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 李範晋(1852~1911)】「러시아에서 국권의 회복과 항일의 의지를 공표하며 자결」
「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1852년 10월 15일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말 고종대의 관료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字)는 성삼(聖三)이고, 필명은 고애자(孤哀子)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李璵)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광평대군파는 전주 이씨 가문 내에서 한말까지 명망가를 다수 배출하였다. 순조·헌종·철종 대에 우의정을 지낸 이지연(李止淵),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기연(李紀淵) 등을 비롯한 다수의 고위 관료들을 배출했던 벌열 가문이었다.
부친은 철종대부터 고종대에 거쳐 무신으로 출세했던 이경하(李景夏)로서, 군사 분야 경외직(京外職)을 역임한 관료였다. 그는 풍양 조씨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이기종(李璣鍾)이며, 둘째 아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했던 이위종(李瑋鍾)이다.
1877년 12월 27일 고종의 서장자인 완화군 선(墡)의 관례를 기념하여 거행한 감제시(柑製試)에서 시문으로 급제하여 직부전시로 대과에 합격하였다. 승정원 가주서를 시작으로 지평, 장령 등의 요직을 거치며 관료 생활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명성왕후의 피신을 직접 도와 왕실과 친밀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신정변이 진압된 직후에 고종은 개화파의 체포령과 동시에 내각개편을 단행하는데 이때 특지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면서부터 고종의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1884년 12월에 규장각직각의 천망단자에 직접 이름을 기재하여 낙점되도록 하였다.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이 근무할 것을 권면했고, 내전 별입시(內殿別入侍)에 임명되어 수시로 중궁전을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후 순천부사, 이조참판(吏曹參判), 좌부승지, 궁내부(宮內府) 협판 등의 내외직을 거치면서 실무를 익힌 뒤 고종의 측근에서 활동하였다. 고종의 측근인 궁내부 관료로서 활동하다가 미국과 유럽 주재 공사를 거쳐 한국 최초로 러시아 주재 공사에 임명되었다. 러시아에서 고종의 대리자로서 러시아 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통한 국권 회복 운동을 추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친러파였던 안경수(安駉壽) 등과 정부의 친일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군에게 훈련을 받은 훈련대를 해산하는 등 친일파 일소에 치중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시기에는 개국기원절 행사의 사무부총재를 담당하면서 개혁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특히 1895년 일제가 모의한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은 적극적인 반일 노선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일제의 억압에서 고종을 탈출시키기 위해 경복궁의 춘생문(春生門)을 공격하였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어서 1896년 2월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으로부터 경운궁(慶運宮)에 러시아 군인을 호위 병력으로 시위하게 한 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거행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법부대신 겸 경무사(警務使)의 직임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담당하였다.
이후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면서 내무협판(內務協辦), 법무대신, 농상공부 대신, 경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6월 20일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같은 해 7월 16일 프랑스 군함 베이아르Bayard호를 타고 청나라 지부(芝罘)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서 청국 선박인 연승호(連陞號)로 갈아타고 상하이(上海)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 뒤 9월 9일 워싱턴에 도착하여 공사에 정식 부임하였다. 이후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프랑스·오스트리아까지 3개국 주재공사를 겸임하였다. 3년 이상을 미국에서 체류하고, 1900년에 런던을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하여 유럽에서의 공사 직임을 수행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외교 업무를 수행 하였다. 외교 업무를 수행하면서 양국 황제가 서신을 교환하게 하는 등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종식과 함께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외교적 지위도 상실되었다. 일제는 1904년부터 러시아 수도에서 철수하도록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제의 통치기구였던 통감부의 압력과 외교적 강압에도 불구하고 독일 베를린 신문에 일제가 한국의 독립을 폭력적으로 강탈하고자 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저항하고 있다는 인터뷰를 게재할 정도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관으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906년 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한제국 공사관이 공식적으로 철폐되어 주러공사직을 박탈당하여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고종의 밀명으로 러시아에 체류하며 정치적 망명 상태로 한국의 독립과 항일을 위한 외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러시아 정부의 연금으로 살아가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서 의병 활동과 계몽운동에 주목하였다. 한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던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운동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족신문 발행과 학교 설립 등 계몽 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안중근(安重根)과 민긍호(閔肯鎬)의 부인들처럼 연해주에 머물면서 생활고를 겪고 있던 항일 투사의 가족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09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에 대해 러시아 신문에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이토 때문에 한국이 일제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인민이 노예의 상태가 되었다고 공박하였다.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권의 회복과 항일의 의지를 공표하며 자결하였다. 자결은 일시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의 치밀한 구상을 세워서 진행한 것이다. 자결을 선택하기 3개월 전에 유서를 준비하였으며, 재산을 나누어 보내는 치밀한 행보를 보였다. 유서는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고종, 서울에 거주하던 장남 이기종 앞으로 보내는 것 등 여러 통이 작성되었다. 유서는 대개 “나라의 멸망과 고종의 권력 상실에도 일제를 물리칠 방법은 없고, 국권회복의 방안도 없는 상태인지라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으니 양해를 구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지역 관원에게 장례비를 지불하도록 돈을 남겨서 자결로 국제적 문제를 야기하거나 자살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시행한 것을 보여 주었다. 사전에 장의회사에도 연락을 취하여 장례 절차와 비용을 확인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이항우(李恒雨)가 주필이었던 『신한민보』에는 한인에게 와신상담하며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자는 유서 내용이 실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첫댓글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_ 경술국치 이후 고종 황제에게 보낸 이범진의 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