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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해리(傅海利)
(Henry Moro Bruen 1874-1959)
경상(성주)지역 교회 개척
경상도 및 대구지역의 개신교의 전래
대구에 천주교가 전래 된지는 1829년(이조 순조(純祖)29년)경에 전래되었으나,
개신교(改新敎)를 처음 전래시킨 선교사는 배위량 선교사와 안의와 선교사다.
배위량(윌리암,배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6.16-1931.1128 裵偉良) 선교사는
미국 북 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1862. 6. 16일 미국 인디에나주 찰스타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1885년 하노버대학(Hanover College)을 졸업 후 1888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1891년 1월29일 부인(안니.로리아담스)과 함께 부산에 도착, 선교활동을 하면서 1892년 11월에 부산 영선현교회(현 초량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893년 4월 17일 경상도 지방을 순회선교 할 목적으로 부산 동래를 거처
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의성, 신령, 영천, 경주, 울산 등지를 1개월 여 순회 한 후
부산으로 돌아갔으며, 순회 기간 중에 1893년 4월 22일 대구에 도착 수일간 머물면서
대구가 경북지역의 선교기지로 적합한가를 돌아보고 대구를 떠난 후,
그 이듬해 재차 대구를 방문하여 대구가 인구의 밀집지역이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역으로 선교기지로서의 여건이 적합하다는 것을
미국 해외 선교부에 보고하였고,
그로 인해 1895년 11월 북장로교 대구지부를 개설하게 되었으며,
1896년 4월 배위량 선교사는 대구 선교부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12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 교육담당고문으로 임명받아 서울로 떠났고
그 후임으로 배위량 선교사의 처남인 안의와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안의와(아담스)(James Edward Adams 1867-1929 安義窩) 선교사는
대구지역의 장로교의 개척자로 1897년에 대구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의 창설자이며 1906년 10월에 교회구내에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설립하였으며,
대구 경북지방에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한 선교사로 주로 경산군, 영천군, 달성군,
청송군 등지에서 활동하며 사역하였다.
안의와 선교사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에나주 맥코이에서 태어나
1888년 캔사스주 토피카의 워쉬번대학(Wash burn College)을 졸업하고,
1894년 메코믹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5년 5월29일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배위량 선교사의 후임으로 대구 선교부로 임명을 받았으나 한국어를 습득하기 위하여
즉시 부임하지 못하고 1897년 11월 1일 대구 선교부에 부임하여
1923년 대구를 떠날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귀국 후 1929년 6월25일 신병으로 별세하였다.
부해리 선교사의 활동
부해리 선교사는 노상동교회(선산읍교회)의 설립자로
초창기 선산지역의 여러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선산지역 뿐만 아니라 경북 서부지역에 서의 그의 선교활동은
이 지역교회들의 교회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남긴 초석이 되었다.
부해리 선교사는 1874년 10월 26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아버지 제임스 브루엔(James Dehart Bruen)목사의 차남으로 출생,
1892년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디미’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가 되든 해 1896년 프린스톤(Princeton)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99년 뉴욕의 유리언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목사 안수를 받아
1899년 5월 1일 대구 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되어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 1899년 10월 26일 대구선교부에 세 번째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대구제일교회 당회원으로 있으면서
1903년에는 제2대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02년 5월 부해리 선교사의 부인 부마태(傅馬太 Mrs Martha,S, Bruen)여사가
대구에 부임 그 해 대구제일교회 구내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킨 것을 시작으로
대구신명여자소학교(현재의 종로초등학교)를 개설하여
1900년에 설립한(남자부) 대남학교와 같이 경북지방 최초의 신교육학교가 되었고,
1907년 10월 신명여학교를 설립하여 부마태 여사가 교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기여하였으며, 그때 설립한 신명여자중학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구지역의 명문학교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마태 여사는 1930년 10월 신병으로 55세를 일생으로 별세하였다.
부해리 선교사는 1904년에서 1916년 사이
나환자 선교위원의 직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으나,
주로 그 시기에 경북 서부지방 선교에 심혈을 다하여
1901부터 1923년 사이에 경북 서부지방의 선산군(善山郡) 김천군(金泉郡) 칠곡군(漆谷郡) 상주군(尙州郡) 군위군(軍威郡) 성주군(星州郡)등 6개 군을 중심으로 순회선교를 한 결과, 그의 선교활동은 곳곳에 전도의 불길이 확산되어 많은 곳에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으며,
“경북교회사,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경북노회 100회사에 의하면
무려 57개 처에 교회를 설립, 또는 분립시켰으며 선산군 관내에서만 10개처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죽원교회(1901,죽원교회 연혁1899) 괴평교회(1901) 지평교회(1902) 도산교회(1903) 상모교회(1903,상모교회연혁 1901) 노상교회(1904) 오가교회(1904) 습례교회(1905) 청산교회(1906) 백자교회(1911)를 설립하였다.
당시 크리스토교(기독교)가 황무지와 같은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여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인고의 노력과 희생적인 소명감으로 선교에 임하였는가는 가의 짐작이 되며, 오늘날 이 지역의 교회가 부흥 성장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부해리 선교사가 뿌린 씨앗의 열매라 하겠다.
그의 선교활동 중에 남긴 일화 중에 부해리 목사가 선교하기 위한 교통 수단으로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니며 전도를 하였는데
그 당시 대구지방에서는 처음 보는 자전거를 안경말이라 부르며 신기하게 여겨 자전거를 타고 시골마을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몰려와 만져 보기도 하였는데
부해리 선교사는 “우리 나라에는 이런 놀라운 기계들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됩니다.
쓸모 없는 막대기를 숭상하는 사람은 막대기가 되고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기술 있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부해리 목사는 “마이크”라고 부르는 사냥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부해리 목사가 간혹 전도를 나갈 때 데리고 갈 때도 있었는데,
이 때 마을 사람들은 키가 크고 몸에 털이 많이 나고 눈이 파란 서양사람도 구경스러웠지만 우리나라 토종개의 모습과 전혀 다른 서양개가 더 구경스러워
사람들이 몰려들면 부해리 목사는 성경을 펴고 성경 말씀을 들려주며 전도를 하였다 한다.
부해리 목사는 1913년과 1914년에는 경상노회 7대 8대 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노회의 임원직을 맡아 수고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대구 Y.M.C.A의 전신인 교남 기독청년회를 조직하는데
발기인 선교사(부해리, 방혜법, 별추리)의 한 사람으로 대구지구 청년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1915년에 대구 남산교회를 설립하여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면서
목회를 통하여 많은 심령들을 구원받게 하였다.
1941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기까지 40년을
한국 선교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1944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1959년 3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크루즈에서 85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그분의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여기에 부해리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들을 살펴보기로 하며
각 교회의 설립 년도에 대하여는 그 시점을 개인이 전도를 받아
개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시기를 설립연대로 보는 교회도 있고,
개인적으로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외형적 규모 또는 어느 정도의 공동체로서의 조건을 갖춘 시점을 설립 년도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 바 여기에서는 “경북교회사”,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 “경북노회 100회사”를 중심으로 그 기록을 찾아보고자 한다.
대구에 개신교 성지같은 언덕이 있다. 동산(東山)이다.
달성공원에 있는 토성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서문시장과 계산성당이 앉아 있는 읍성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동산 (청라언덕)
조선후기에 이미 동산은 헐벗은 산이었다.
애덤스와 존슨은 달성 서씨의 문중 땅이었던 이 산을 매입하였다.
애덤스는 제일교회를 개척한 선교사이고, 존슨은 동산병원을 세운 분이다.
20세기 초에 이 언저리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산은 대구 시가지와 접해있는 고지대였다.
이 곳에 병원과 선교사 주택이 지어지고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 언덕 같은 산은 이제 각종 건축물로 빼곡하다.
선교사 숙소의 공원 (청라언덕)
동산(東山)이란 언덕은 옛 대구읍성 남서쪽에 위치한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미국 선교사들은 이 언덕에
자신들이 살 집을 짓고 주변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웠다.
이 학교가 신명학교이다.
신명학교는 대구 최초의 여학교였다.
병원은 동산병원이다.
지명 그대로다.
지금도 언덕 위에는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이국적인 주택이 줄지어 앉아 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살았던 그 모양 그대로다.
다만 지금은 교육, 역사, 의료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구지역 결혼 부부들의 웨딩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영화에도 제법 등장한다.
이 언덕에는 예전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져온 사과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동산의 제일교회 옆에 지금도 자라고 있는 이팝나무는 ‘현제명 나무’라 부른다.
쌀밥 같다고 해서 이밥나무라 부르는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
그의 가곡을 불러보면 의미 있을 것이다.
현재명(1903~1960)은 대구 남산동139번지에서 태어났다.
제일교회 현승환 장로의 동생으로 대구의 대남소학교, 계성중학, 평양숭실전문학교,
미국시카고GUN음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가 세운 제일교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국민이라면 한 번은 불러보았을 가곡 <고향 생각>은 그가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식민지시절 우리 민족구성원들의 고단하고 슬픈 삶을 회상할 수 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 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해
--박태준 ‘고향생각’
100년 된 사과나무 - 대구 사과의 원조
선교박물관 뜰에는 100년이나 되는 사과나무가 있었다.
지금 그 나무는 죽고 그 곳에서 새가지가 나와 위태하게 자라고 있다.
1900년대에 존슨 선교사가 심은 사과나무다.
과거에 사과하면 대구였다.
대구사과의 고향이 이 언덕이다.
존슨 선교사가 없었다면 대구는 사과의 명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대구는 존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도시다.
동산의료원은 1899년 개원했다.
이미 110년의 역사를 가진 병원이다.
병원 관사로 사용하던 스윗즈(Switzer) 주택은 '선교박물관', 챔니스(Chamness) 주택은
'의료박물관', 블레어(Blair)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이 되어 사람들을 기다린다.
선교박물관
챔니스 주택 - 의료박물관
동산의 작은 영역은 청라언덕이라 부른다.
이 곳에는 작곡가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박태준(朴泰俊1901~1986)년 대구 동산동72번지에서 태어났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노산 이은상을 만났다.
노산 이은상은 이 학교의 설립자 이승규의 아들이었다.
훗날 노산은 이 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어느날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한 여학생을 사랑하였던 자신의 고민을 이은상에게 털어놓았다.
노산은 대구에서 있었던 박태준의 첫사랑이야기를 듣고
“ 박 선생이 잊지 못할 그 소녀를 노래로 승화시켜 그 곡에 담아 두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노래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소?” 하고
시를 써서 박태준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가곡 ‘동무생각’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 '동무생각'
동무생각 노래비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의 한자음에서 따왔는데
‘담쟁이덩굴이 많은 언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제일교회 교인이었던 박태준은 유년시절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학생을 바로 이곳에서
마주 친다. 이 여학생은 아마도 신명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다.
박태준은 이 소녀를 잊을 수 없어 번민한다.
지금도 동산의 선교사들의 주택과 담에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였다.
아직도 청라언덕은 사연이 그대로인 이곳을 걸으며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밟는다.
이 시는 4연의 시이다.
1연은 봄을 노래한 대구 동산의 청라언덕이 작품의 무대이다.
2연은 노산의 고향 마산의 가포해변의 여름이 배경이다.
3연은 동산의 가을 분위기다.
4연은 서울의 겨울로 짐작된다. 가곡에는 4연이 3절로 불려지고 있다.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의 싹이 자란
박태준은 지금도 많이 부르는
찬송가 493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작곡하였다.
은혜정원 - 선교사 묘역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이 곳에 묘역이 있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묘역에 최초로 묻힌이는 애덤스 목사의 아내 넬리 딕(1866~1909)이다.
만삭의 몸으로 대구에 온 그녀는 43세에 자신의 고국을 떠나와 헌신하다가
이 곳에 묻혀 있다.
그의 묘비에는 영어로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다”는
마태복은 9장24절의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어 감동을 준다.
넬리 딕 묘소
H. M. 브루엔(1874-1959) 부부 선교사의 삶과 선교였다.
헨리 M. 브루엔( Bruen, Henry Munro, 한국명: 부해리)은
1874년 10월 26일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했다.
프린스톤 대학과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1899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대구선교부에 부임한다.
선교사로 파송되기 직전에 마르다(Martha Scott)와 약혼하고,1902년에 결혼하였다.
경북 서부지역은 브루엔( Bruen)의 선교지였다.
김천시의 21교회, 선산군 10교회, 상주군 5교회, 성주군 3교회, 고령군 3교회,
군위 봉황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애덤스 목사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 당회장을 역임하고, 경상노회(제7회) 노회장으로도 활동한 브루엔은 일제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버틸수 없어 1941년에 대구를 떠나야 했다.
그의 부인 마르다 S. 브루엔( Bruen, Martha Scott, 한국명: 부마태)은
1875년 펜실베니아(White Haven)에서 출생했다.
마르다 브루엔이 선교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교지 대구에서 안나(Anna,1905년생)와 해리에트(Harriette, 1910년생)를 낳는다.
그러나 ‘마르다 브루엔’은 1930년 유방암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신명학교는 1907년 부루엔이 대구 최초로 세운 여자학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7년후인
1937년 6월에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가
수행원과 함께 신명학교를 방문, 강연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때 헬렌 켈러는 “미래의 역사를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 하나님이 택한 딸로서 재능을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되라”강조했다고 전한다. 오늘도 부루엔의 영혼은
대구 시내를 내려다 보며 침묵으로 대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마르다 브루엔 묘소
청라 언덕 한 쪽에 신축한 대구제일교회
계산성당에서 이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90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 골목 계단의 역사성은 대단하다.
신축된 제일교회와 담을 경계하면서 오르다 보면, 옛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이 사진 속에는 대구의 옛 모습이 살아 있다.
계산성당에서 동산병원으로 이어진 계단식 길은 ‘대구 3.1운동 길’이라 부른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이 길을 따라 행진했기 때문이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이 곳 동산의 소나무 숲에서 모임을
가진 후에 시내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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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엔 선교사는 누구?
헨리 M. 브루엔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파견되어 대구에서
1899년부터 1941년까지 활동했다.
원본 책의 저자인 클라라 브루엔은
1924년 5월부터 1941년 11월까지 18년간 대구 동산병원의 간호과장으로 근무했다.
브루엔의 첫 번째 부인이 숨진 뒤 1934년 그와 결혼했다.
클라라는 1970년대에 펴낸 원본(발행일 미상`A4 600장 분량) 서문에서
브루엔 선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내가 애틀랜타에 살고 있던 1970년이었다. 내가 수년 동안 간호부서의 책임자로 있었던
대구 동산병원 출신이라는 한국 여성과 만났다.
이 젊은 여성은 한국 사람들과 병원의 관계자들이 부 목사(브루엔의 한국 이름 부해리를 의미)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그가 시골에 선교 여행을 갔다가 병원을 방문하면 크게 환영을 받았고,
채플에서 설교를 할 때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했다.’
책 서문에 따르면 헨리 브루엔은 미국 뉴저지 서밋에 있는
중앙장로교회의 초대 목사였던 제임스 드하트 브루엔의 둘째 아들로 1874년 태어났다.
역시 목사였던 할아버지, 제임스 맥호터 브루엔이 작고한 뒤 할머니 안나 밀러 브루엔도
이들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유명한 성서학자이자 교육자였다.
헨리 브루엔은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목사가 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가 1899년에 졸업했다.
그해 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미국 장로회의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명령을 받았다.
1898년 제일교회, 1906년 계성학교를 각각 설립한 제임스 E. 아담스(한국명 안의와`1867~1929) 목사와 동산병원 초대 원장인 우드브릿지 존슨(한국명 장인차`1869~1951) 박사는 당시 대구에서 선교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헨리 브루엔과 이들이 대구 선교의 창시자라고 클라라 브루엔은 기록하고 있다.
책을 편역한 김 교수는 “한국 선교사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개신교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워낙 분량이 방대해 연구자들의 접근이 수월하지 않았다”며 “클라라 여사가 남편의 유고를 정리하는 형식으로 여러 자료를 모았지만 편집까지 손을 대는 바람에 번역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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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녀 마르타 드푸이 스캇 선교사와 편지로 사랑을 나누던 브루엔 선교사는
휴가를 얻었다.
그는 1901년 12월 24일 성탄절 이브에 일본에서 갤릭호를 타고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남태평양철도를 타고
남부경로를 이용하여
고향 벨브디어에 가서 부모에게 인사하고 펜실베이니아주 화이트헤이븐으로 갔다.
브루엔 선교사는 1902년 2월 14일의
바렌타인스 데이에 펜실베이니아주 화이트헤이븐에서
아버지 H.M. 브루엔 목사의 주례로 스캇 선교사와 결혼했다.
결혼한 후 5일째인 1902년 2월 19일에 브루엔 선교사 부부는 한국을 향했다.
한국행은 신혼여행이기도 했다.
그들은 뉴욕을 떠나 아프리카와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태리의 제노아와 로마, 북독일, 그리스 아덴 등 유럽을 여행하였으나
성지순례는 하지 않고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와 사일론, 나가사키를 거쳐 세계일주여행을 한 후
1902년 5월 1일에 부산에 도착했고, 그달 10일에 대구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