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을 뜻하는 단어 알키미(Alchemy)는 아랍어 'Al-Khemi'에서 온 것이다. Al-Khemi는 관사 al과 명사 Khemi로 이루어졌는데, Khem은 콥트어로 이집트를 나타낸다. 본래 나일강 양변에 형성된 검은색 흙을 일컫는 말인 켐(kheme)은 이집트를 나타내는 대명사처럼 사용된 단어였다. 따라서 Al-Khemi란 이집트의 과학을 뜻하며, 이는 연금술의 기원이 이집트에 있음을 의미한다. 좀더 소급해 본다면, 빈센트 드보봐는 대홍수 이전 사람들이 연금술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노아가 생명의 영약을 알고 있었다고 단언한다. 한편, 랑글레 뒤프레스노이는 최초의 연금술 역사를 다룬 책인 <연금술 철학의 역사>에서 연금술은 노아의 맏아들이자 셈족의 족장인 셈(Shem 또는 Chem)에게서 전해내려온 것이며, 화학(Chemistry)이나 연금술(Alchemy)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셈이라는 이름은 수메르와도 연관이 있다). 어쨌든 우리는 화학, 즉 케미스트리(Chemistry)라는 용어가 연금술(Alchemy)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금술사들은 온갖 기저물질들을 가열하고, 용해하고, 증류하고, 석출하는 과정 속에서 비록 그들이 목적으로 하던 현자의 돌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대신에 다른 유용한 것들을 얻었다. 알코올, 에테르, 아세트산, 질산, 황산, 왕수(염산과 질산의 혼합물, 금을 녹일 수 있다), 백반, 염화암모늄, 아연과 수은의 염류, 질산은, 비누, 알칼리 등의 화학약품과 도가니, 증류기, 플라스크, 여과기 등의 실험기구는 근대화학의 기초를 닦아준 연금술의 부산물들이었다. 그러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은 연금술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밭 어딘가에 금을 묻어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아버지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덩이를 갈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주었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연금술이 신비의 옷을 벗고 근대화학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파라켈수스(1493∼1541)가 최초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화학(연금술)을 의학에 응용하여 의화학(醫化學)을 창시하였는데, 당시의 의사들은 갈레노스의 체액설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혼잡하고 비위생적이며 무모한 처방은 오히려 평균수명을 단축시키기 일쑤였으며, 당시 유럽을 휩쓸던 감염성 질병들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질병 원인이 외부에 있다는 생각과 특정 질병에 대한 특정한 성분의 약품 처방, 약품의 사용량 조절, 그리고 실험에 대한 의화학의 강조는 의료 행위를 훨씬 더 합리적인 기초 위에 올려놓았으며, 실제로도 많은 생명들을 구하였다. 의화학파는 화학과 의학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연금술이 화학으로 전환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파라켈수스 자신은 신비주의 사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였다. 신비주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최초의 노력은 그의 후계자인 리바비우스(1540?∼1616)에 의해 이루어졌다. 리바비우스는 화학을 "치료약을 생산하고, 분리장치를 써서 혼합물에서 순수한 정수를 추출해내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1597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연금술>은 당시의 화학지식을 광범위하게 개괄한 책으로, 의화학과 연금술에 사용되는 물질은 물론, 그때까지 야금술의 일부로 간주되어오던 화학지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바비우스가 이처럼 화학이 독립된 학문이 될 수 있도록 성분 추출과정과 장치들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건 사실이지만, 그 역시 연금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네덜란드의 반 헬몬트(1579∼1644) 역시 연금술사였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부정하고 정량(定量)적인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가스(gas)'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산화탄소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연금술이 본격적으로 화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정량적인 실험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아직 화학이론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지만 산과 염기, 염 등과 여러 화학반응의 본성들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아마 최초의 위대한 화학자란 명예는 독일의 루돌프 글라우버(1604∼1668)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큰 공장을 세워 황산과 질산을 생산하였으며, 산업에 응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험실에서 여러 반응을 연구하고 개발하였다. 1648년에는 연금술사의 집을 사들여 자신이 설계한 최신 화학실험실로 개조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연금술의 시대에서 화학의 시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또 망초(황산나트륨, 글라우버 염이라고도 한다), 아세톤, 벤젠, 페놀, 황산 등을 공업적으로 생산하였다. 그의 <화학대전>에는 화학기술의 개선에 기울인 그의 노력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실로 글라우버는 근대 공업화학의 시조라 할 만하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인 15세기 전후에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학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자연과학에 관한 글들까지도 함께 부활시키는 뜻하지 않은 성과를 가져왔다. 대표적인 예로 루크레티우스(B.C.99∼55)를 비롯한 그리스 원자론자들의 저서가 번역되었고, 이로 인해 물질은 변화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이 도전을 받는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 데모크리투스의 교사인 루시푸스는 공간이 끊임없는 운동에 의해 작동되는 원자로 채워져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에피쿠루스와 루크레티우스도 같은 것을 가르쳤다. 이렇게 모든 물질이 작은 구성단위로 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을 원자론이라고 하며, 더 이상 하부구조를 갖지 않는, 즉 더 이상 잘게 나눌 수 없는 최소의 단위를 '원자(atom)'라고 불렀다. 르네상스 운동에 힘입어 다시 소개된 원자론은 반 헬몬트의 실험으로 강한 지지를 받게 된다. 즉, 일련의 화학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물질이 보존되는 실험결과들이 누적됨으로써, 물질이 반응하는 모든 단계에 불변인 부분이야말로 미소한 원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렇지만 초기의 원자론자들은 원자론과 변성을 서로 모순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형상과 질을 원자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는 헤르만 보에르하브(1664∼1734) 같이 태도가 분명한 원자론자도 변성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17세기는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 같은 합리주의자들이, 신비 요소를 배제한 기계론적 철학에 입각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려고 시도하던 때였다. 관측과 실험은 이 시기 새로운 과학의 표어였다. 데카르트는 수학을, 갈릴레오는 관찰을 강조하였으며, 베이컨은 귀납법을 주장하였다. 베이컨은 또한 과학의 탐구가 협동작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하여 과학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과학공동체의 창설이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물론, 굳게 닫혀 있던 연금술의 작업이 비밀의 장막을 열고 나와 서로의 정보를 교류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계몽주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이성과 합리주의, 그리고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무기로 앞세운 이 시기의 과학자들은, 단순한 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과학 방법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철학체계까지도 함께 만들어갔다. 바로 이때 아이작 뉴튼(1642∼1727)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계몽주의 시대를 여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뉴튼은 1687년에 <프린키피아>라는 놀라운 책을 남김으로써, 이후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기계론적 세계관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뉴튼역학과 데카르트, 그리고 베이컨에 의해서 기초가 다져진 이 기계론적 세계관은 이후 3백년이 넘게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기본 사상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철학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정작 근대과학 혁명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뉴튼 자신은 연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제학자 케인즈는 뉴튼을 가르켜 고대과학의 마지막 제자라고까지 묘사했다.
"그는 이성 시대의 선두주자가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마술사이자 마지막 바빌론인이고 마지막 수메르인이며, 일찍이 1만년 가까운 옛날에 우리의 지적 유산을 정립하기 시작한 사람들과 똑같은 시각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었던 마지막 위대한 사상가였다."
실제로 케인즈가 경매시장에서 샀던 뉴튼의 미발표 원고는 연금술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뉴튼은 변성을 믿었으며, 자신의 혁명적인 물리이론보다 연금술을 연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1975년에 베티 돕스 교수는 <뉴튼 연금술의 기초>라는 책에서 연금술에 관한 뉴튼의 여러 원고들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돕스에 따르면 1675년 이후 뉴튼의 활동 대부분은 연금술과 역학을 통합하려는 힘겨운 노력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뉴튼 개인의 이상과는 관계없이, 뉴튼역학의 승리는 그 자신의 과학적 이상을 파괴하고 기계론적 세계관을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뉴튼역학과 함께, 유기적이며 질적인 연금술사들의 세계관이 정량적이며 기계적인 세계관으로 대체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 원자론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원자론이 확립된 이론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좀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다. 화학 분야에서 기계론적 화학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이 로버트 보일(1627∼1691)이었다. 화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보일은 원자론에 바탕을 두고 원소관을 수립하여, 근대화학에 원자론을 도입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보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과 파라켈수스의 3원소설을 부정하고, 대신 원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그는 1661년에 발표한 <회의적인 화학자>에서 "원소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이고 단순한 어떤 물질, 혹은 다른 어떤 것과도 전혀 섞이지 않은 물질을 말한다. 물체는 다른 어떤 물질로도 이루어지지 않은 이들 원소가 혼합된 복합체이며, 결국에는 이 성분들로 분해된다" 라고 하였다. 결국 어떤 물질이 몇 개의 물질로 다시 분해되는 것은 참된 원소가 아니란 이야기다. 보일은 또한 과거의 화학 연구가 약품의 조제라든가 금속 추출, 또는 변성에서 그쳤다고 지적하는 한편, 화학의 참된 임무는 물체의 성분과 조성을 알아내는 데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화학을 의학으로부터 분리하여 과학의 한 분과로 수립하였고, 과학적 성과도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화학 분야의 기계론적 방법론을 정립하였다. 이같은 기계론적 철학의 영향으로 연금술은 마침내 실험화학과 영적인 부분으로 분리되고, 화학에서 신비적인 요소는 점차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변성에 대한 믿음만큼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회의적인 화학자>를 씀으로써 다른 화학자들로 하여금 연금술을 불신하도록 만들었고, 그 자신이 연금술에서 화학을 분리해내는 데 큰 공헌을 한 보일조차도 변성을 믿고 있었다.
"다른 물체와 마찬가지로 모든 금속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하나의 보편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만 금속을 구성하는 미세한 부분의 크기나 형태, 운동이나 정지 상태, 혹은 구성이 달라서 개별 물체들을 구별짓는 친화성이나 질(質)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한 금속은 다른 종류의 금속으로 변성되게 마련이며, 이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원자론이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시기에 보일이 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변성은 과연 원자론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연금술과 근대화학 간의 갈등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라브와지에가 나서서 4원소설과 원소변환의 기틀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힌 것이다. 라브와지에는 블랙과 프리스틀리 등이 18세기에 이룩한, 기체화학 분야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화학혁명을 이끌었다. 사실 중세에는 거의 기체를 연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연금술의 연구가 금속 변성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은 연금술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연금술 과정은 우선 하소( 燒)의 과정을 거치는데, 기저물질에 열을 가하거나 태워야만 변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불을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기에, 연금술의 마스터들은 불의 비밀을 통달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이란 물체를 개별 원소로 분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불타는 나무를 예로 들어 물체가 4원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입증하곤 했다. 즉 나무가 탈 때 불꽃이 일어나고(불), 나무 끝에서 수분이 생기며(물), 연기가 올라가고(공기), 그리고 나무가 타고 난 뒤에는 재(흙)가 남는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보일은 불·공기·물·흙이 타기 전부터 나무 그 자체에 실제로 들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며, 또한 네 원소가 타기 이전의 나무보다 더 단순한 물질이라는 증거도 없다고 이런 견해를 반박하였다. 한편, 독일의 요하힘 베허(1635∼1682)는 고체 중에는 가연성 성분이 있어, 연소시에는 이 가연성 성분이 고체에서 도망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이후 에른스트 슈탈(1660∼1734)의 '플로지스톤(Phlogiston)설'로 발전하였다. 이 플로지스톤설은 그후 1세기 동안이나 거의 모든 화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화학의 발전에는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이때 영국의 조셉 블랙(1728∼1799)은 정량적 방법을 도입하여 근대화학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기체는 액체나 고체에서 방출되는 것이 아니고 고체나 액체와 동등한 위치의 물질이라는 사실, 그리고 공기가 원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또 다니엘 러더퍼드와 헨리 캐번디시, 조셉 프리스틀리 등에 의해 질소와 수소, 그리고 산소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라브와지에(1743∼1794)가 있다. 그는 공기 속에서 금속을 가열시키면 금속의 질량이 반드시 증가한다는 사실을 정량적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금속의 무게가 증가하는 이유를 공기 중의 산소와 금속의 결합으로 설명하였다. 이로써 플로지스톤설이 무너지고 산화설이 등장하면서 합리적인 화학 발전의 기초가 수립되었다. 한편, 유리 플라스크에 물을 넣고 가열할 때 생기는 흙과 같은 침전물을 놓고 사람들은 물이 흙으로 변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라브와지에는 가열하기 이전의 플라스크 무게보다 가열 후의 플라스크 무게가 감소했고, 그 감소한 무게가 물에서 생긴 침전물의 무게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침전물은 물에서 전환된 것이 아니라 플라스크의 한 성분임을 밝혀냈다. 또한 물이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4원소설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원소변환의 사상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 라브와지에는 <화학원론>을 출판하였다. 라브와지에는 이 책에서 원소를 가리켜 현재까지의 어떤 수단으로도 분해할 수 없는 물질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정량적 방법을 바탕으로 '질량불변의 법칙'이라는 현대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되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정량적 방법의 중요성을 인정한 화학자들은 이미 물리학에서 대성공을 거둔 바 있는 수학적 방법을 화학에 응용하기 시작하였고, 독일의 벤자민 리히터(1762∼1807)는 '화학양론(化學量論)'이라는 아주 중요한 개념을 화학에 도입하였다. 그는 화학반응에 관한 광범위한 정량분석을 시도하여 원소당량(元素當量)을 측정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스 프루스트(1754∼1826)는 모든 화합물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더라도 같은 조성을 가진다는 정비례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정량적인 실험방법과 리히터의 '화학양론', 라브와지에의 '질량불변의 법칙', 그리고 프루스트의 '정비례의 법칙' 등은 돌턴(1766∼1844)의 원자론 수립에 기초가 되었다. 돌턴의 원자이론은 연금술과 화학을 최종적으로 분리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변성의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한 마지막 결정타였다. 돌턴은 <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에서 원자는 그 종류가 많고 원소에 따라 각기 정해진 특성이 있으며, 각각의 원자는 크기와 무게가 서로 다르다고 밝혔다. 또한 종류가 다른 두 원소가 결합할 때는 반드시 한 원자씩 정수비로 결합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원자는 더 이상 다른 원소의 원자로 변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게이 뤼삭(1778∼1850)은 기체반응의 법칙을 수립하여 분자의 존재를 가정했고, 아보가드로(1776∼1856)는 1811년에 분자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분자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진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나 지난 1860년의 일이었지만, 원자론과 분자론의 확립으로 이제 원소는 서로 변환될 수 없는 각기 독특한 특성을 지닌 원자라는 사실이 명확해졌으므로 변성에 대한 연금술사들의 믿음은 더이상 버티고 서 있을 자리가 없어졌다. 한편, 대혁명 이후 프랑스에서는 유물론 사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학자인 콩트는 형이상학에 반대하면서 모든 학문에 경험적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의 사상을 떠받들고 있던 백과전서파 역시 <백과전서>를 편집하면서 종래의 형이상학적 사변을 버리고 모든 인식대상을 자연현상만으로 한정하였다. 그들은 또 자연을 초월하는 신이라든가 기적, 영혼 따위를 부인함으로써 유물론 사상의 전개에 주력하였다.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장했던 헤겔은 이를 유일한 과학적 진리로 보았다. 원자론이 물질의 변성을 부정하는 데 기여했다면, 기계론적 세계관과 유물론은 영혼을 부정하고 생기론적 물질관을 거부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유물론은 모든 존재를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하여, 무생물에는 영혼은 물론이고 어떤 생명도 깃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생명현상을 본질이 아닌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유기체라 할지라도 그 물질은 근본적으로 무생물, 즉 원자와 분자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무기물 덩어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볼 때, 영적인 연금술 따위는 그 의미가 전혀 없는 궤변에 불과했던 것이다. 역사는 마침내 황금 및 불사에 대한 추구가 헛된 욕망과 잘못된 믿음에 불과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과학혁명이라는 눈부신 인간지성의 승리 앞에서 유서 깊은 연금술의 역사는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유물론 사상에 물들지 않은 신비주의자들도 더 이상 물질의 변성만큼은 믿지 않는다. 나는 여러 신비주의 사상에 박식한 어느 분과의 대화에서, 물질적인 연금술의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인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게 과학의 힘이라고 나는 느꼈다. 르네상스와 함께 부활한 고대의 원자론이 과학혁명과 돌턴의 노력에 힘입어 새로운 모습을 갖춤으로써, 물질의 변성과 원소의 변환을 주장하는 것은 이제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의 개막과 더불어 연금술은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이제 영적인 의미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