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42]아, 문(익환) 목사님!
김형수의 『문익환평전』(다산책방 2018년 5월 펴냄, 726쪽, 25000원)이라는 엄청 두꺼운 책을 나흘만에 정독, 완독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내가 선물한 김형수의 『김남주평전』을 접하며, 그가 『문익환평전』도 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권의 평전으로 ‘전사戰士’ 김남주金南柱(1945-1994) 시인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행운幸運을 맛보면서, 문익환文益煥(1918~1994) 목사에 대한 ‘모든 것’도 틀림없이 알게 되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오랜 전우가 택배로 보낸 이 책을 끝내 다 읽었다. 역시, 문학평론가 김형수의 필력은 대단했다. 2년이면 끝낼 줄 알았다는 『문익환평전』은 5년의 시간으로도 부족했다고 한다. 중국, 간도, 일본에 이어 북한까지, 한 위인의 평생 족적을 더트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으랴.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짱짱하게 해냈다. 내공이 정말 만만찮았다. 김형수는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김남주평전을 MZ세대들이 읽기를 바라며 썼다”고 했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평전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것을 그가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그가 쓴 『소태산평전』(소태산은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이다)도 곧 구해 읽을 생각이다.
아무튼,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가슴이 벅찼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너무 너무 고마웠다. 이 땅에, 나의 시대와 접하며 이런 ‘성자聖者’가 다녀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야 그분의 ‘정체’를 제대로 알게 된 나의 무지無知을 탓했다. ‘또 오버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으면 좋겠다. 오버할 때에는 해야 하고, 눈물이 날 때에는 울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분노憤怒’를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모처럼 서울 나들이에 수유리 4.19묘지 근처, 인수동사무소 바로 옆골목에 있는 <문익환 통일의 집>을 찾았다. 그분이 30여년 동안 부모님을 모시고 자녀들과 사셨던 집인데, 이제 <문익환 기념관>이 되어 우리를 반기고 있다. 곱게 늙어가시는 그분의 따님이 관장館長이 되어 부모님에 대하여 조용조용히 말씀해주신 것도 고마웠다. 무엇보다 기념관 입구에서 티 하나 없이 환하게 웃는 목사님의 웃음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 금방이라도 사진 속에서 튀어나오셔 ‘왜 이제 오느냐?’며 ‘아무것’도 아닌 나를 껴안아 주실 것같았다.
늦봄(문 목사님의 호)과 봄길(사모 박용길의 호), 두 분이 평생 기거했던 방 벽에 걸어놓은 사진에 절을 두 번 하며 묵념했다. 가시밭길이었던 민주화民主化의 긴 여정에 ‘큰 획’을 그으시느라 갖은 고생을 했던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찌 오늘날의 ‘미완성 호사豪奢’나마 이렇게 누릴 수 있으랴? 기념사업회에서 아카이브를 근거로 <월간 문익환>을 내고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2023년 6월호 통권 14호). 타블로이드판 8쪽, 이런 월간신문을 보거나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 그리고 돌아가신 지 30년이 흘렀는데도, 이런 월간지를 앞으로도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위인偉人이 이 땅에 몇 명이나 있을까를 생각해 보시라. 왜 지금도 ‘문익환’인지를 알면 그 답을 알고 있으리라.
평전을 쓴 이에게 문목사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으면, 그가 “시인 김남주는 시인이라기보다 전사였다”고 말했듯, 곧바로 “문목사는 그리스도적인 민족주의자”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예수가 석가釋迦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시라. 배척을 할 것같은가?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서로 보듬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을. 민간인 문익환이 북한의 주석 김일성을 보자마자 달려가 크게 보듬은 것처럼 말이다. 당시 북조선에서는 얼마나 놀랐을까? 그가 ‘고구려적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구려적 사람, 고구려적 인간, 이 얼마나 그리운 말인가. 태생에서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 목사님에게서 ‘대륙정서大陸情緖’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대마도가 우리땅이듯이 간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땅이었던 것을. 그의 아버지 문재린목사, 어머니 김신묵 여사 그리고 그의 조부모, 증조부모, 모두 고구려인에 다름 아니었고, 항일운동,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에 일생을 바친 열혈투사들이었다. ‘명문가名門家’를 아시리라. 귀족貴族이 아니어도 명문가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언행일치言行一致를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 하면 틀린 말일까? 아니다. 맞다. 거기에서 문익환 목사와 그의 동생 문동환이 탄생한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민주가 먼저냐? 통일이 먼저냐?가 아니고 민주=통일, 통일=민주였던 것이다. 절대로 선후先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그러기에 한낱 민간인이 국가보안법을 어기면서 평양으로 달려가 김일성을 만나 ‘4.2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다.
목사님은 시인 윤동주와 요즘말로 ‘절친’이었다. 그러기에 평생 ‘윤동주 콤플렉스’에, 통일과 민주화운동에 온몸을 던져 산화한 ‘장준하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것을 극복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신학자였고, 교수였으며, 성경 공동 한글번역과 우리말과 글을 몹시도 사랑한 시인이었다. 환갑이 다 되어서야 감옥을 제 집 드나들기 6차례, 모두 11년 3개월이었다. "감옥에 오지 않았으면 인생 헛살 뻔했다”는 수시로 진심으로 말했다. 호 ‘늦봄’처럼 뒤늦게 시인이 되어, 오랜 윤동주 콤플렉스도 벗어났다. 그의 시는 김남주의 시처럼 전사戰士의 시였으며, 하나같이 눈물의 시였다. 보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장에서 그가 호곡號哭한 것은 오직 16명의 열사들의 이름뿐이었다. 그밖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으랴. 우리는 그분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 어디 ‘시대의 빚’뿐인가? ‘겨레의, 민족의 빚’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석 자, 문, 익, 환, 우리는 세세歲歲토록 세세細細하게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넬슨 만델라를, 마하트마 간디를, 마틴 루터 킹을, 체 게바라를 기억하듯, 우리 아들과 손자세대에게 ‘그 이름 석 자’를 알려줘야 한다. 나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하자. 사랑을 하려면 딱 이렇게 하렷다는 식으로, 늦봄과 봄길의 사랑, 순애보는 끝도 갓도 없었다. 스무살에 만나 처음부터 ‘연분홍 코쓰모쓰’라 불렀는데, 일흔이 넘어도 그 애칭으로만 불렀다. 친정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며 한 봄길의 말을 떠올리자. “이분과 6개월만 살아도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강기剛氣를 보라. 그들은 쇠창살을 가운데 놓고도 ‘사랑의 꽃’을 피웠다. 2천통이 넘는 봄길의 편지, 1천여통에 이르는 늦봄의 편지, 읽기에도 조금은 민망한 그들의 애정표현, 요즘 아이들의 설익은 사랑에 편지가 어디 소통의 수단이 될 것인가? 그들의 사랑은 ‘옥중문학獄中文學’으로 거듭난 것을. 그는 말했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그 사랑이 어찌 남녀간의 사랑만이랴. 『만인보』를 쓴 고은의 <문익환> 제목의 시 끝구절처럼 <그는 군법회의에서 군검찰을 꾸짖을 때도/그것이 노기가 아니라/알고 보면 넘치는 사랑이었다>가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그는 100% 그런 순정純情의 ‘댄디 보이’였던 것을.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를 아시는가? 1985년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아시는가? 1990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아시는가? 이렇게 굵직한 사건과 그 배후에는 언제나 문익환 목사가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란 게 없지만, 문목사가 방북한 민족 최대의 성과인 ‘4․2 공동성명’에 대해 당시 노태우정부가 진지하게 검토하여 추진했다면 통일統一이 성큼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까짓 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영웅’을 구속하다니, 언제나 낙천적이었던 그가 감옥에서 너무나 아픈,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을 얻은 것이다. 그게, 그것이 슬픈 일이다. 아아- 새대가리들이여! 그렇게도 쫌팽이들뿐이었던가? 그렇게도 민족문제를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니? 고은의 시 구절 <7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가장 어린 사람/이어서/8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가장 젊은 사람/7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가장 순정의 사람>이 문목사였다. <60세 따위, 70세 따위는 나이가 아니라구/감옥이나/감옥 밖이나 너무 똑같아서/감옥이 아니라>던 그를, <아이들한테도 배우고/누구한테도 배워/온 세상을 사랑으로 채워/물이 (이미) 넘치>게 만들던 그를, “하나 되는 것은 더 커지는 일”이라던 그를 끝내 병들게 했다.
1월 18일은 문 목사님이 눈을 감으신 날이다. 지금도 해마다 마석의 모란공원에는 많은 이들이 문목사님의 묘를 찾는다고 한다. 이제껏 가뵙지 못한 게으르고 무식하고 무심한 나를 묵묵히 바라보실까? 천상병 시인처럼 <괜, 찮, 다,/괜, 찮, 다,/다, 괜, 찮, 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실까?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절창絶唱의 시를 읊조린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중략)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밝고 싱싱한 꿈 한자리
평화롭고 자유로운 꿈 한자리
부디부디 점지해 주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