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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 도 시들지 않기 때문,(2020)>
유고시집이다. 김희준 시인은 시집이 나오던 해 여름 빗길 교통사고로 영면했다. 향년 스물여섯.
친애하는 언니
김희준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 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제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시인은 유채가 필 준비를 마친 4월의 생명 속에서도 죽음 너머를 들여다봅니다. 그래서일까요. 꽃의 사체를 쥘 때도 슬프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봄의 혈색이며 정녕 민낯이었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다만, 그곳은 어린 엄마와 언니가 숨바꼭질하는 늙지 않는 곳이겠지요. 3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2020년 코로나19의 봄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봄은 흐린 날이 많았고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은 안개 속에 있었음을 압니다.
언니가 떠난 나라는 어디일까요? 계절의 배를 가르고 애비가 누구인지만 묻는 그 잔인한 곳을 말하는 걸까요? 사생하는 문장을 더듬어 봄의 혈색을 만나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옷소매에 가득한 죽음에서 시들지 않는 민낯을 발견하는 일은 언니만의 언어는 아닐 겐니다. 사라진 언니가 파문된 비의 언어로 돌아오는 일은 혹, 물의 결대로 살고 싶은 시인의 소망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지난 며칠간 김희준 시인이 남긴 여러 작품을 찾아 읽었 습니다. 처음에는 재기가 넘치는 젊은이였구나, 싶다가 갈수록 그녀의 언어에 스며드는 저를 발견했지요. 그런 그녀가 고작 스물다섯에 불과한데 그녀의 생일이자 사십구재인 9월 10일에 유고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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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시인)
1994년 9월 10일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태어났다. 통영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다녔다.
등단 전 청소년기부터 전국 백일장을 거의 휩쓸며 주목을 받았다. 2011·2013·2015·2016·2017 통영시 인재육성장학금을 받았고 푸른새벽통영장학생 첫 수혜자가 되었다. 2013년 개천문학신인상, 2015년 개천문학상 장원을 수상했으며 2017년 시인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2018년 올해의 좋은 시 100선과 현대시선 50선에 선정되었고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 창작준비지원금을 받았다.
2018년 경상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경상대학교 개척인 70인'에 선정되었고, 2019년 시산맥 특별기획 '시여 눈을 감아라'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2020년 다층시단이 뽑은 올해의좋은시집에 선정되었고 2021년 제14회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 상과 제11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했다.
2020년 7월 24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문학동네 시인선 146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2]으로 유고 시집이 출간되어 있다. 2021년에는 유고 산문집 《행성표류기》가 출간되었다.
한국의 현대시를 신선한 감각으로 접근한 김희준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김희준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 석사 논문 준비 중 사망.
[2] 시인의 말 :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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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시인 ‘시여, 눈을 감아라’ 수상자 선정
시여, 눈을 감아라는 계간 ‘시산맥’에서 특별기획을 출범해 올해 3회째로 토너먼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최종 1명이 남을 때까지 시인의 프로필을 무기명으로 하고 블라인드 심사로 진행한다.
이번에 수상한 김 시인은 2011년 개천문학신인상과 2015년 개천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시인이다. 김 시인은 2017년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등 5편으로 시인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통영장금의 우수장학제도인 ‘푸른새벽장학생’의 첫 수혜장인 김 시인은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현재 월간 ‘시인 동네’에 ‘김희준의 행성표류기’라는 코너를 통해 지역으로 특강을 다니며 문단의 젊은 유망주로 발돋움하고 있다.
김 시인은 지금까지 시인들이 만들어 놓은 서정적 문맥이나 일상적 논리를 상상과 환상으로 끌어올려 전혀 다른 언어의 질서가 주는 긴장을 제시하고 있다. 또 시가 유동성 물질 같이 가뿐하고 자유롭게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몽화적이고 동화적인 상상력이 남다르다는 평가다. 2018년에는 올해의 좋은시 100선에 ‘시집’이 현대시선 50선에 ‘로라반정 0.5mg’이 선정됐고 경상대학교 개교 70주년 자랑스러운 개척인 7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김 시인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생활시인데 모자란 시를 봐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다. 운으로 좋았다. 기회를 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들께 감사하다. 더 열심히 하라는 회초리로 알겠다”며 “세상 모든것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다정한 손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다.
웹진 시인광장이 선정하는 올해의좋은시상 수상작으로 고(故) 김희준(1994~2020·사진) 시인의 ‘제페토의 숲’이 선정됐다.
제페토의 숲 /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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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질 된 태양이 오전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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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나무의 언어를 체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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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
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사라진 숲의 버뮤다에 새들이 궤도를 바꿔 날았다
ㅡ『시산맥』(2019, 봄호), '시여, 눈을 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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