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종교
1. 한얼교
1) 1965년 신정일이 창시한 단군 신흥 종교로 1978년 한얼교로 개칭
2) 신도수 : 2005년 현재 약 40만
3) 목적 : 한얼님 한분을 우러러 모시고 바름을 한얼님의 뜻으로 받들어 바름을 배우고 실천하며 바름의 결과인 행복을 성취함
4) 내용 : 단군 바른님을 고조로 받듬과 동시에 다른 종교의 성자들을 모두 바른님의 경계로서 받드는 민족주체 신앙의 원리와 통합종교적인 기반위에서 현실과 진리를 조화하는 현대적인 신앙운동
5) 강화 마니산 참성단 천제봉행(天際奉行)과 성지순례 행사 : 한얼교는 1970년 10월 3일부터 매년 강화 마니산 참성단에서 천제를 봉행하고 전국 각지로부터 교인들이 성지순례 행사를 지금까지 성대히 거행
6) 대구, 서울, 강화도 마니산, 부산에 온얼궁
2. 유교
1) 유교의 강화 전래 : 강화 향교의 역사와 동일
2) 고려 시대
- 고려 인종 연미정에서 구재생도들을 모아 가르침
- 고려 인종(1127년) : 고려산 남쪽 기슭(지금의 고천리)에 최초의 향교
- 고려 고종의 천도 후 : 흑동(먹절)으로 옮겼다가 몽고병의 침입 때에 볼음도로 이전
- 충선왕 때 : 안유의 문하생인 이연송이 강화에서 유교 경전과 문집들을 판각하여 발행
3) 조선 시대
- 강화유교는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하며 시작된 조선조에 이르러 크게 발전
- 역대 유수들은 강화와 교동의 향교를 수축․증축하는데 정성을 다함
- 강화에는 정치계로 진출한 것보다 향리에서 후학을 기르며 학문에만 전념하는 형태의 선비들이 많았음(조선 중기 이후 강화가 정치투쟁에서 패하거나 희생된 유생들의 유배처 내지는 은둔지가 되었던 상황과 연관)
- 인조(1624년)에 지금의 강화 중고등학교 근처로 이전
- 현종(1673년)에 강화 남문 근처로 이전 → 영조(1731년)때 지금의 강화여자중고등학교 자리로 이전
- 현재는 강화여중고등학교 뒤편에 있음
- 강화학파 : 이건승, 이건방, 정원하, 홍승헌 등이 이건창을 중심으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후세에 강화학파로 불리게 되는 강화 유학의 새로운 전통 형성 - 중국의 양명학과 조선 후기 실학을 계승
4) 현황
- 강화향교 : 오성위(공자, 맹자, 증자, 자사, 안자)와 18유현 배향, 신도수는 70명
- 교동향교 :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와 그 제자의 화상을 원나라로부터 가져다가 봉안, 신도수는 110명
3. 불교
1) 강화도에 전파된 최초의 종교 - 삼국시대
2) 강화군 소재의 사찰은 기록상 56개가 있었음
3) 현재 27개의 절과 암자가 있음(조계종16, 정토종7, 태고종2, 원효종1, 자비종1)
4) 팔만대장경의 판각작업이 전등사를 비롯한 강화 안에 있던 모든 절에서 추진
5) 신도수는 2004년 현재 12,377명으로 전체 종교인구의 31.6%를 차지함
6) 대표적 사찰 : 전등사(길상면 정족산-강화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보문사(삼산면 낙가산), 정수사(길상면 사기리), 적석사(내가면 고천리), 청련사(강화읍 국화리), 황련사(선원면 선행리), 백련사(하점면 부근리), 화개사(교동면 읍내리)
4. 천주교
1) 강화의 천주교 전래
- 강화 본당 설립은 1958년 1월 29일 장금주(요한)신부의 부임으로 시작되나 그 뿌리는 신유사옥(1801년)까지 거슬러 올라감. 영조의 손자이고 철종의 조부였던 은언군은 강화 유배당시 그의 처 송마리아와 며느리 신마리아가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신씨, 송씨는 1801년 3월 16일에 은언군은 5월 29일에 배소에서 처형됨으로서 강화군에 처음으로 내린 순교의 뿌리가 되었다.
2) 분포 현황
강화 성당을 중심으로 하여 군내에 12개 공소가 있으며, 서부지역으로 장정리, 창후리, 내가, 삼산, 교동 공소가 있고 남부지역으로 냉정리, 고능리, 오두리, 온수리, 초지리, 상방리, 흥왕리 공소가 있다.
3) 천주교의 사업
- 의료사업 : 그리스도 왕 의원, 그리스도 사랑의 집
- 농어촌 복지사업 : 그리스도 왕 농장경영, 신용조합의 운영
4) 현황
- 2004년 현재 신도수는 1,285명으로 전체 종교인구의 3.29% 차지
5. 강화 성공회
1) 강화 성공회의 연혁
-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 코프(John corfe:고요한)는 1890년 선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한강하구에 위치한 강화도에 아직 교회가 전파되지 않은 것을 탐지하고 1893 년 7월 워너(L.O.Warner:왕난도) 신부를 파송하여 선교를 시작(강화가 한국의 아이오나(Iona)가 될 것을 기대-한국 선교의 전초기지)
- 강화도에서 외국인은 일체 성내를 출입하지 못하게 금하였으므로 갑곶이 진해루 밖에 있던 나루터 근방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기도소와 처소를 정하였다. 1894년 1월20일에 고요한 주교가 이곳을 성니콜라회당으로 축복하였다. 왕신부는 나루터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한 결과 이곳을 자주 왕래하던 김희준을 열성으로 전도하여 최초의 성인신자를 얻게 되었다.
- 왕 신부 후임 선교사로 트롤로프(Mark. N. Trollope:조마가)가 임명되었으며, 김희준이라는 사람이 1897년 11월 7일 인천 성미가엘 성당에서 조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에 강화출신 김군명도 영세를 받았다. 이것이 성공회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처음 있는 성인 영세이다.
- 1900년 강화성공회 성당 건축(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회 건물-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교회건물)
2) 성공회의 활동
- 교육사업 : 읍내 선교본부 옆에 성바우로 학교 설립(강화지역 최초의 서구식 학교)
- 의료사업 : 강화읍과 온수리에 진료소 설치
- 수녀회 여성선교 활동 : 선교본부 옆에 수녀원을 설치하고 여자어린이를 위한 주일학교를 개설하는 한편 부녀자들의 교리공부도 지도
- 새로운 문화의 전파 : 축구, 야구등의 구기 운동과 인쇄기 도입으로 인쇄기술과 사진기술의 전파
3) 강화 수도원 창설과 김희준 신부서품
- 강화읍내 구 선교본부 자리에 강화수도원 창설(초대원장에 허세실 신부)
- 1914년 서울 장림성당에서 조마가 주교가 강화출신 김희준, 구건조 두사람에게 부제 성직을 서품 → 1915년 김희준 부제에게 사제신품 서품
4) 한국관구 독립과 김성수 주교 관구장 승임
- 한국 성공회는 1993년 칸터베리 대주교로부터 관할권이 인수되어 한국관구로 독립됨
- 초대 관구장에는 김성수 대주교가 승임(길상면 온수리 출신)
5) 성공회 전도구
- 강화읍 전도구, 온수리 전도구, 내리 전도구, 장화리 전도구, 삼흥리 전도구
6) 현황
- 2004년 현재 신도수는 843명으로 전체 종교인구의 2.16% 차지
6. 개신교
1) 한국의 개신교 전래
- 기독교의 전래는 1832년 순조 때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귀츨라프(K.F.A.Gutzlaff) 선교사가 서해안 일대를 돌아보고 신교 전파를 계획한 것이 그 시초
2) 강화의 개신교 전래
- 한국 개신교회의 모 교회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 이루어짐 : 내리교회 제2대 담임자인 존스(G.H.Jones:조원시) 선교사가 1893년 봄 교산리 앞바다 선상에서 이승환의 모친에게 세례를 내림
- 본격적으로 강화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893년 가을 강화사람 이승환의 자택에서 교인 4~5인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리기 시작
- 1894년 현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교항부락에 교항교회(현 교산교회)가 강화 최초의 교회로 설립→ 1896년 현 송해면 상도리에 홍의교회(동북부지역 선교의 거점)를 설립 → 1897년 내가면에 고부교회(중서부지역 선교의 거점) →1899년 교동교회(서부 섬지역의 선교거점) → 1900년 9월1일 강화읍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강화 선교의 구심점), 1900년 망월교회(하점면)가 설립
- 교산교회는 강화 감리교의 모교회로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 역할(① 동쪽으로 흘러 홍의를 거쳐 강화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연결, ② 남쪽으로 흘러 고부를 거쳐 강화중서부로 내려가는 것, ③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교동으로 연결되는 것)
3) 강화 개신교 선교의 특징
- 선교사에 의해 선교된 것이 아니라 본토성도인 이승환, 김상임 들에 의해 수행
4) 분포 현황
- 전체 교회수 : 165
- 감리교 (119, 87.18%), 장로교 (29, 9.7%), 성결교 (7, 1.11%), 순복음(6, 1.22%), 침례교 (4,
0.76%),
7. 기타
통일교, 원불교, 일련정종불교회(불교종파의 하나로 일본에서 들어온 종교-일정한 교회당이 없이 신도의 집을 전전하면서 포교)
cf) 한국의 선교지역 분할
1) 선교지역 분할 협정은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짐
2) 선교분할 협정의 주요 골자
① 일반원칙으로 작은 도시나 그 주변 지방을 공동 점유하는 것이 우리 능력을 효율성 있게 활용함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인구 5천명이 넘는 개항장이나 도시는 공동 점유하도록 개방해야 할 것이다.
② 5천명 미만되는 도시에서 지방을 관장하는 한 선교사에 의해 준 선교기지(선교사가 상주하지는 않지만 매주일 정기집회가 열리고 있으며 1년에 적어도 4차 방문을 해야하는데 그중에 적어도 2차는 선교사가 직접 방문해야 하는 구역)가 설정되어 있을 경우엔 점유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사업이 6개월간 중단된 경우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③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하려는 선교회들에게는 아직 점유되지 않은 지역에서 착수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여 모든 지역에서 선교사업이 진행되도록 추구한다.
④ 각 교회 교인들은 교파 소속을 옮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어느 한 교회의 교인이거나 원입인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은 다른 교회로 옮길 때 먼저 교회 담임자로부터 추천장을 받지 않고는 옮길 수 없다.
⑤ 서로 다른 교회들의 규칙을 상호 존중한다.
⑥ 조사(助事), 학생, 교사 및 보조인 등은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의 문서화된 요청이 없이는 다른 선교회로부터 어떠한 형태로든 지원을 받을 수 없다
⑦ 일반원칙으로 문서들은 판매해야지 거저 주어서는 안되며 가격에 있어서도 통일성을 기해야 한다.
3) 1893년 ~ 1909년 까지 종파별로 협정이 이루어져 1909년 한반도에 대한 선교구역이 확정
4) 각 선교회 별 담당 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