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809. 묵상글 (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등 )
* 05:05 :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부인’은 그 지방 토박이 부인이란 뜻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부인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제자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이방인 여인의 간절한 바람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처음에는 침묵하셨고, 두 번째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말씀하셨으며 급기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가나안 부인은“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단지 이방인이라는 상황과 조건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외침입니다. 이런 감동으로 예수님께서는 탄복하시며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치유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1,25).하고 고집스럽게 거듭거듭 반복해서 청해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라는 확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을 만나고 기뻐하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러나 ( 2023.08.09. 04:59 )
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찹찹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 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이 침묵할 때 바로 그 순간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는 순간임을 깨닫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한 걸음 더 다가가 꿇어 엎드려 절하게 하소서!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 당신의 침묵 안에서 제 겸손과 끈기와 믿음을 길러내소서!
침묵 속에서 오로지 당신 자비에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 모임에서 ‘Mission Statement(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답을 들으면서 ‘신앙 강좌 기획팀’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풋볼을 너무 좋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신앙보다는 풋볼이 더 좋았던 형제님이었습니다. 신앙 이야기는 30분도 힘들었는데, 풋볼 이야기는 5시간을 해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이 완전히 바닥을 쳤고, 건강하던 몸도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이 모두 신앙에 관련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형제님을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련과 고난이라는 가시못이 빠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의 성구로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마음에 품은 성구는 필립비서의 내용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풋볼도, 재산도, 건강도 예수님을 아는 확고한 가치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9시간이 넘는 거리를 기쁘게 운전하면서 왔습니다. 형제님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지나친 것 같아도 이해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같이 타오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걱정하였습니다.
한 자매님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으로 직장 생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한 수도회의 영성을 알게 되었고, 그 영성에 따라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도회의 영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고민할 문제이고, 평신도는 그저 따라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인을 보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과 함께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있는 신앙인들에게 영상을 통해서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꿈과 열정은 좋았지만 평신도들만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도신부님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에 저를 알게 되었고, ‘가톨릭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이 정한 성구는 고린토 후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평화신문과 함께 하면서 주변의 오해도 풀렸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때에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영상을 편집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회계 업무가 늘어났는데 하느님께서는 회계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셨음을 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군대에 비하면 절대로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을 아시고 40년을 더 광야에서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풍랑의 시간에도, 박해의 칼날에도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기도에 대한 특강이 들어오면 꼭 빨래와 우물에 대한 예화를 사용합니다. 특히 우물에 대한 예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또한 그렇게 끊임없이 집중해서 기도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생명의 물이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의 예화가 예화로 끝나고 특강이 특강으로 끝난다면, 즉 우리의 행동으로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부인의 이야기에서 얼마나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하는지 나눌 수 있습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의 기도를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부인에서 배울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주님 앞에서 어떤 자존심도 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활동하셨던 시대는 여인들이 소리 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또한 소리를 낼 양이면 다른 이들이 그 여인을 짐짝 취급하여 마을 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동물 취급하여 매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여인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고 부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개에 비유합니다. 주님 앞에서 어떤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미천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녀의 말 안에는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당신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라는 신앙의 증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증언은 주님의 기적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주님의 품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가 깨졌네요.
이가 깨졌습니다.
진짜로 이가 깨졌습니다.
깨진 이는 아프지 않은데
깨진 이를 매 순간 스쳐 지나가는
혀는 점점 아파옵니다.
깨진 이가 많이 날카롭나 봅니다.
마음이 깨졌습니다.
누구나 깨진 마음 한 조각쯤은 품고 있습니다.
깨진 마음은 아프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눈빛, 그리고 표정은
점점 나와 내 주변을 아프게 합니다.
깨진 마음이 많이 날카롭나 봅니다.
치과에서 깨진 이를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주님 마음 안에서 깨진 마음도 둥글게 되겠지요….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교구 성직자 사진첩을 보다가 한 선배 신부님의 사진에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신부님과의 만남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섬세하시고 또 애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셔야 한다면서 좋은 찻잔에 정성을 다해 맛있는 차를 만들어 주셨지요. 만약 차를 담을 찻잔이 없으면, 저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 잔이면 어떠냐고 할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예 차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음식 역시 제대로 된 그릇에 담겨 있어야 맛이 나지 아무 그릇에 대충 담으면 그 음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물에도 늘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가면, 그 음식에 맞게 멋진 접시에 담겨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음식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에 맞게 접시가 꾸며질 때, 음식의 맛이 더 좋게 느껴지고 실제로 음식 맛도 훌륭해질 것입니다.
이 제각각의 접시에 우리 마음을 대입해 보았으면 합니다. 즉, 주님을 담는 각자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주님을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습에 따라 주님의 영광이 더 환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마음을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 어떻게 비추고 있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와 모양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어느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청을 곧바로 들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면서 거절하십니다. 사람을 강아지에 비유한다는 것,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겸손의 마음이 가나안 여인이 얻고자 했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을 담는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멋진 마음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보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자기가 원하는 딸의 치유도 얻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그릇이 될 때, 가장 멋진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좋은 죽음을 위해, 영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준비합시다. 미지근한 태도와 나태함과 습관적인 불신앙에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성 요한 비안네).
---------------------
----------------------------------------------------
230809.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 믿음의 훈련-
제가 아침 산책중 자주 열창하는, 수차례 인용했던 “늙은 군인의 노래”는 늘 불러도 새롭고 힘이납니다. 부르면서 영적전의를 새로이합니다. 일부 가사를 변경하여 “이강산”은 “수도원”으로, “군인이”는 “수도자”로, “푸른옷”은 “검은옷”으로 “30년”은 “41년”으로 바꿔 부릅니다.
“나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1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청춘
검은옷에 흘러간 꽃다운 이 내청춘”
비감한 느낌보다는 정신이 새로워지는 영적전의를 느낍니다. 예로부터 수도자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부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중 하나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니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얼마나 영예롭고 자랑스런 칭호,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지요!
말그대로 수도자는 물론 믿은 이들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혼자의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함께 하는 영적전우들 사이에는 영적 전우애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수도원을 사랑하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월모임이 있었습니다. 2005년 제가 재판받을 때 함께 했던 자매들이 모태가 되어 시작됐으니 무려 18년 역사입니다.
여전히 활동중인 분이 베로니카 형수와 수산나 자매입니다. 이 두분 역시 한결같이 빛나는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특히 제 형수는 제가 제대후 1973년 교대 다니고 교편생활 때부터 지금 수도생활때 까지 한결같이 도움을 주고 있으니 무려 50년 반세기(半世紀)! 새벽 강론쓰면서 새삼스런 감동에 놀라움이었습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년동안 88세 고령의 연세에도 한결같기가 참으로 훌륭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제37차 세계 젊은이 날 행사후 귀국후 기내에서 회견중 교회법에 위반된 이들에 대한 사목적 지혜에 감동했습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교회내에는 규율하는 교회법이 있다. 교회법에 따라 어떤 이들을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교회가 닫혀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각자는 교회내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만난다.”
부득이 교회법에 저촉되어 성사에 참여하지 못해도 하느님과의 친교는 계속되니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라는 교황님의 목자다운 사목적 배려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또 교황님의 감동적인 사례는 해외 사목방문 전후로 꼭 성모경당을 찾아 마리아 성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목자, 주님의 전사로써 효성스런 면모입니다. 이번도 성공적 포르투칼 순례여정후 성모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니 성모님을 만나기 무려 교황님 재위후 110회입니다.
보고 배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교회 수장의 믿음을 보고 배우는 우리 가톨릭교회신자들은 행복합니다. 믿음의 전사중의 전사가 믿음의 총사령관이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요, 민수기의 모세요 오늘 가톨릭교회의 교황입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과 가나안 부인간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참 치열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믿었고,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영적승리를 이끌어낸 가나안 부인입니다. 영적전투의 진행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싸늘합니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다가 제자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반응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나안 부인은 좌절함이 없이 가열차게 영전전투를 이어갑니다. 겸손히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계속되는 자비송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스럽기까지 한 주님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가나안 부인은 주님을 깊이 신뢰했고 겸손했고 지혜로웠습니다. 가나안 부인의 좌절함이 없는 영적탄력이 놀랍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겸손의 절정입니다. 이어 가나안 부인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항복선언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늘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부인은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했고, 주님과의 싸움에 승리한 것이며 궁극에는 악마와의 싸움에 승리한 것이니 3중의 승리입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악마는 가나안 부인이 포기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가나안 부인의 백절불굴의 탄력 좋은 믿음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어제 복음의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꾸중듣던 수제자 베드로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군계일학처럼 주님의 전사로서 그 믿음이 참 탁월합니다. 믿음의 총사령관 모세의 믿음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위기에 처한 모세를 구한 분은 위 두분입니다. 10대2의 열세이지만 모두가 좌절하는 상황에서 두분의 대응이 감동입니다. 우선 칼렙이 용감하게 모세 앞에 나서서 술렁대는 군중을 진정시킵니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는 생략됐지만 반대파들의 격렬한 저항에 모세와 아론은 온 이스라엘 백성의 회중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칼렙이 옷을 찢으며 외칩니다. 이 두분의 믿음의 웅변이 감동적이라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 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걷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 그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느님은 개입하셔서 이들을 절멸하려 하자 백성을 살려 달라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반역의 공동체는 살아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려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가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공동체에 책임이 있는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세의 한계일뿐 모세는 여전히 위대한 주님의 종, 주님의 전사입니다.결국 주님의 전사 칼렙과 여호수아의 승리는 믿음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이 복음의 가나안 부인과 제1독서 민수기의 칼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단한 기도와 회개, 믿음의 훈련으로 참 좋은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