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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명의 밥이니
요한복음 6:24-3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1주일이다. 무더위에 어찌 지내시는가? 열흘 동안 계속되는 열대야에, 게다가 한밤중까지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느라 짧은 여름밤이 더욱 짧아졌을 것이다.
파리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우리 선수들이 참 잘한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검이면 검, 활이면 활, 총이면 총이다. 동이(東夷)족, 백의민족답다. 한국 양궁은 참 놀랍다. 외국인의 평가가 재미있다. “전 세계에서 한국에 도전하는 행사”라고 했다. 또 “4년마다 여러 나라가 모여 어울리며 화살을 쏘고 한국인에게 금메달을 준다”고 적었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한국의 밥이 되었다”고 하였다. 아무쪼록 대한민국 선수들이 모두 당당한 모습으로 계속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길 바란다.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시절이다. 우리 속담에 “중복에는 입술에 붙은 밥풀도 무겁다”는 말도 있다. 무더위에 건강을 상하기 십상이다. 무더위를 이기는 처방 중 하나는 잘 먹는 것이다.
지난 주간에 미국에서 온 친구와 광화문 4거리에서 만났다. 중복 다음 날이었다. 내가 미리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가서 친구더러 선택하라고 했다. ‘고려삼계탕, 명동칼국수집 콩국수, 경복궁역 분식집 소담 그리고 적선시장 거리표 음식’이었다. 무엇을 먹었을까?
역시 사람을 대접하는 일은 만족스럽게 잘 먹는 일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무얼 먹었느냐에 따라 사람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1)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음식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마치 밥과 빵과 같은 음식처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 주신 분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양식이 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밥과 빵이 되신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랑 때문이다. 십자가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에 주리고 목마른 우리에게 아낌없이 당신을 내어 주신다.
과연 나는 매끼 좋아하는 음식을 찾듯이, 영원한 양식이 되신 예수님을 찾고 있는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진리에 대한 굶주림으로,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찾고 있는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행동에서 나타난 특징은 별별 사람들과 어울려 잘 드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전에 세례 요한이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할 때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귀신이 들렸다”(마 11:18)고 비난하더니, 이제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잔치를 벌이니 잘 먹어서 탈이라고 비난한다.
본문은 오병이어 기적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5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이로 여겼다.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초능력자로 여겼을 것이다. 그 능력을 앞장세워서 자신들의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그 목적에 끌어들이려는 욕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가져다준 배부름에 흥분하였지만, 그 기적이 보여주려는 진실한 표적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여기 ‘표적을 본 까닭이라’에서 표적은 무슨 뜻일까? 표적은 감추어진 진실을 의미한다. 헬라어 표적인 ‘세메이온’은 영어로 심벌(Symbol)이 되었다. 광야의 무리는 기적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표적을 보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표적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뜻한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단지 기적을 행하는 존재를 넘어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세주이심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삶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였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27).
먹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일용할 양식에 꼭 필요한 밥이나 빵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다. 사람들은 먹을 것 속에서 창조주의 신비를 찾았다. 고대 근동에서는 빵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였다. “빵을 자르는 것은 죽은 자의 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문화학자인 진 쿠퍼는 “빵은 단일한 물질의 수많은 곡식 알갱이들의 결합의 상징이며, 이것을 다시 나누어 먹음으로서 하나의 생명의 나누는 것이다”라며 의미를 붙였다.
오늘 현대인들은 누구나 매일 먹지만 단지 배고픔을 면하려는 물질적인 것일 뿐,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것일 뿐, 여기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점점 더 다양한 것,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고급스러운 것을 찾게 되었다.
독일에서 살던 초창기에 독일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성찬식 찬송을 부르며 조금 의아해한 적이 있다. 이런 가사 때문이다. “당신은 우리 안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십니다”(Den Hunger und den Durst in uns, Kannst du. o Gott).
처음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런 부자 나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였다. 지금부터 30년 전이니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먹고사는 일에 힘이 부쳤고, 독일은 부자나라이고, 넉넉한 부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내 힘으로 배불리 먹고 마신다고 생각하는 독일 사람들이 성찬식의 한 조각 빵과 한 모금 포도주에서 과연 영혼의 허기를 채울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사실 모든 음식은 겨우 한 끼용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두 끼를 한꺼번에 먹을 수는 없다. 배고픔은 굶어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의 배고픔이나 목마름만이 아니라 누구나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다만 무시하고, 외면한 채 살 뿐이다.
성가곡 모음에서 세자르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파니스 안젤리쿠스)은 가장 사랑받는 곡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원제목 ‘파니스 안젤리쿠스’는 ‘천사의 빵’이란 뜻이다. 천사의 빵은 누구나 갈구하는 것이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나, 지금 배부른 사람들도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천사의 음식은 얼마나 소중한가? 영혼의 굶주림과 목마름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다(마 5:6).
2)
예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계속 물었다. 아니 오병이어 기적은 놀라운 기적이지만, 그 기적 속에 표적이 담겨 있다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30).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조상들이 출애굽의 광야에서 경험한 만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출애굽의 험한 여정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날마다 양식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이른바 해방의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광야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당장 애굽을 탈출하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에서 무엇을 먹을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였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새벽마다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듯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것’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매일 아침 그날 어치의 만나를 거두어 하루 세끼 양식으로 삼았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을 광야의 거친 만나로 살았다. 물론 이 맛없는 만나,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음식에 질린 백성들은 종종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은 출애굽 시대의 만나와 예수님이 주실 영원한 생명의 밥을 비교한다.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썩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다.
만나는 매일 먹어야 하는 일용한 양식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양식이다.
만나는 광야 40년간 내리고 가나안에서는 중단되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
출애굽 백성들이 경험한 광야의 만나는 지금 예수님이 오셔서 현실이 된 생명의 밥에 대한 예고편과 같은 것이었다. 그 좋은 보기가 오병이어의 기적 그 안에 담겨 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영락없이 성찬식 순서이다. 게다가 때는 유월절 시즌이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막 6:41).
광야에서 행하신 기적은 떡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축사)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신 유월절 성만찬(막 14:22) 제정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바로 광야의 성찬식이었다.
3)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3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참 생명의 양식을 주신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처럼 예수님은 참 생명,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물질적이거나, 기적 따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참 해방과 구원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초청장인 것이다.
생명의 양식이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그러한 새로운 관계에는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출애굽 한 백성처럼 인생의 광야를 걷고 있다. 얼마나 고달픈가? 사람은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 우리 중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얼마나 무거운 인생의 짐인가?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기도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그리고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마음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생명의 양식’).
우리는 누구나 하늘의 만나를 소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생명의 밥이다’라는 의미는 주님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광야에서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시는 양식이심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심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하루 세끼 만나를 먹듯, 나날의 모든 순간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명기는 이 모든 것의 결론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보라! 인간은 결코 스스로 영생을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늘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구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몸소 생명의 밥, 생명의 빵이 되신 분이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우리가 식사 때 부르는 노래 중에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가 있다. 그 노랫말 속에는 우리가 나누어 먹는 음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가 생명의 밥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일용한 양식뿐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얻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맛집, 먹방 만이 아니라 천사의 빵, ‘소울 푸드’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 천사의 양식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신다. 그 양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내 삶에 항상 생명의 양식으로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