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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달에는 지난 해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인문학을 하나님께2>(한재욱 목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은 <감사의 글>에서 “인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분야로 철학과 역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네 인생의 생각이 철학이고, 우리네 인생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인문학을 하나님께2>에는 ‘철학’과 ‘역사’,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놓여야 할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보았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1. 철학, 인생을 질문하다]의 첫 번째 글인 <지금, 왜 철학인가?>(p13-19)를 소개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는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us)의 말이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계시를 상징하고, 아테네는 학문과 이성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터툴리안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호 적대적인 관계로 보았다. 그는 또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그리스도인이 왜 (골치 아픈) 철학을 알아야 합니까?”
-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지 맬러리]의 이야기로 다가가 보자.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보다 앞서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던 영국의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맬러리]는 1924년 6월 8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에 실종되었다. 그의 시신은 75년 후인 1999년 설산에서 발견되었다.
- 그는 등정에 나서기 전, 이런 질문을 받았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 그때 그가 남긴 유명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요!”(Because it is there.) 산을 오르는 목적이 오로지 산에 있다는 맬러리의 대답은 지금까지도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 그리스도인이 철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인간에게 철학의 마음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산이 거기 있기에 등산가가 산을 오르듯, 하나님이 인간에게 철학의 마음을 심어 놓으셨기에 우리는 철학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것이 철학의 마음이다.
- 물이 담긴 투명한 컵에 젓가락을 넣으면 휘어져 보인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휘어져 보이는 것들이 많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산도 돈으로 보고, 물도 돈으로 보고, 사람도 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돈으로 보려고 한다.
- 이렇듯 본질(아르케)이 다 휘어져 있는 가운데 우리는 컵에서 젓가락을 꺼내 휘어지지 않은 그 본질을 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고 싶어 한다. 이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본질을 사모하는 마음이며, 이것이 철학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필요를 위해서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 자체에 철학하는 마음이 있기에 철학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지 ‘교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a)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a) 그리스도인이 구름 위에 위에서만 머물며 안식을 누리려 한다면 어쩌는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곳은 구름 위뿐만 아니라 세상이다. 우리가 세상에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알아야 한다.
- 많은 신학자들이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소 어감(語感)이 강하긴 하지만 옳은 선언이다. 이 주장이 나올 당시에는 학문이 여러 분과로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여기서 철학은 학문 전체를 의미한다. 이 말처럼 신학이 학문의 왕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성군(聖君)은 백성의 아픈 마음과 오류까지 바로 헤아리는 법이다. 신학이 성군이 되자면 다른 학문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로 주셨고, 학문은 이성적 연구의 결과물이기에 모든 학문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 속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어그러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에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방향을 바로잡을 책임이 주어졌다. 이를 위해서도 일반 학문을 잘 알아야 한다.
- 정리해보자. 신앙은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먼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음성을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을 잘 알아야 한다. 땅을 잘 알기 위해서는 철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학문의 총체가 철학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부족한 종에게 극동방송의 <인문학을 하나님께>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하게 하시고, 신문에 칼럼을 쓰며,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분들에게 ‘경건 이메일’을 발송하게 해주셨다. 나는 이런 일들을 통해 하늘의 음성이 공감 있는 땅의 언어로 쉽고 친근하게 접목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와 가깝게 만나고자 성육신하였듯이, 신앙의 언어도 땅의 친근한 언어로 접근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럴 때 일반 사람들도 깊이 공감하며 신앙의 세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 베드로전서를 보면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이야기가 나온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1:10) 가령 어떤 분이 남편을 전도하려 한다면, 남편이 좋아하고 흥미롭게 여기는 주제가 무엇인지, 남편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남편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땅을 잘 알아야, 철학을 잘 알아야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살펴 연구하고, 땅의 탄식을 연구하며 부지런히 살피자.
- 그리고 우리는 철학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강영안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철학을 피하기 위해서도 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철학을 알지 못하면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철학에 붙잡혀 있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사회 운동가들, 신학자들, 목회자들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어떤 철학을 따르는 것보다 이런 경우가 더 해로울 수 있습니다.”
- 철학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지적이고 이론적이며 반성적인 작업이다. 파스칼은 “철학을 조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철학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철학을 조롱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철학의 밑바탕인 이성을 절대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실 이성을 절대시하지 않을 때 가장 이성적일 수 있고, 철학을 절대시하지 않을 때 가장 철학적일 수 있다.
- 철학은 사람의 생각이다. 한 철학자의 생각이 아무리 고매하다 해도 그것은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이며 흠이 있다. 또한 철학이란 학문이 본래 비판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철학 그 자체에 파묻히면 철학을 비판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철학적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철학이 없다.”라는 것도 하나의 철학인 것이다.
- 그런데 강영안 교수의 표현대로 플라톤을 전공하면 플라톤주의자가 되기 일쑤이고, 하이데거를 공부하며 하이데거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 철학이 주는 의미가 아무리 크더라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참된 철학적 자세일 것이다. 이처럼 철학의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학을 알아야 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