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보는 축제
갑자기 세상의 모든 영화와 소설책들이 시시해졌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즐겨보시던 연속극을 놓친 것을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꼬마들도 만화영화 대신 빨간색 옷만을 찾습니다. 대신 거리로 거리로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만나는 이 모두가 괜스레 미소를 보냅니다. 낯모르는 이가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내가 먼저 말을 건네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벗은 몸과 얼굴에 물감칠을 한 청년도, 버스 위에 올라간 젊은이들도, 경적소리 요란한 폭주오토바이도 박수를 받습니다. 우리가 처음 맛보는 축제의 열광이자 신명이라는 국민적 흥분 너머엔 '집단적 광기' '히스테리적 발작'과 '국가주의의 음험한 그늘'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음미해야 할 소수의 시각이지만, 다음 기회에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들 안에서 나오는 소수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송종국 선수 어머니의 눈물
이탈리아를 꺾은 이튿날 아침 19일 방송이 축구팬들의 분노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송종국 어머니의 눈물을 외면해선 안됩니다. 오늘 아침마당에 8강을 자축하면서 김흥국씨외 응원단들과 전 국가대표 감독님,선수들의 부모님이 나왔습니다. 거의 1시간동안 어제의 놀라운 결과에 대한 얘기가 오가면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선수에 대한 찬사와 설기현선수의 활약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송종국 어머니에게 마이크를 건넸는데 그만 그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왜 우리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번도 하지 않느냐. 누구보다 우리아들이 잘 싸워주었고 큰 공을 세웠는데 공격수가 아니라고 이렇게 등한시 할 수 있느냐' 면서 너무도 서러워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당황한 사람들, 송종국선수를 추켜세우더군요.....
하지만 평소 우리 언론에서 안정환을 너무 영웅시하는 분위기는 사실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의 탁월한 외모로 평소 CF나 방송출연이 많았던 그라 월드컵경기중에 그와의 인터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고 국민에게도 친숙한 외모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모든 언론이나 방송의 헤드라인에서 안정환을 내세우고 그만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여서는 안됩니다. 마치 그가 한국최고의 선수인 듯한 분위기여서는 안됩니다. 그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 숨은 수훈자, 묵묵히 경기에 집중하는 보이지 않는 수비자나 미드필드선수들 모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줘야 공평하다는 말입니다.
팀의 승리는 곧 선수 개개인의 승리라고 하지만 안정환선수 개인만을 영웅시한다면 다른 선수들간에 서운함과 실망감을 느낄수 있습니다. 우리들 눈에는 잘 뛰지 않지만 분명 수비수나 미드필드가 있었기에 우리팀이 선전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송종국선수 어머니의 눈물을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예비축구선수들간에 이러한 말이 오간다고 합니다. 공격수가 제일이라고. 축구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머니, 우시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선수들의 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이미 세계 언론을 통해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진보적인 언론 가디언에서는 월드컵 경기에 대한 상보를 전하면서 모든 출전 선수들의 그날 그날 경기내용을 기준으로 평점을 매깁니다.
한국 선수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평가입니다. 송종국 선수의 어머니가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격려도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소식통들이나 우리와 경쟁했던 모든 팀들은 안정환이나 설기현을 위험대상이나 잘하는 선수에 넣지 않습니다. 경계대상 두려움의 대상은 미드필더 즉 송종국 이영표 김남일 유상철이고, 수비수 홍명보,김태영,최진철 골키퍼 이운재입니다. 히딩크 감독 또한 유럽에 데려갈 친구들은 공격수중에는 박지성 정도, 그리고 대부분 미드필드인 김남일, 송종국, 이영표입니다. 황선홍이나 유상철, 최진철 등은 나이가 많아 나가지 못하겠지요. 우리팀의 컬러는 압박 미드필드입니다. 절대 화려한 공격이 아닙니다. 호나우도, 비에리, 라울, 파울레타처럼 혼자서도 해결할 줄 알아야 정말 공격수이지요...우리는 이영표, 이을용의 어시스트가 없으면 안 되는 공격입니다...송종국 선수 어머니는 슬퍼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분명 종국이는 유럽에 진출해서 훌륭히 뛸 것입니다... 멋지게 훌륭하게 돈 많이 벌고..
송종국 선수 어머니의 눈물이 부러운 사람들
한국팀 8강 신화를 가능하게 한 선수들을 이야기할 때 이운재 선수를 빼놓지 않습니다. 정말 잘했습니다. 우리팀 수문장 이운재 선수의 신들린 철벽수비에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집니다. 그런가 하면, 주변에선 "아 안됐다. 김병지....이운재가 너무 잘해서" 하는 김병지팬들의 동정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뭘 그래. 대표팀 선발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데...그리고 경기 안 뛰고도 병역혜택 받고 포상금 몇 억원씩 받을텐데...별 걸 다 동정한다...." 바로 맞 받아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송종국 선수의 어머니의 눈물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냉혹한 승부의 세계란 별 수 없는 거야'란 매몰찬 결과주의에 이의가 없지 않습니다. 잘 뛰고 충분히 국내 언론을 비롯한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은 송종국 선수의 어머니가 "매스컴의 부당한 대접"에 대해 눈물 흘렸다면, 그 눈물을 "행복에 겨운 눈물"이라고 볼 다른 선수들의 가족들의 "또다른 눈물"이 뜨거운 까닭입니다. '23명의 태극전사' 들 중에서 아직 한번도 경기를 뛰어보지 못한 선수가 문지기 김병지 선수만은 아닙니다. 문지기 최은성, 수비수 이민성, 미드필더 현영민 윤정환 최성용 최태욱 선수 등은 '3승1무'의 화려한 한국팀 8강신화가 이뤄지는 동안 한번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엔 2006년을 기약할 수 없이 이번을 마지막으로 월드컵과 인연을 끝날 선수들도 여럿입니다. "솔직히 송종국 선수 어머니의 눈물이 부럽다" 고 말할 이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 축구사상 최대의 치욕적 사건은?
전국민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거리응원을 한다지만, 축구에 대한 열광이란 측면에서 우리 나라는 이름도 내밀지 못합니다. 일년 내내 축구로 신문이 도배되다시피 하는 남미와 비교하자면 그렇습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때 콜롬비아는 펠레에 의해 강력한 우승후보로 지목되었지만 16강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이때 콜롬비아의 수비수 에스코바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자살골을 넣고 귀국하다가 마약밀매조직의 총탄을 맞고 살해되었습니다.
이번에 기대에 못 미친 성적을 내고 16강에 탈락한 채 '집으로' 돌아간 팀들도 예상 밖 국민 환대에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총탄은 아니더라도 욕설과 토마토나 달걀 세례를 기대했음직도 한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폴란드 선수단들은 "안타깝지만 잘 싸웠다"는 국민 격려에 놀랐을지 모릅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국축구의 가장 치욕스런 장면은 아직도 월드컵 역사에 최대의 점수차로 남아 있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의 한국 0-9 헝가리 기록도, 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네덜란드팀에 5-0으로 참패한 것도 아닙니다. 98프랑스월드컵 도중 차범근 감독의 경질입니다. 2패를 거뒀다고 월드컵 경기가 한 게임 남아 있는 대회도중 감독을 갈아치울 수 있는 나라의 집단적 몰상식입니다. 국민들의 빗발치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월드컵 대회도중 새벽 출국해 죄인처럼 입국해야 했던 차범근 감독의 쓸쓸한 표정에서, 한국 축구의 현주소를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