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유현식
서울에서 출발하여 경기, 충북을 거쳐 강원도 속초를 끝으로 뒤돌아오는 장삿길은 수일이 걸리는 순환길이다. 이 길을 십수년을 돌고 돌았으니 횟수만큼이나 곳곳 길목이며 상점, 사람들의 속내를 훤하게 접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공병대 병역을 마치고 고향 당진 앞바다 간척 사업하는 건설사에 근무하다가 노사 문제가 비화되면서 직장을 잃게 되었다. 재취업을 위해서는 기사 자격증이 필요했기에 여러 번 시험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작심하고 치렀던 시험마저 떨어지자 크게 실망하여 못하는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늦은 시각, 잠에서 깨어보니 누님네 단칸방이었다. 토사물에 더러워진 겉옷은 세탁해서 빨랫줄에 걸려있고, 속옷 차림으로 방 한쪽에 누워서 연신 손을 놀려 마늘 까는 누님의 충고를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단칸방에서 부업으로 마늘 까는 누나도 살아가는데, 그까짓 자격증이 뭐라구! 내 길이 아닌가 싶다 생각하고 나까마 할 생각 없니?"
마침 매형이 작은 문구 공장을 운영하던 터라 누나가 길을 내어 준듯하다. 그렇게 시작한 문구류 장삿길을 십여 년을 하던 중에 그가 거래하던 문구·인쇄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 동생과 공동 투자하여 가게를 인수하고, 그 후 십수 년을 운영하면서 OO읍의 유지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여러 친구로부터 들려왔다.
공부에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가정 형편을 생각해서 신문을 배달하고,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다니고, 회사를 그만 두고 대입 준비하는 내게 잠시 머물 수 있도록 잠자리를 내어주었던 성실하고 배려심 있는 친구였기에 그가 걸어온 길, 그가 가는 길에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낸다.
20.6.28
* 나까마(일본어):중간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