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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열린 칠현산 능선 너머로 황홀한 햇살이 한려해상을 비춘다. 칠현산 정상 부근에서 남해군 방면으로 본 경치이다. /주민욱 기자
마음은 백신으로 아물지 않는다. 매일 숫자로 불리는 비극, 서로 멀어져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차오르는 우울. 마음이 닿을 곳 없을 때, 사량도에 가야 한다. 마음의 빛깔을 바꿔놓는 산, 사량도 지리산 말이다.
인기 산 순위를 매길 순 없으나, 단순히 등산객 수로 꼽자면 한라산을 제외한 섬산 중 사량도 지리산이 인기 1위일 것이다. 전국 각지의 안내산악회 일정표에도 계절 가릴 것 없이 가장 많이 이름 올리는 산이며, 2010년대 가장 인기가 급등한 산으로 손꼽힌다. 얼마나 좋기에 최고의 섬산으로 꼽히는지 궁금했다.
통영이 아닌 고성으로 갔다. 20분 만에 사량도에 닿는 배가 한 시간마다 운항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그 길을 택했다. ‘잘못 든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야산과 바다만 있는 깡촌이었다. 여객선이 운항하는 포구라기보다 이름 없는 어촌 어디쯤 같았다. 바다는 잔잔하여 순둥순둥했고, 관광지 느낌 없는 수더분한 시골 분위기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하늘에서 본 사량도 지리산의 수려한 암릉. 암봉을 이은 구름다리와 기암괴석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주민욱 기자
‘사량(蛇梁)’이라는 이름은 섬의 모습이 뱀처럼 가늘고 길게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윗섬과 아랫섬 사이의 해협이 마치 뱀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했다는 설, 섬에 뱀이 많이 서식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뱀의 섬인 것이다.
철부선에 차를 싣고 사량도 내지항에 내렸다. 뱀섬답게 길이 구불구불 나있었다. 사량도는 윗섬(상도)과 아랫섬(하도)으로 나뉘어 있는데 두 섬을 잇는 사량대교가 5년 전에 놓였다. 상도 지리산과 하도 칠현산 모두 BAC 인증지점이라 한 번 입도해 두 번의 인증이 가능하다. 오늘은 하도 칠현산을 오르고 내일은 상도 지리산을 가기로 한다.
윈드재킷으로 바닷바람에 대비하며 칠현산 능선을 오르는 강태선나눔재단의 변별씨. /주민욱 기자
낮으나 낮지 않다. 사량대교를 건너며 본 칠현산은 가히 벽이다. 낮지만 가파르게 바싹 서 있어, 땀 한 번 제대로 흘릴 성싶다. 대교 건너 곧장 산에 든다. 산꾼들의 표지기를 따라 입산한다.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손창건, 강태선나눔재단 변별씨가 함
께한다. 벌떡 선 오르막에 옷을 한 꺼풀 벗어 배낭에 넣는데, 수북한 낙엽 사이로 요정이 말을 건넨다.
예술 작품처럼 섬세한 노루귀의 우아한 자태, 흰 무리와 분홍 무리가 어우러져 고요한 축제를 열었다. 각시현호색이 트럼펫 닮은 특유의 꽃술로 팡파르를 울리자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화려한 풍경도 좋지만, 낮고 고요한 식물에 눈길이 간다. 자연에 순응하는 작고 여린 것에 마음이 간다는 것, 산 좋아하는 이의 나이 들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칠현산(칠현봉) 정상에 선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손창건(왼쪽)씨와 변별씨. 칠현산 정상은 사량도 하도의 인증지점이다. /주민욱 기자
여리고 여린 봄의 게릴라 전술
600m만에 고도 200m를 높여 능선에 이른다. 어디선가 ‘립스틱 짙게 바르고’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 도발적인 연분홍 유혹의 진달래다. 여느 진달래 명산처럼 흐드러지진 않지만, 듬성듬성 피어 게릴라 전술로 동장군의 잔당을 무너뜨린다.
가볍게 능선을 주파해 풍경 위에 선다. 바다와 섬이 버무려진 산해진미를 후다닥 눈과 마음에 쓸어 담는다. 놀라운 건 역시 지리산이다. 맞은편 상도 지리산의 산세가 대번에 드러난다. 산줄기가 지상에 내려앉은 불사조 날개처럼 수려하다. 조금씩 고도를 높여도 펑펑 터지는 경치에 힘겨울 틈이 없다. 갈색으로 뒤덮인 앙상한 산마루 구석구석 시원하게 안겨온다. 칠현산은 크고 작은 7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달 표면 같은 둥근 바윗길을 지나자 이윽고 인증지점인 칠현산 정상(349m)이다. 표지석엔 ‘칠현봉’이라 적혀 있다. 경치가 예술이다. 사량도와 남해군 사이의 바다에 드리운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빛의 길을 만들어 놓았다. 수면 위의 빛줄기가 한 편의 서정시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아 절제된 말로 깊이 있게 스며든다. 느긋하게 경치를 음미했더니, 찻길로 내려서자 어둑하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는 밤길, 은은히 들리는 파도 소리가 붕 떠있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량도 지리산은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암릉산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 손발을 다 써서 올라야 하는 곳이 간혹 있다. /주민욱 기자
섬산 인기 1위의 위용!
대항해수욕장 앞 숙소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나 돈지마을로 간다. 바다 지리산으로 가는 아침이 상쾌하다. 산 이름은 돈지리(敦池里)의 돈지마을과 내지(內池)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라 해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새들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능선의 바위벼랑이 새드레(사닥다리)를 세운 듯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어 유래한다.
돈지마을에서 등산로 안내판을 따라 골목으로 들자, ‘그토록 기다렸는데 이제야 왔냐’며 반기는 폐교. 정돈된 화단과 겨우내 참아온 그리움 울컥 쏟아낸 목련 꽃, 추억의 이승복 동상이 지나는 이를 잡아당긴다. 운동장에서 바다가 보이고, 학교 뒤로는 걸출한 지리산 바위벽이 솟아 대단한 절터를 보는 듯하다. 폐교했다는 게 아까울 정도의 명당이다.
달바위 혹은 불모산이라 불리는 암봉에서 본 구름다리. 각진 바위지형이라 신발의 마찰력이 높아 고도감에 비해 위험하진 않다. /주민욱 기자
산길이 아무리 가팔라도 인기 최고의 바다산을 오른다는 설렘에 힘들지 않다. 땀 흘리는 족족 꿀맛 같은 경치로 대갚음해 줄 것을 산꾼들은 알고 있다. 주능선에 올라붙자 사닥다리를 포개어 놓은 듯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고도감 높은 벼랑의 시작, 복장을 재정비하고 능선의 곡조에 집중한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능선의 리듬은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울긋불긋한 돈지마을 지붕과 투명하게 반짝이는 바다.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바다와 암릉의 향연, 빠르게 스쳐 보내기 싫어 능선을 아껴 먹는다.
햇살이 완연한 봄날이다. 재킷을 벗고 스무 살 청년처럼 반팔로 바위산의 변주곡에 몸을 맡긴다. 발바닥으로 눈으로 손으로 피부로 전해오는 달콤한 산행의 맛! 섬산 인기 1위가 과언이 아니었구나 싶다.
바다 위를 비행하는 듯 시원하게 경치가 터지는 지리산 주능선. 암벽을 클라이밍다운으로 내려서거나, 안전한 길로 우회할 수 있다. /주민욱 기자
낭떠러지 바윗길의 고도감이 스릴 있지만, 책을 겹쳐 놓은 듯 거칠게 튀어나온 표면 덕분에 발이 전혀 밀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고도감에 비해 산행은 어렵지 않다. ‘위험한 길’이라 표시된 갈림길에서 위험한 길로 든다. 칼바위능선에 올라 바닷바람의 짠맛을 음미한다. 뒤돌아보면 어찌 왔나 싶은 칼바위능선이지만 막상 그 맛은 쏠쏠하다.
BAC 인증지점인 정상도 전국의 어느 산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경치를 선사한다. 오름길에 충분히 보았던 풍경이라 인증 사진만 찍고 지나친다. 바닥에 닿을 듯 낮은 표지석의 자연스러움이 마음에 든다. 사진 찍을 명소가 많아 거리에 비해 시간이 지체됐다. 지금부터가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후반전의 시작이라 설렘은 여전하다. 그 유명한 달바위와 구름다리를 만나는 일이 남았다.
사량도 지리산을 대표하는 명물로 꼽히는 구름다리. 우측 아래에 사량대교와 칠현산 줄기가 드러난다. /주민욱 기자
후반으로 치달아도 경치의 수준은 떨어질 줄 모른다. 불모산 혹은 달바위라 불리는 압도적인 경치의 바윗길에서 바람을 타고 노는 까마귀와 이웃해 비행감을 만끽한다. 양쪽이 깎아내린 절벽이라 조망의 즐거움이 극에 다다른다.
고정로프를 붙잡고 간 떨어지게 오르던 바윗길은 계단과 난간이 들어서서 더 대중적인 세미클라이밍 코스로 바뀌었다. 계단이 있다 해도 직벽의 사다리에 가까운 계단이라 ‘노약자와 심신쇠약자는 우회하시오’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몇 발짝 나아가자, 입을 벌린 상어처럼 막강한 고도감이 덮쳐 온다. 주말이면 줄 서서 정체를 겪으며 맛보았을 사다리 계단을 내려선다.
공포의 구간으로 꼽히는 계단처럼 놓인 사다리.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고도감이 센 편이라 속도가 더뎌지는 곳이다. /주민욱 기자
맨땅의 안도감을 실감하며 다시 암봉을 오른다. 계단이 놓이기 전 아등바등 잡고 올랐을 고정로프가 벽에 걸려 있다. 인공시설을 놓아 자연을 훼손한 건 안타깝지만, 주말이면 물밀듯 몰려드는 등산 인파와 심심찮게 생기던 사고를 감안하면 불가피한 선택인 듯하다.
사량도 지리산의 명물 구름다리의 등장이다. 연예계 스타의 등장처럼 암봉과 암봉을 이은 화려한 붉은 다리에 매료된다. 길이 40m로 최근 생기는 구름다리에 비하면 길지 않지만 봉우리 꼭대기를 연결했기에 고도감이 막강해 걷는 맛이 있다.
해는 뉘엿뉘엿 붉게 물들고, 구름다리 데크에는 백패커들이 큼직한 배낭을 탑처럼 쌓아 옹기종기 모여든다. 일행인 줄 알았으나 물어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다. 감미로운 야경과 별빛, 바람을 벗 삼아 노숙하려는 이들의 마음이 슬그머니 느껴진다.
옥녀봉을 지나 성격 급한 하산길로 접어든다. 종일 바람 맞으며 능선을 오르내려 피곤할 법하지만 동행한 강태선나눔재단 변별씨가 “산행이 놀이기구 타는 것 같아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며 “바위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서인지 힘이 난다”고 얘기한다. 맞는 말이다. 걸을수록 마음을 명랑하게 만드는 약이 되는 산이다.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곳, 사량도 지리산이다.
섬 가이드
지리산 산행은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길이 좁고 등산객이 많아서다. 지리산과 칠현산 두 산을 당일에 인증하기는 어렵다. 서두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최단 코스로 정상만 다녀오기엔 산이 아깝다.
지리산은 상도 돈지마을에서 시작해 BAC 인증지점인 정상과 불모산, 구름다리를 거쳐 사량초교 방면으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총 8km이며 경치를 즐기느라 혹은 정체되어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6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지구력만 있다면 초보자도 갈 수 있을 정도의 바윗길이지만, 벼랑길에서는 집중해서 걸어야 한다.
상도에서 사량대교를 건너 하도에 닿자마자 우측 버스정류장 맞은편 계단을 올라가면 화장실이 있고, 옆으로 등산로가 나있다. 가파르지만 딱히 위험한 구간은 없으며 예전 등산지도의 망봉이라 표기된 곳이 인증지점인 칠현산 정상이다. 중간 안부에서 덕동으로 내려서는 하산길은 어렵지 않지만 희미한 편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사량대교에서 시작해 정상 지나서 곧장 덕동으로 내려서는 코스는 3.5km이며 3시간 정도 걸린다.
교통(지역번호 055)
사량도로 들어가는 배편은 여러 곳에 있다. 통영 도산면의 사량도여객선터미널(가오치선착장 640-3830)에서는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며, 주말에는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 상도 금평선착장을 오가며, 40분 걸린다. 요금은 편도 7,000원. 금평에서 가오치행 배는 오전 8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며 주말에는 1시간 간격이다.
고성 용암포에서는 풍양카페리호(673-0529)가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 20분 걸리며 요금은 편도 5,000원. 승용차는 1만 원에서 1만 2,000원 정도 받는다. 주말에는 12시, 17시 배는 운항하지 않는다. 상도 내지항을 오가며 나오는 배는 매시 30분에 출발한다.
통영 미수항(648-0776)에서 하도 남쪽 능양항을 오가는 배편이 하루 5회(07:00, 09:20, 11:40, 14:00, 16:20) 운항한다. 나오는 배편은 08:10, 10:30, 12:50, 15:10, 17:30에 있다. 섬 내에서는 상도와 하도에 각각 순환하는 버스가 하루 6~7회 운행한다. 문의 사량도 택시 010-4558-1229, 010-8517-5334, 010-2866-1603.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