하고 분열된 개별적 자아, 파편화되고 불안하고 고통에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현대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안 속에서 안정을 찾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고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아나가는 일이야말로 문학이나 예술이 지향해야 할 영원한 과제로 남아 있다. 현대문학이 보여주는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세계의 모습은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세계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적 억압이나 경제적 불평등, 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지식인 사회의 화두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대에는 좌절과 절망, 고통과 아픔을 묘사하는 일이 문학인이 관심을 두는 공통의 문제의식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비관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지난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와 개인의 억눌린 모습을 그려내는 일은 오늘날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고급 아파트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절망이니 좌절이니 불안이니 고통이니 하고 외쳐대는 일은 위선이거나 자기모순이다.
시인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감동적인 시가 만들어질 수 없다. 시인이 위선이나 타성에 젖어 있다면 창조적인 상상력이 발휘될 수 없다. 시인이 현세적 문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면 초월적 세계에 관한 시를 쓸 수가 없다. 시인이 고독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내면적 사색의 깊이가 스며 있는 시가 나올 리 없다. 시인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시도 보여줄 수 없다. 시인이 휴식과 평화와 온유를 외면한다면 관조와 조화와 신비의 세계를 그려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1악장이나 4악장에 관심을 기울일 때, 거기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 비켜서서 2악장에 주목하는 자기 시인이다. 고요하지만 적막하지 않고, 사색적이지만 현학적이지 않고, 초월적이지만 허무하지 않고, 온유하지만 굴복하지 않는 자세가 시인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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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악장 팬클럽 만드는 일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고독이니 사색이니 명상이니 하면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그러니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고, 혼자 노는 일이 즐거워야 하고, 혼자 지내면서 보람을 얻어야 한다.
또 2악장이라 해서 모두가 아름답다거나 사색적이거나 펴오하로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2악장이기 때문에 아름답거나 사색적이거나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아름답고 사색적이고 평화로운 것이 2악장이다. 그런즉 홀로 있음의 자유로움, 고독 속에서의 행복, 갈등으로 가득 찬 속세에서의 평화로운 초월의 세계를 만나려면 아름다운 2악장을 잘 골라 홀로 감상하는 것이 좋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러나 느리고 여유 있게 사는 일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느리고 빠른 것은 템포의 문제고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감정의 문제다. 느린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답답할 수도 있다. 느림의 미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느림의 질, 느림의 품격, 느림의 차원이 중요하다.
어떻게 사는 일이 질 좋은 느림을 실천하는 일일까? 어떻게 사는 일이 여유 있게 사는 일의 즐거움을 이루고, 고독 속에서의 행복을 만나는 일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토마스 머튼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술가들의 고결함은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세상 위로 들어 높인다.”(토마스 머튼 『칠층산』,바오르딸, 2009.32쪽)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나 무용발표회, 미술전시회 등을 잘 찾아 다니며 감상하는 일도 질 좋은 느림을 실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예술적 체험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적 체험의 순간 우리가 세상 위로 들어 올려질 수는 있을 것이다.☻
몽상가의 꿈, 염소와 바이올린과 수탉과 천사
<샤갈, 러브 앤 라이프 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전시회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샤갈, 러브 앤 라이프 전>이라는 명칭으로 열리고 있다. 샤갈 전시회 풍년이 들어서 강화도 해든뮤지움에서는 판화를 중심으로 <샤갈-신비로운 색채의 마술사>전이 열리고 있고, 서울 M컨텤포러리에서는 유럽 4개국 개인 수집가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마르크 샤갈 특별전-영혼의 정원>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6월 초부터 9월 하순까지 석 달 넘게 열리는 한가람미술관 전시회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 개막 보름 만에 3만 명도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 하니, 나는 일부러 한 달 넘게 지체하여 7월 중순에야 전시장을 찾았다.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 화가의 인기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대단한 줄은 몰랐다.
19세기 말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샤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고향을 떠나 떠도는 실향민 의식은 그의 예술적 성향을 결정 짓는 배경이 되었다. 원초적 향수와 동경, 꿈의 세계와 그리움의 감정, 낭만적 사랑에 대한 체질적 이끌림은 그의 그림이 지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고향 마을의 추억, 아내 벨라에 대한 애정과 극진한 가족애, 그리고 유대인답게 구약성서에서 취재한 그림들이 샤갈 그림의 특성을 이룬다. 샤갈은 몽상가였고 동심적인 순정함과 유아적인 환상과 꿈의 세계를 초현실적 터치로 표현하였다. 샤갈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그의 그림이 지닌 신비감과 아기자기함은 몽상과 꿈을 독창적인 강한 색채감으로 표현한 데서 기인한다.
전시회는 주제별로 일곱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설치되었다. ‘초상화와 자화상’, ‘연인들’, ‘성서에서 취재한 그림들’, ‘죽은 영혼들’, ‘라퐁덴의 우화’, ‘벨라의 책’ 등인데 이런 구분은 그의 회화작품 전체를 아우르기에 적합해 보였다.
나는 샤갈의 유명한 그림 몇 점에 오래 눈길을 주었다. <나의 마을> <사랑하는 연인들과 수탉> <도시 위에서> <산책> <연인들과 꽃> <전쟁>등이다. <나의 마을>은 큐비즘적 기법이 인상적이고, <도시 위에서>는 날아다니는 인물이, <산책>은 허공에 떠 있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환상과 꿈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샤갈의 그림은 초현실주의 기법에 완전히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초현실주의란 원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데, 그의 그림은 구체적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샤갈 자신도 자기를 초현실주의의 선두주자라는 평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그린 유년 회상과 추억을 주제로 한 그림에는 고통과 아픔이 숨겨져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그림엔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있다. 아픔을 품은 사랑, 고통을 감춘 기쁨, 이룰 수 없는 꿈, 현실감 없는 환상 등의 이중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염소와 바이올린과 수탉과 천사가 등장하는 그의 그림은 실재와 허구 사시의 경계가 무시된 몽상가의 꿈이다. 적색과 청색을 과감히 사용한 그의 그림은 강하지만 자극적이지는 않다. 공포와 슬픔, 억압의 감정을 그린 그림 <전쟁>까지도 샤갈다운 서정성의 세례를 입고 있다. <다윗>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등 구약성서에서 취재한 인물들도 샤갈다운 독특한 변형을 거쳤다. 마치 어린이의 꿈 같은 서툴고 천진한 솜씨로 윤곽을 흐려놓았다.
오늘날은 사진 촬영 수준이 대단해서 원화보다 화집에 실린 사진이 더 선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화집에서 볼 때보다 덜 선명하지만 더 감동적 느낌을 받는 것은 역시 전시장에서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샤갈의 삽화, 드로잉 등 자잘한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전시 작품 150여 점이라는 숫자는 충분하지만, 샤갈 특유의 화사한 색감이 드러나는 유화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샤갈의 강한 색채의 그림 이외에 드로잉, 판화, 모자이크, 스테인드 글래스 등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전시회의 장점이기는 하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잠시 전시회장 밖의 그늘을 찾아 쉬면서 나는 현대미술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이 거장의 심리 상태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내는 솜씨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인간의 조건, 고통과 죄책감과 불안과 혐오감
<돼지우리>
모처럼 묵직한 주제의 정통연극을 감상하리라 벼르고 찾아간 아르코예술극장은 아직 시간이 일러 한산하고 조용했다. 1960년대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이었던 나는 이곳에 오면 특별한 감회에 사로잡힌다. 지금은 사라진 도서관 건물과 국문과 학과 사무실이 있던 장소에 오면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진다. 마로니에 나무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 고맙다. 시간이 남아 여기저기 서성거린다. 여기를 ‘대학로’라고 이름 붙여놓았는데, 젊은이들은 식당과 커피숍과 술집에 넘쳐난다. ‘대학로’가 아니라 ‘유흥로’라고 바꾸어 불러야 할 것 같다.
연극 <돼지우리>는 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국내 초연의 공연 작품만을 선보이는 ‘베스트 앤 퍼스트(Best and First)’ 시리즈 중 하나다. 남아공 극작가 아돌 후가드 원작, 손진책 연출의 2인극이다.
전쟁터에서 탈영해 자기 집 돼지우리에 숨어 살고 있는 파벨은 돼지우리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승전 기념식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낼 계획을 하지만 탈영병이므로 총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발목을 잡힌다. 아내 프라스코비야는 전사자로 처리된 남편에게 수여된 훈장을 가지고 와 그의 더러운 속옷에 달아준다.
돼지우리에 스스로 갇힌 주인공 파벨의 절규는 고통과 죄책감과 불안과 혐오감으로 가득 찬 인간 존재의 상징이다. 꿀꿀거리는 돼지를 혐오하고 경멸하면서도 결국은 돼지에 동화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살아남을 수 있고, 인간다운 존엄성을 되찾으려면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파벨의 상황은 비극적이면서 보편적이다.
극은 돼지우리에서 수십 년을 산 파벨이 어느 깊은밤 밖으로 나와 하늘의 별을 보고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들장미 향기를 맡으며 감격에 겨워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울하고 염세적인 스토리지만 전통 비극의 플롯과는 다른 이 연극의 내용은 2차 대전 중 소련군을 탈출해 41년간 돼지우리에 살았던 실제인물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인간 존재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힐 때, 더럽게라도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것이 이 연극이 관객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다. 그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 인간은, 또한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벨 역의 박완규와 아내 프라스코비야 역의 강지은은 대단한 연기자들이었다. 박완규의 연기는 파워 있고 절박하며 생명감이 있었다. 강지은의 연기 또한 캐릭터의 성격과 잘 어울려 시골 아낙네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두 사람의 연기는 호흡이 잘 맞아 정통연극다운 격조를 구현하였다. 자칫 과장되거나 작위적이기 쉬운 인물 설정인데 이 두 배우의 연기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큰 무대를 꽉 채우는 열정과 에너지가 돋보였고, 무엇보다 대사 전달력이 뛰어났다. 간혹 무대 위에서 배우가 관객을 향하지 않고 얼굴을 돌려 말할 때 대사 전달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그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박완규는 전라 노출의 장면이 있었는데, 조금도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관객을 몰입시키는 배우의 열정이 땀과 숨소리와 언어적 절규로 표현될 뿐이었다.
눈에 거슬린 한 가지-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호를 그을 때 위, 아래 다음에 오른쪽, 왼쪽 순서로 한다. 이 극에서처럼 위, 아래, 다음에 왼쪽, 오른쪽 순서로 긋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호를 긋는 방식이다. 연출자와 배우들은 이런 사소한 동작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책보지 말고 소리를 들어요”
김경호의 <적벽가>
완창 판소리 시리즈 중 10월에는 정미정의 <춘향가>공연이 있었는데 나는 다른 이로 가지 못했다. 11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김경호의 <적벽가>공연이 있어 이를 관람하기로 한다. 전날 전주에서 공연하고 일곱 시간 넘게 운전해서 올라왔다는 소리꾼은 목청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도 판소리 사설집을 펴들고 공부하는 자세의 관객들이 많았다. 나는 객석 맨 앞에 마련된 ‘귀 명창석’(무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방석을 깔아놓은 앞좌석)에 앉았다. <적벽가>는 <홍보가>나<춘향가>에 비해 대사 내용이 조금 어려운 편인데 앞에 앉았다고 대사 전달에 별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주 물 마시며 목을 가다듬던 소리꾼은 중간에 노래를 멈추고 거기 책 펴들고 앉아 있는 손님들 부디 책 좀 덜어달라고 부탁한다. 판소리 사설집을 들여다보면서 노래에 집중하지 않는 관객들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던 것 같다. 그래도 객석에서는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여전했다.
피곤하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나는 중간 휴식 시간에 자리를 떴다. 오랜 시간 등받이 없는 방석에 앉아 있기가 불편하기도 했고, 갑갑하고 신경 쓰이는 시간을 굳이 버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졸다가 깨다가 하품하다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원작 <인형의 집>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어서 상당히 기대하고 갔는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별반 예술적 감동을 받지는 못하였다. 연극 전문가의 눈으로야 연출이나 연기에서 무언가 새로운 점이 있다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저 지루하고 갑갑한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연극 <인형의 집>은 연극이나 연기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기본적인 텍스트에 해당한다. 여성 해방과 인간 존엄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주제나 근대극의 기틀을 확립했다는 예술사적 의의에서 이 극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러시아 최고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는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 연출이라는데 왜 내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을까. 우선 대사 전달에 문제가 있었다. 상투적인 발성과 부정확한 발음, 뒷자리에까지는 정확히 전달이 안 되는 음량은 관극의 흥미를 반감시켰다. 그리고 어둡고 침침한 무대에서 갑갑하게 진행되는 스토리 전개는 신선하다거나 창의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50분씩 3막을 공연하며 중간에 10분씩의 휴식 시간이 있으니 세 시간을 소비한 공연인데 나는 뒷자리에 앉아 졸다가 깨다가 하품하다 돌아왔다.☻
잔잔하고 먹먹하고 따뜻한 감동
<시인할매>
여기저기서 시인이라는 이름 붙인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시’라는 제목을 붙인 공연물들도 흔한 세태여서 영화 <시인할매>를 보러 가면서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엊그제 본 이츠하크 펄먼 전기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기억에 남아 있으므로, 오늘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화를 한 편 보겠다고 마음먹고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보면서 잔잔하고 먹먹하고 따뜻한 감동이 밀려왔다.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와 비슷한 정서적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워낭소리>가 인간과 동물과의 연대감과 사랑을 다룬 영화임에 비하여 <시인할매>는 무식한 시골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쳐 속에 맺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휴머니즘 영화였다.
글을 모르는 전라도 곡성의 시골 할머니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학교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야 했던 할머니들이 마을 도서관에 모여 한글을 배우게 되면서 서툴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시를 써내는 모습을 담아냈다.
손주가 학교에 갔다 와 숙제하는데 무얼 물으면 글을 몰라 애비 올 때까지 기다리라 할 때 마음이 아팠다든지, 이제 한글을 쓸 줄 알게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말을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었다. 여든 넘은 어머니가 산비탈 밭에서 힘들게 농사짓는 모습이 안쓰러워 내년에는 농사를 안 짓겠다는 다짐으로 시집 간 딸에게 백만 원 벌금을 내기로 각서를 쓰는 장면, 어머니 고생하는 것 보면 그냥 눈물이 난다며 연신 눈물을 훔치는 딸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닦는 관객도 있다.
할머니들이 쓴 시는 담담하지만 진솔하고 서툴지만 아름답다.
“내년엔 농사를 질란가 안 질란가/몸땡이가 모르겠다 하네”라든지, “새끼들이 왔다 간께 서운하다/집안에 그득하니 있다 허전하니/달도 텅텅 비어브렀다”라는 구절은 담박하고 감동적인 생활시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영화 소개 전단지에 나와 있는 시, “사박사박/장독에도/지붕에도/대나무에도/걸어가는 내 머리 위도/잘 살았다/사박사박”이라는 작품은 단연 장원감이다.
투박하지만 감동적이다. 편안하고 따뜻하면서 목메게 하는 영화다. 세상살이가 편해진 이즈음 세대에게는 실감나지 않겠지만, 전쟁과 가난과 눈물과 시련을 견뎌낸 우리 세대에게는 진정한 감동이 밀려오는 영화다. 이 영화는 지난해 가을, 김포, 파주, 고양시 등에서 열린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개봉된 후 큰 호평을 받았다는데, 내심 그럴 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춤
<시간의 나이>
LG아트센터는 공연 시작 전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좁은 로비에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빨리 입장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출입하는 문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어깨를 스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늘 그렇지만 무용 공연에는 젊은 층 관객만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활기 있는 대신, 매너기 부족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도 섞여 있다. 공연 시작 직전까지 휴대폰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는 젊은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의 나이>는 조세 몽탈보(Jose Montalvo)안무의 국립무용단 창작무용인데 “기억”, “여행의 추억”,“포옹”이라는 소제목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춤에서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큰 주제를 소화하기 위해 안무자는 한국무용의 신체적 특성과 운동감의 전통에 자유로운 현대무용의 동작을 접목시켰다. 미술사와 시각예술을 전공한 몽탈보는 프랑스 현대무용을 이끄는 대표적 안무자라는데, 오늘 공연에서는 스크린에 비쳐진 영상을 배경으로 활용하였다. 2016년 국내 초연 이후 한국 전통춤의 매력을 보존하면서 이방인의 시선에서 신선한 해체와 조립 과정을 거쳤다는 평을 받은 이 춤은, 이후 프랑스에 초청되며 국립무용단의 대표적 컨템퍼러리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1장 ‘기억’에서는 영상에 비치는 한복 입은 사람들과 현대식 복장의 무용수들이 춤추는 모습이 다소 작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영상과 무대의 중첩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결합, 혹은 공존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려는 시도는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한량무’, ‘부채춤’,‘살풀이’ 등 전통 복식을 입고 춤추는 영상이 배경에 나오면서 일상복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이 이질적이지 않고 조화롭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터이다.
2장 ‘세계여행의 추억’에서는 스크린에 쓰레기 더미가 나오고, 고통 받는 북극곰이 나오면서 환경 문제 등을 다룬 주제가 강한 연출이었다. <하늘에서 본 지구>로 유명한 사진작가 dis 아르퀴스 베르트랑의 영상이 배경에 펼쳐져 인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세계관을 표현한 춤이 주도하였다. 여기서 전해지는 인류와 지구, 미래에 대한 메시지는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3장 ‘포옹’은 원제목이 볼레르(Bolero)인데 사랑의 기쁨을 표현하는 춤이 중심이었다. 모리스 라벨의 음악 <볼레르>와 우리 전통 굿의 대담한 결합, 화려한 색감과 환상적 연출, 경쾌함과 자유로움을 찰나의 시간성 속에 활기 있게 표현한 춤은 감상하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한국 무용수들의 타악기 연주는 활력 있고 에너지에 충만하였다. 우리 민속의 원시적인 제의(祭儀)에 담긴 욕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태고의 역동성과 기쁨을 표현한다는 의도를 잘 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를 축적해가며 새로운 것을 완성한다는 의미의 이 무용은 주제가 강하고 상상력의 분출이 자유로워 흥미로웠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무용이면서, 춤을 보는 재미와 주제를 다루는 메시지 양면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무용이었다. 다만 나는 이 춤의 제목 <시간의 나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인 것 같아 조금 거슬렸다. 차라리 <시간의 두께>라든지 <시간의 무게>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3장 ‘볼레르’는 굳이 ‘포옹’이라고 우리말로 의역하지 말고 그냥 ‘볼레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창극과 경극, 두 장르의 화려한 결합
<패왕별희>
중극의 경극 <패왕별희>를 국립창극단에서 창극으로 만들어 공연한다니 관심이 갔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경극은 화려한 복장과 인공적 분장을 바탕으로 시각적 효과를 우선시하는 데 비하여 창극의 판소리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호소력을 바탕으로 한 청각적 효과를 중시하는 양식이다. 경극은 여러 등장인물이 연극적 배역을 맡아 연출하는 극의 양식임에 비하여 판소리는 한 사람의 가창자가 노래하는 음악의 한 양식이다. 경극은 장면 중심의 연출임에 비하여 판소리는 서사적 흐름을 중시하는 양식이다. 오늘날 창극은 판소리와 달라서 여러 사람이 배역을 나눠 맡아 노래하는 연극의 한 형식으로 바뀌었지만, 판소리의 본질을 유지하는 음악적 연극이어서 일종의 뮤지컬 드라마라고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이질적인 두 양식을 결합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는 중국의 우싱궈(吳興國)가 연출, 린슈웨이(林秀偉)가 극본과 안무를 맡고, 한국의 이자람이 작창(作唱)
284우리 시대 최후의 권번 기생과 음악감독을 맡았다. 배역은 판소리를 전공한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맡았는데, 주인공 항우 역은 객원으로 참여한 정보권이었다.
극은 대륙적 스케일의 웅대하고 큰 규모의 연출력을 바탕으로 우리 판소리 가락의 높은 음정의 절절한 목청이 살아 있는 소리를 들려 주었다. 내레이커를 겸한 맹인 노파 역의 김금미는 소리가 미끄러지지 않으면서 청이 높고 막힘이 없었다. 극의 시작부터 놀라운 발성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앞으로 전개될 비극적 내용을 암시하면서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스토리의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우희 역의 김준수는 이 드라마가 발굴한 특별한 소리꾼이었다. 중국의 경극처럼 여성 역을 맡은 남성 연기자인데 섬세하고 미묘한 손짓, 몸짓, 동작이 경극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발성과 소리가 배역에 어울려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항우 역의 정보권도 훌륭한 배우였다. 남성적이고 우렁찬 소리가 영웅적인 인물의 재현에 썩 잘 어울렸다. 허종열(범증 역), 유태평양(장량 역)등도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판소리 가락이 느껴지면서 연극적 표현에 무리가 없었다. 연기자들의 열의가 극 전체를 후끈하게 덥히는 무대였다.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연극이나 오락물에서 흔히 만나는 볼거리가 많은 요란한 연극적 연출을 보여주었다. 경극의 오락적 요소를 판소리 가락에 얹어 재현한 듯한 무대였다. 문제는 이 연극이 비극적 장엄함보다는 화려하고 웅대한 연희적 즐거움에 더 치중한 느낌을 준다는 데 있다. 몽환적인 분위가. 중국식적 검무의 춤동작, 화려한 의상 등이 어울려 무용, 연극, 음악이 함께 빚어내는 종합예술다운 무대를 만나보는 일은 즐거움이었다. 반면 심각한 철학적 사색이라든가 비극이 주는 정서적 충격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처리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러한 공연이 지니는 의의는 무엇일까? 판소리의 현대화,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창극의 길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것일까? 아니면 경극의 세계화, 중국 경극의 영역을 다른 장르에 접합시켜 동아시아 전체의 즐길거리로 확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일까? 양쪽 모두에 의의가 있겠지만, 이 <패왕별희>는 아무래도 경극의 영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는 의의가 더 큰 것 같다고 느낀 점은 아쉬움이었다. 이런 실험적 노력이 이어져 다음에는 우리의 <춘향전>을 경극으로 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야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창극의 영역을 확대하는 일이 제대로 완성될 것 같다. 서로 다른 장르를 결합시키는 일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아슬아슬한 일이다.☻
우리 시대 최후의 권번 기생
<몌별 해어화>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몌별(袂別) 해어화(解語花)라는 명칭의 한국무용 공연이 열려 찾아갔다.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기생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소매를 부여잡고 헤어진다는 뜻의 ‘몌별(袂別)’이란 단어를 앞에 붙였으니 이별하는 기생의 모습을 주제로 한 것인가?
오늘 공연은 현존하는 최후의 권번(券番)기생(妓生)중 먼저 세상을 떠난 장금도, 유금선을 추모하며, 남아 있는 권명화를 기리는 무대인데, 이성훈의 동래학춤,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김경란의 굿거리 춤, 정명희의 민살풀이춤과 국수호의 승무가 이어지고, 끝으로 권명화의 소고춤이 펼쳐지는 우리 민속악의 향연이다.
2013년 LG아트센터에서 열린 <해어화(解語花)>라는 이름의 공연에는 장금도, 유금선, 권명화 세 사람의 무대가 펼쳐졌었다. 군산 소화권번 출신의 장금도와 부산 동래권번 출신의 유금선은 근래 세상을 떴고, 이제는 대구 대동권번 출신의 권명화만 남았다. 열서너 살적부터 기생학교인 권번에 입적하여 춤과 노래를 익혀 손님 앞에 나섰던 이들은 권세가와 부잣집 한량들 앞에서 솜씨를 뽐내며 돈을 벌었지만, 기구하고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장금도는 승무, 검무, 화무, 포구락, 살풀이춤 등을 익혀 소문난 춤꾼이 되었으나, 어린 아들이 춤꾼 어머니 자식이라는 놀림 때문에 주먹질을 하고 들어온 이후 춤판에 나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국립극장 <명무전>등에 출연하면서 다시 춤을 추긴 했으나, 고엽제 피해로 자식을 잃은 후 2008년 <해어화 장금도>공연에서는 아들의 넋을 기리는 살풀이춤을 추었다. 유금선은 소리에 능했다. 열일곱에 동래권번을 일등으로 졸업하고 화류계에서 인기를 누렸으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얼마 후 남편과 사별한 후 다시 기방에 나왔다. 돈을 벌어봤으나 우여곡절 끝에 빈손이 되었다. 동래학춤 구음(口音)보유자로 지정된 그녀의 구음은 낭랑하면서 깊다는 평을 들었다. 슬프면서 무겁지 않고 기쁘면서 경망하지 않은 구음은 강약과 맺음이 분명하고 탁탁 치는 끝 음이 일품이었다.
그 두 사람이 타계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한 사람 남은 우리 시대 최후의 권번 기생 권명화는 김천의 세습무가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당대 풍류의 대가라는 박지홍을 수양아버지로 모시고 가무를 익혔다. 박지홍의 제자 중 소리꾼으로는 박동진이요 춤꾼으로는 권명화를 꼽는다. 금년 나이가 여든여섯이니 너무 고령이어서 오늘 공연에서는 장기인 살풀이춤이나 승무는 그만두고, 소고춤만 추기로 한다.
권명화는 작고 여리고 낭창거리는 체구의 할머니였다. 무대로 걸어 나오는 품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면서 풀솜처럼 가벼웠다. 경상도 지방의 소고춤답게 동작이 씩씩하면서 거침없다. 무대를 휘젓는 걸음걸이는 당차면서 통쾌했다. 그 당당한 보무(步武)에서는 오랜 성상 겪어온 화류계 생활에서 손님들을 휘어잡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허공을 휘젓는 손끝은 장식이나 기교를 뛰어넘는 능숙한 자유로움에 연결되어 있다. 소고를 잡은 왼손과 작은 북채를 잡은 오른 손은 휘어졌다. 내뻗는 어깨춤의 곡선미와 조화를 이루어 동적 운동감을 완성한다. 풍물 소리에 맞춰 앞으로 나서고 뒤로 물러서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허공의 급소를 찌르고 두들기는 무림의 고수처럼 늠름하고 능란했다.
권명화의 소고춤을 본 것은 오늘 공연의 백미였지만, 함께 출연한 다른 춤꾼들도 대단했다. 이성훈의 동래학춤은 동작이 크고 넉넉하면서 막힘없고 자유로웠다. 동래학춤 예능보유자답게 자신만만하고 여유 있고 활달한 춤 솜씨를 보였다. 오늘은 작고한 유금선을 이어받은 김신영의 구음에 맞추어 춤추었는데, 과연 명무(名舞)의 춤에 걸맞은 구음이었다. 김신영이 내는 의미 없는 발성에서 느껴지는 형이상학적인 장중함은 우리 전통미의 독특한 영역이다. 군무를 춘 한국의집 예술단의 학춤도 잘 어울렸다. 우리 전통의 몸짓과 숨결을 살려 우아한 아름다움을 구현하였다
김경란의 굿거리춤과 정명희의 민살풀이춤을 본 것도 소득이었다. 김경란의 춤은 당당하고 흥이 넘쳤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늠름하고, 당차면서 유려했다. 정명희의 춤은 무겁고 그득하면서 품위가 있었다. 수건을 잡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춤이어서 민살풀이춤인데, 그 빈 손끝에서는 허공을 가르는 비수 같은 선명함과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날렵하고 예리하지만 여유롭고 기품이 넘쳤다. 김운태의 채상소고춤도 좋았고, 국수호의 삼현 승무도 좋았다. 특히 국수호의 승무에서 북채 없이 장삼을 뿌리는 춤 동작은 독특하면서 흥미로웠다.
이것으로 2019년 상반기의 내 관객일기를 마무리한다. 예술 감상과 체험을 통하여 더 질 좋은 느림의 여유를 즐기고 두터운 기억의 질감을 누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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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들어가면서
■ 프롤로그 - 2악장에 관한 명상
제1부 몽상가의 꿈
∙잔잔하면서 진솔하고 평이하면서 아름다운 시 - 영화 · <패터슨>
∙위대한 중세여성 힐데가르트 - 영화 · <위대한 계시>
∙몽상가의 꿈, 염소와 바이올린과 수탉과 천사 - 전시회 · <샤갈, 러브 앤 라이프 전>
∙왜곡과 과장, 즉필(卽筆)과 즉흥(卽興) - 전시회 · <장승업 취화선 특별전>
∙예술가의 광기와 좌절, 망상과 우울감 - 영화 · <헤밍웨이 인 하바나>
∙진실과 위선, 유혹과 탈선의 이야기 - 오페라 · <코지 판 투테>
∙모범적이지만, 너무 연약한 - 클래식 · 프로코피예프, 라벨, 거슈인
∙무난하고 원만하고 편안한 춤 구경 - 발레 · 발레 스페셜 갈라
∙의미 없는 동작과 흔들림과 리듬 - 무용 · <스텝 업>
∙격정과 속도감, 창의적 연출 - 연극 · <줄리어스 시저>
∙긴장감과 열정의 복수극 - 연극 · <조씨고아>
∙기교적이면서 진지하고 경건하면서 평화로운 - 클래식 모차르트 · <C단조 미사(대미사)>
∙인간의 조건, 고통과 죄책감과 불안과 혐오감 - 연극 · <돼지우리>
∙장중하고 고아한 격조와 초월감 - 국악 · <영산회상>
∙수심과 한탄, 허무감과 원망의 정서 - 국악 · <서도소리>
∙소리꾼, 인물치레도 좋고 너름새도 일품인 - 판소리 · 김정민의 <흥보가>
∙마당놀이,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 마당놀이 · 국립극단의 연희무대
∙고뇌와 수난, 굴복인지 굴욕인지 - 무용 · 미트칼 알즈가이르의 <추방>
∙백치처럼 순수했고, 백치라서 순수한 - 연극 · <백치>
∙태생적 춤꾼, 꾸밈없고 이쁘고 감각적인 - 무용 · 파울라 킨타나의 <잠재적인(latent)>
∙직선적 청결감과 명징한 운동감 - 무용 · 제임스 전의 <발레 정전(正典)>
∙고통의 강물, 과감하고 격렬하고 격정적인 - 연극 · <드리나강의 다리>
제2부 울림과 반향
∙신세대 감각, 헐렁한 복장의 스트리트 댄스 - 무용 · <비보이 픽션 ‘코드네임 815’>
∙철학적인 춤 - 무용 · 네덜란드댄스시어터
∙오락성의 연희무대 - 창극 · <변강쇠 점찍고 옹녀>
∙“책 보지 말고 소리를 들어요” - 판소리 · 김경호의 <적벽가>
∙볼레로, 감각과 광기와 에로티시즘과 - 무용 · <쓰리 볼레로>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춤, 신선하고 파격적인 - 발레 · <마타하리>
∙섬세하고 유려하고 서정적인- 클래식·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안드라스 쉬프, 샤를 뒤투아
∙드보르작, 슬로바키아, <신세계로부터> - 클래식 · 슬로박 필하모닉 ‘드보르작의 향연’
∙음악을 대하기를 귀부인 대하듯 - 클래식 · 비엔나 아카데믹 오케스트라 ‘리사운드 베토벤’
∙졸다가 깨다가 하품하다 - 연극 · <인형의 집>
∙싫어한다고 말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 - 영화 · <보헤미안 랩소디>
∙리듬감과 자유로움과 추상성 - 무용 · <쓰리 스트라빈스키>
∙오르간 학예회 - 클래식 · <오르간 오딧세이>
∙사색적이며 종교적인 울림과 반향 - 클래식 · 다니엘 로스 <오르간 시리즈>
∙소란스럽고 과장되고 시끌벅적한 - 뮤지컬 · <마틸다>
∙부드러우면서 정확하고 유연하면서 섬세한 - 클래식 · 안네 소피 무터와 차이콥스키
∙로맨틱하고 강렬하고 울림이 깊은 - 재즈 · 웅산
∙연하고 부드럽고 단정한 - 클래식 · 서울모테트합창단의 <메시아>
∙형이상학적 행복감과 미학적 경탄 - 클래식 · 트리오 콘 브리오 코펜하겐
∙맑고 향그럽고 정결한 - 클래식 ·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상상과 환상, 행복한 크리스마스 - 발레 · <호두까기 인형>
∙막힘없고 거침없고 절절한 소리 - 판소리 · 안숙선의 <심청가>
제3부 열정과 기쁨
∙감동도 아니고 실망도 아닌 - 클래식 · 빈 필하모닉 멤버 앙상블, 신년음악회
∙풍자의 방식, 떠들고 웃기고 노래하고 춤추며 - 마당놀이 · <춘풍이 온다>
∙마크 로스코,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철학적인 - 연극 · <레드>
∙파블로 네루다, 창극 속의 문학 - 신창극 · <시>
∙운명에 대한 진지한 탐구 - 연극 · <오이디푸스>
∙대취타, 연화춤, 학춤 - 국악 · <돈(豚)타령>
∙전통무용, 이 길로 가야 하나? - 한국무용 · <설·바람>
∙영화 속의 허구.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나? - 영화 · <말모이>
∙열정만 아니라 기쁨을 지닌 음악가 - 영화 · <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
∙잔잔하고 먹먹하고 따뜻한 감동 - 영화 · <시인할매>
∙너무 닮으면 독창성을 잃고, 닮지 않으면 터무니없다 - 전시회 · <치바이스와 대화>
∙우람하지만 장엄하지 않은 - 클래식 · <시벨리우스 스페셜>
∙침울하고 무거운 회색빛 화면 - 영화 · <로마>
∙“기도하는 사람은 죽이면 안 된다” - 연극 · <햄릿>
∙대담하고 웅장하면서 순수하고 격정적인 - 클래식 · 말러 교향곡 제1번 <거인>
∙견디기 힘든 시간 - 뮤지컬 · <파가니니>
∙품위와 용기, 휴머니티 - 영화 · <그린 북>
∙형이상학적 정화감 - 클래식 · 런던 필하모닉과 율리아 피셔
∙가족 환상과 인간의 유대감 - 연극 · <자기 앞의 생>
∙부패와 욕망, 허위와 위선, 가식과 조롱 - 연극 ·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화평함과 여유와 초월의 미감 - 국악 · <정악, 깊이 듣기>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춤 - 무용 · <시간의 나이>
제4부 쾌활한 서정
∙굵고 무겁고 깊은 목소리 - 재즈 · 토마스 크바스토프
∙큐비즘, 문명 지향적이며 과학 지향적인 - 전시회 · <피카소와 큐비즘>
∙반예술 개념, 창조 행위와 권위에 대한 부정과 조롱 - 전시회 · <마르셀 뒤샹전>
∙기교적 안정성과 사색적 깊이 - 클래식 · 제주도립오케스트라의 브람스와 베토벤
∙둥글고 따뜻하고 밀도 있는 연주 - 클래식 · KBS오케스트라의 멘델스존과 말러
∙음악을 요리하는 일과 음악을 따라가는 일- 클래식 · 원주시립교향악단의 시벨리우스와 브람스
∙가을 나무 그림자처럼 - 클래식 ·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슈만과 말러
∙흔들리는 심리, 동경과 불안과 질투와 집착 - 영화 · <나의 작은 시인에게>
∙창극과 경극, 두 장르의 화려한 결합 - 창극 · <패왕별희>
∙바다의 묘사와 쾌활한 서정 - 클래식 · 드뷔시, 크라, 슈베르트
∙근대 수묵화의 두 거장 - 전시회 · <한국화의 두 거장 청전, 소정전>
∙이국적이며, 환상적이며, 민속적이며, 즉흥적인 - 클래식 · 빌라-로보스, 하차투리안,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교회음악을 세속음악처럼 - 클래식 · 스트라빈스키, <시편교향곡>
∙역사의 자취, 과거의 흔적 - 전시회 · <근대서화전>과 <오백나한전>
∙대중가요의 정도:정직하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 콘서트 · 이미자 노래 인생 60년
∙민족주의, 민중봉기 대작의 감상 - 오페라 · <윌리엄 텔>
∙정통 실내악의 전통과 무대 선정 - 클래식 · 보로딘 콰르텟
∙우주적 스케일:창조 이전의 카오스에서 신의 영역까지 - 클래식 · 말러 교향곡 제3번
∙고도:기다림의 반세기 - 연극 · <고도를 기다리며>
∙중력을 거스르는 육체의 묘기 - 마임 퍼포먼스 · <파우나>
∙웅혼하면서 고졸(古拙)한 혼의 흔적 - 전시회 · <관서악부>
∙한국을 빛낸 세계적 미술가들 - 전시회 · 문신미술관, 이성자미술관
∙우리 시대 최후의 권번 기생 - 한국무용 · <몌별 해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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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면서
이 책에 모은 글들은 근래에 내가 관람한 각종 음악회, 전시회, 연극, 영화, 무용발표회 등에 대한 소감을 적은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개ㅑ인적인 관객일기를 굳이 책으로 엮어 다른 사람에ㅐ게 읽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잊혀질 기억의 편린들을 정리해두는 일도 필요할 것 같아서 책으로 묶어두기로 한다. 이 글들은 전문적인 예술비평도 아니고 문화비평적 평설도 아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딜레탕트로서 내 나름의 예술 감상에 대한 느낌을 정리한 것이다. 지성과 감성, 비평적 감별력과 아마추어적 취미 생활이 어우러진 우리 시대의 예술현장 답사기라 할 수 있다.
오래 재직하던 대학에서 은초퇴한 후 시간적으로 한가해졌고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그간 강원도 고성군 동해안 해변에 작은 집필실을 마련하여 설악산과 동해안을 원 없이 다니면서 바다와 자연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고, 여러 군데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체력도 전만 못해지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지루해져 동해안 집필실도 정리했고 여행 다니는 일도 삼가기로 했다. 대신 최근 몇 해 동안은 부지런히 각종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이 일은 단순히 남아도는 시간에 인생을 즐기는 교양인의 호사 취미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인접 장르의 예술적 표현 방식에 관심이 있었고, 현대예술의 특성과 방향을 체험하고 전통미학의 계승과 재창조가 오늘의 우리 문화에서 이룩한 성과를 엿보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무어보다 각종 공연이나 전시회를 감상하는 일에서 내면적 행복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관객일기의 첫머리에 에세이 「2악장에 관한 명상」을 얹었다. 이 책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예술적 체험의 고귀함에 대해 생각해보는 글이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019년 가을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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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예술적 체험의 순간 우리는
세상 위로 들어 올려질 수 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러나 느리고 여유 있게 사는 일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느리고 빠른 것은 템포의 문제고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감정의 문제다. 느린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느린 것이 추할 수도 있다. 여유 있게 사는 일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답답할 수도 있다. 느림의 미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느림의 질, 느림의 품격, 느림의 차원이 중요하다.
어떻게 사는 일이 질 좋은 느림을 실천하는 일일까? 어떻게 사는 일이 여유 있게 사는 일의 즐거움을 이루고, 고독 속에서의 행복을 만나는 일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토마스 머튼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술가의 고결함은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세상 위로 들어 높인다.”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나 무용발표회, 미술전시회 등을 잘 찾아다니며 감상하는 일도 질 좋은 느림을 실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예술적 체험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적 체험의 순간 우리가 세상 위로 들어 올려질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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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환 시인∥
∙ 1945년 서울에서 ㅌ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울산대학교오 전북대학교를 거쳐 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86년 미국아이오와대학교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래 미국 브리검영대학교, 블볼링그린대학교,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대학교 및 체코 카를대학교에서 한국학 객원교수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했다.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1973년 『현대시학』시 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빈집을 지키며』『라자로마을의 새벽』『그때도 그랬을 거다』『파랑눈썹』『피보다 붉은 오후』『수도원가는 길』『마네킹과 천사』『벚나무 아래, 키스 자국』『허공으로의 도약』등이, 시선집으로『신의 날』『황금빛 재』등이 있고, 학술서로『한국시의 넓이와 깊이』『이육사』『한국현대시인론』『한국 현대시의 분석과 전망』, 여행 에세이집으로『조창환 교수의 영행의 인문학』등이 있다. 편운문학상, 하국시인협호상, 한국가톨릭문학상, 경기도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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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조창환 시인의 산문집 『2악장에 관한 명상』은 작가가 2018년부터 2년간 관람한 각종 음악회, 전시회, 연극, 영화, 무용발표회 등의 문화예술에 대한 소감을 적은 관객일기다.
작가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적 표현 방식에 관심을 두고 각종 공연과 전시회를 감상하는 일에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비보잉, 영화 같은 현대예술의 특성과 방향을 체험하고, 국악, 창극, 마당놀이, 판소리 등의 전통미학을 계승 · 재창조한 작품을 통해 오늘날의 문화예술이 이룩한 성과를 엿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오페라, 발레, 클래식, 뮤지컬 같은 서구의 공연예술 장르도 향유하였다.
아울러 문화예술을 즐기는 관객으로서 작품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제시하고 공연장의 분위기와 공연자의 연기력과 발성, 작품성 등에 대한 감상과 느낌을 주관적이고 솔직하게 평가하였다. 더불어 작품을 감상하며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도 여과 없이 솔직하게 토로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현대예술과, 전통예술, 다양한 장르를 망라한 일종의 리뷰로써 문화예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견문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나아가 예술적 체험의 고귀함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예술체험 답사기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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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나는 음악을 전공하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내가 편애하는 음악들에 대한 해석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딜레탕트로서 내가 느끼고 감상하는 음악들은 내게 깊은 감성적 울림을 주었다. 나는 악곡의 2악장 부분을 유독 좋아한다. 느리고 사색적이면서 평화와 여운을 강조하는 부분이 2악장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거나 격정적이지 않지만,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아 혼의 부드러운 떨림을 가져다주는 길고 낮은 음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2악장은 1악장이나 3악장이나 4악장에 비하여 강인하거나 선명하지 않다. 악곡의 주제는 흔히 1악장 첫머리에 나오고 종결부에 가까운 부분은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격앙된 감정을 유도하는 예가 많다. 반면, 2악장은 느린 리듬에 실린 신비로운 애상감과 쓸쓸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휴식과 평온의 정서에 담긴 단아한 품격과 고상하고 깊은 인간적 사색의 궤적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다. 2악장이라 해서 무조건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제3번의 2악장은 스케르초로 되어 있다. 피아노와 첼로의 대화에는 해학의 감정에 담긴 비애감이 스며 있다. 그것은 슬픔을 품은 기쁨의 감정에 유사하다. (중략)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그러나 느리고 여유 있게 사는 일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느리고 빠른 것은 템포의 문제고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감정의 문제다. 느린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느린 것이 추할 수도 있다. 여유 있게 사는 일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답답할 수도 있다. 느림의 미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느림의 질, 느림의 품격, 느림의 차원이 중요하다.
어떻게 사는 일이 질 좋은 느림을 실천하는 일일까? 어떻게 사는 일이 여유 있게 사는 일의 즐거움을 이루고, 고독 속에서의 행복을 만나는 일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토마스 머튼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술가들의 고결함은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세상 위로 들어 높인다.”(토마스 머튼, 『칠층산』, 바오로딸, 2009, 32쪽)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나 무용발표회, 미술전시회 등을 잘 찾아다니며 감상하는 일도 질 좋은 느림을 실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예술적 체험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적 체험의 순간 우리가 세상 위로 들어 올려질 수는 있을 것이다. (「2악장에 관한 명상」, 20~25쪽)
우울하고 염세적인 스토리지만 전통 비극의 플롯과는 다른 이 연극의 내용은 2차 대전 중 소련군을 탈출해 41년간 돼지우리에 살았던 실제인물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인간 존재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힐 때, 더럽게라도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것이 이 연극이 관객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다. 그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 인간은, 또한,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벨 역의 박완규와 아내 프라스코비야 역의 강지은은 대단한 연기자들이었다. 박완규의 연기는 파워 있고 절박하며 생명감이 있었다. 강지은의 연기 또한 캐릭터의 성격과 잘 어울려 시골 아낙네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두 사람의 연기는 호흡이 잘 맞아 정통 연극다운 격조를 구현하였다. 자칫 과장되거나 작위적이기 쉬운 인물 설정인데 이 두 배우의 연기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큰 무대를 꽉 채우는 열정과 에너지가 돋보였고, 무엇보다 대사 전달력이 뛰어났다. 간혹 무대 위에서 배우가 관객을 향하지 않고 얼굴을 돌려 말할 때 대사 전달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그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박완규는 전라 노출의 장면이 있었는데, 조금도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관객을 몰입시키는 배우의 열정이 땀과 숨소리와 언어적 절규로 표현될 뿐이었다. 눈에 거슬린 것 한 가지 ―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호를 그을 때 위, 아래 다음에 오른쪽, 왼쪽 순서로 한다. 이 극에서처럼 위, 아래, 다음에 왼쪽, 오른쪽 순서로 긋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호를 긋는 방식이다. 연출자와 배우들은 이런 사소한 동작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조건, 고통과 죄책감과 불안과 혐오감-」, 63~64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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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바이올린 소나타 제21번 마단조 K 304
Violin Sonata No21 E minor K.304 [Allegro]
*출처: 관악산의 추억(http://cafe.daum.net/e8853/MUEz/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