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언니들과 복날맞이 만남을 가졌다.
치과 예약이 있어서 식사에는 참석을 못하고
뒤풀이 자리인 커피샵으로 나갔다.
왁자지껄 지난 얘기도 나누고
나이 먹은 어른으로 우리가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누구네 집 누가 치매를 앓는 이야기가 남의 얘기가 아님을 가벼운 마음으로 나눴다.
친구들과의 사소한 만남이 참 좋다.
누구도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듣고 웃어주는 것이다.
라파엘이 개학을 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건 엄마의 본성이다.
이제 대학원 2학년을 보내고 있는 라파엘.
부학생장을 맡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보이던데
본당 여름캠프를 하느라 집에 없기론 방학 아닌 날과 다름이 없다.
도리어 집에 짐을 부리니 신학생 엄마로 더 예민해졌다.
아들인 듯 아들아닌 아들 같은 라파엘신학생.
밤 늦도록 완전한 캠프가 되기를 기도하는 9일기도를 연달아 봉헌하고
아이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춤 연습을 하고 12시가 다 되어 귀가를 했다.
그나마 라파엘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차로 마중을 나갔다.
간혹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다 보면 신학생의 성장이 뿌듯하기도 하고
괜한 노파심에 몇 마디 거들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생이 귀담아 들을 리가 없을 것이다.
신학생들을 독립적이고 혼자만의 삶을 살아갈 연습중인지
사제가 된 때 가장 큰 자질인 식별하기가 날이 서서
엄마의 말하는 습관이나 어렸을 때 느꼈던 나의 교만을 콕 집어 지적 당하기 일쑤다.
행여 늦은 귀가에
" 왜 이렇게 늦어?
늦을 거면 얘길 해 줘야지."
이런 말일랑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는 것도 습관일테니까.
나는 엄마지만 엄마가 아닌 모호한 지위를 가졌다.
"자매님의 아들은 이제 교회의 아들입니다. "
하고 굳이 그 말을 해주러 교수님께서 가정방문을 하시기까지 했으니까.
교회의 커리큘럼에 맡기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문득 신학생이 나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지적할 때 깨달았다.
식별이 필요할 때와 온유함과 긍정으로 어리석음을 덮어주는 때를.
친구들이 가벼운 수다를 떨 때는 무조건적인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학문을 하거나 무언가를 분별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전적으로 공감해 줄 일이다.
그래서 위로가 되고 사랑을 느끼고 그리고 그의 언덕이 되어줄 일이다.
이번 여름 신학생 아들을 신뢰하고 지켜 보며
기다리지 않는 엄마가 되었음을 느꼈다.
입학을 시키며
"저처럼 작은 사람도 신부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아직 시간이 8년이나 남았으니 그때까진 가능하겠죠?
같이 자라면 되니까."
했었는데 6학년인 지금
아들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절제하는 걸 체험하며
이번 겨울 부제품을 받을 때엔 엄마로 조금 성숙해졌구나 스스로 안도감이 들었다.
자식을 키우며 나도 쑥쑥 자라나 보다.
근데 세속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아들이었다면
이미 독립해서 자식에게 세상 사는 법을 가르칠 나이 아니던가!
걱정일랑 다 내려놓고 믿음으로 바라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