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드는 사람, 물들지 않는 사람, 물들이는 사람
1. 물드는 사람은
배를 타고 바다에 놀러 나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물에 빠져서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은 했지만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괴로워하고
직장에 나가서는 직장동료와 늘 부딪히고
집에 오면 아내나 남편, 자식들과 갈등이 생겨
화내고 미워하는 것이 마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습니다.
2. 경계를 피하여 경계에 물들지 않는 사람은
거대한 방파제로 파도를 막고
그 안에서 안온하게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워 몸부림치다가 가만히 자기 마음을 관찰하니
아주 사소한 일로 늘 남편이나 아내와 다투고
자식과 다투고 부모와 부딪힙니다.
직장에서도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혈혈단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제 사람이나 일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파제를 쌓아놓고
그 안의 고요한 바다에서 노 저으며 노니는 것과 같습니다.
방파제 안의 작은 호수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경계를 멀리해서 경계에 물들지 않는 사람은
나쁜 것을 경계하여 멀리 함으로써 물들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출가한 스님입니다.
나쁜 것과 담을 쌓아 관계를 피하는 것이지요.
물들만 한 것은 모두 피해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청정하다, 깨끗하다, 고고하다, 고상하다'라고 합니다.
나쁜 것에 물이 든 사람은
물들지 않는 사람을 아주 존경합니다.
그래서 신비화시키고 존경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물드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갇혀 있고
물들지 않는 사람은 경계나 상황을 피하려는 생각에 갇혀있습니다.
물드는 사람은 자신의 집에 갇혀있고
물들지 않는 사람은
집을 떠나와 산속에 있지만 다시 산속에 갇혀있습니다.
3. 경계 속에 있으면서 물들지 않는 사람은
큰 배를 만들고 노 젓는 기술, 돛 다는 기술을 익혀
바람과 파도를 잘 이용해서 배를 탑니다.
배를 타고 저 넓은 바다를 마음껏 다니는 사람입니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이용해서 배를 타고,
파도가 치면 파도를 이용해서 써핑을 하듯이
그 파도 위에서 곡예를 즐기며 달립니다.
어떤 경계에 부딪혀도 그 경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자유다, 이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는 아닙니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
방파제를 쳐놓고 그 안에서 노는 사람
큰 배를 타고 바람과 파도를 즐기며 자유로이 노니는 사람
이 모두가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행복은 바다에 빠지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 대는 사람은 죽을 지경에 있고,
방파제를 쳐놓고 그 안에서 노는 사람은 빠지지는 않았지만 갇혀 있고,
큰 배를 타고 바다를 노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다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경계 속에 있으면서 경계에 물들지 않는 사람은
상황을 피해서 물들지 않는 게 아니라
상황 안에 있으면서도 그 상황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내는 사람들과 세상살이를 같이 하면서도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술 마시는 사람, 담배 피는 사람과 같이 어울려 있으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경계에도 걸리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
그 어떤 상황에도 물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대승보살입니다.
적어도 이 단계에 이르러야 자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것이 참 행복, 참 자유는 아닙니다.
4. 경계를 물들이는 사람은
'바다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즉, 바다에 빠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다에 빠지게 되면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주워옵니다.
해녀처럼 일부러 바다 속으로 들어간 사람과 같습니다.
물에 빠지면 빠진 게 좋고
물에 빠지지 않으면 빠지지 않은 대로 좋은 것입니다.
빠지든 빠지지 않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물에 빠졌다고 해서 특별히 불행하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경계를 물들이는 사람은
물들까봐 겁내지 않으며 오히려 함께 살면서 세상을 물들여 버립니다.
술꾼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셨으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술꾼이 술을 마시지 않게 합니다.
욕쟁이와 같이 서로 욕하면서 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욕쟁이가 욕을 안 하게 합니다.
나쁜 짓하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을 다 바꾸어 놓아 버립니다.
더러운 사람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상대방의 때를 닦아 내줍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법계에 견주면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입니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