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판매
7.16
제주도에는 초당옥수수가 대부분이다.
당도가 무척 높아 단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인기가 있지만,
식감이 부족하여 찰진 옥수수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여주에 있을 때 심었던 종자를 여주에 있는 대자에게 부탁하여
한 봉지를 받아서 경작한 옥수수인데
많은 교우분들이 좋아하셨다.
잎마늘 심는 날
2023. 8.4
오늘 일년 농사 중 가장 중요한
풀마농(잎마늘)을 심었습니다.
금년에는 2개월 전에 손목 골절상을 당해서
한 손을 쓸 수 없어 더욱 힘든 날 이었습니다.
옥수수 밭에는 풀이 무성하고 옥수수대도 그대로 있어
1주일 전 일꾼 2명을 사서 밭 정리작업을 했습니다.
마늘 종자를 밭으로 옮기는 것도 조그만 통에 담아
수십 번을 날랐습니다.
태풍 카눈이 올라온다는 소식과 불볕 더위 속에서도
다행히 간간히 바람이 불어 4시경 끝냈습니다.
저에게 풀마농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겨울철 3개월 동안(12월~2월)은 창고에 혼자 앉아서
휴대폰으로 신부님들 강론도 듣고
조용히 제 삶을 돌아보기도 하며
피정하는 마음으로 잎마늘 작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장 큰 수입원입니다.
수입액은 다른 분들의 10분의 일도 안되지만
텃밭에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은
잎마늘 농사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일 경매를 하고 통장에 들어오는 금액을
확인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잎마늘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종자마늘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심고, 키우고
다듬어서 출하작업까지 힘든 일이지만,
저에게는 즐거운 직장이며 친구입니다.
앞에 보이는 것은 땅콩
양 옆에 무성하게 숲처럼 보이는 것은 들깨
제주도는 참깨는 많이 심지만 들깨는 심지 않습니다.
나물 무칠 때나 요리할 때 우리는 들기름을 더 좋아하기에
마늘밭을 줄여서 들깨를 심었지요.
태풍이 몰아치면 가지를 모두 날려버려 절단이 나지만
수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샤워하고 쉬고 있는데
게스트를 운영하고 계신 이웃에서 저녁을 함께 하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집은 세를 주고 1주일 후 서울로 이사를 가신다고 했습니다.
사연인 즉 아버지께서 얼마 전 돌아가셔서(1달 전 서울로 모셔감)
어머니 혼자 계시기에 여러 어려움이 있어서 라고 했습니다.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위로도 드리고 아쉬움을 나누기 위해
3가족이 모여 그 동안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2년 계약이기에 그 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2년전 쓴 글을 읽어 봅니다.
좋은 이웃 송계아(宋季雅) 이야기
2021.4
저의 집 주위에 게스트 하우스 운영하시는 노부부
남편은 월남하신 분으로 90세이며
전주출신의 현재 부인과 결혼하여 해로하고 계십니다.
제가 농사지은 것 가져다 드리면
음식솜씨 좋으신 할머니께서 반찬을 만들어 갖고 오시고
자식들이 다녀간 후엔 과일, 고기등도 갖고 오십니다.
저희도 마찬가지로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나눕니다.
특히 좋은 안주거리가 있으면
함께 모여 인생이야기를 곁들이며 술잔을 기울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족이 동참합니다.
해외에 사업체를 갖고 있다 최근에 접고
밭농사와 친척 야채배달 일을 도와주고 있는 제주 토박이 부부.
이 분들도 좋은 먹거리재료나 먹거리가 생기면
연락하여 서로 나눕니다.
이렇게 세 가족은 주로 먹거리를 주고 받으며
가끔은 함께 모여 인생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어렸을 때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이웃에 마실가서 막걸리 한 잔 주고받던
부모님과 이웃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사(史)에 보면
송계아(宋季雅)라는 고위 관리가 정년퇴직을 대비하여
자신의 노후에 살 집을 보러 다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천백만금을 주고
여승진(呂僧珍)이란 사람의 이웃집을 사서 이사하였죠.
백만금 밖에 안되는 그 집값을
천백만금이나 주고 샀다는 말에
여승진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송계아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백만매택(百萬買宅)이요,
천만매린(千萬買隣)'이라.
백만금은 집값으로 지불하였고
천만금은 당신과 이웃이 되기 위한
프리미엄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백만금으로 집값을 주고,
천만금을 주고 좋은 이웃 프리미엄으로
지불하였다는 송계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이웃에대해 생각해봅니다.
신앙의 멘토 / 도밍고 형제님을 생각하며
나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성소가 두 번 있었다.
장모님과 조 도밍고 형제다.
부산에서 근무할 때, 아내와 사귀다가
결혼 승락을 받으러 처가집에 갔을 때다.
장모님께서 사위감으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가장 신뢰하는 당신 딸의 선택이라
무조건 반대할 수 만은 없어서 조건을 걸으셨다.
그 조건은 내가 영세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로 나를 믿고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부산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는데,
외지인(서울)이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성장했는지, 집안은 어떤지 등.
아마도 장모님 주변에 맘에 둔 사윗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말을 듣자 곧바로 아내와 함께 가서,
내가 세들어 살던 동네인 서대신동 성당 교리반에 등록했다.
6개월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그녀와 함께 성당에 갔다.
교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생맥주 한 잔하면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 것이다.
바로 내 신앙의 은인은 의도야 어쨌든 장모님인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긴 했지만, 튼튼하게 자라지를 못했다.
회사생활을 핑계로 겨우 주일만 지키는,
그것도 가끔씩 주일을 지키지 못했고
고해성사 보는 것이 싫어 점점 신앙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영세받고 아직 신앙의 어린애로 있을 즈음인
1988년 형 친구분을 대부로 모시고
드디어 견진성사를 받고 성인이 되었다.
8년이 걸린 것이다.
그후에도 변한 것이 없이 또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영세 후 18년 만에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나의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던 직장에서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었다.
1년 정도 영.육간에 고통을 겪는 광야생활을 거친 후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 서원했던 일,
즉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즈음.
조 도밍고 형제를 만났다.
새벽미사를 몇 번 나갔는데 형제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함께 레지오 활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난 그 때까지 레지오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거절했다.
직장생활이 바쁘고, 현재 미사해설을 하고 있으니 천천히 하겠다고.
하지만 그 형제는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다가와 권유하였다.
6개월 간 끈질긴 권유에 결국 굴복하고 레지오에 입단했다.
3개월의 예비단원을 거치자마자, 서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단원들이 나이가 많고 오랬동안 간부를 했으니
참신한 단원이 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 도밍고 단장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기를 하니 단원들의 활동사항 보고하는 것을
유심히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혼자서 기도하고 성경, 영성서적 등을 읽고 했지만
어떻게 선교를 하는지는 몰랐고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단장인 도밍고 형제가 너무 열심히 활동을 하니
단원들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경북 의성 산골에서 태어났고 자랐지만 어릴 때 부터 신앙심이 깊었다.
왕복 40리 길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미사참례를 했다고 했다.
지금은 수사 신부이신 사촌 형과 함께.
비 바람이 불거나, 눈보라가 쳐도 변함없이 성당에 갔는데
모든 고통은 신부님이 안아주시면서
칭찬하는 한 마디에 사라졌다고 했다.
결혼한 후 서울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재래시장 부근에서 쌀 장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
마트같은 큰 매장이 생기면서 점점 싸전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돈을 많이 벌어 놓은 것은 없지만,
부부가 겨우 먹고 살 정도는 되는데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항상 껄껄 웃으며 단골 고객에게서 주문이 오면
배달용 큰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다
얼마 전 오토바이로 교체했다.
그 형제는 늘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신앙심도 깊고 선교활동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앞에 나서는 일 없이 묵묵히 뒤에서 도와준다.
소위 장이라는 것을 맡지 않는다.
자신은 가방 끈이 짧다는 이유로.
1년이면 보통 10명 이상 입교를 시켜 영세를 시킨다.
우리는 1년에 1명만 영세를 시켜도 잘 했다고 하는데.
활동보고 시 들어보니, 쌀 장사하기도 바빠 선교할 시간이 별로 없지만
저녁 밥을 먹고 아파트 단지 놀이터 등을 산책한다고 한다.
벤치에 앉아계신 노인분들을 보면 옆에 앉아 대화를 하다가
슬쩍 신앙에 대해 말하고 초대한다고 한다.
나에게 접근했듯이 한 번 거절당해도
끊임없이 권유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린아이를 둔 젊은 부모들에게도 말을 건넨다고 한다.
아이를 핑계대며, 관심은 있지만
조금 더 있다가 성당에 나가겠다고 말하면
당신이 교리 받을 동안 아이를 돌보아 줄테니 입교하라고 권유한다.
쌀 장사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늘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도밍고 형제는 눈 만 뜨면
주님과 한 몸인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다.
신명기 6장 소위 쉐마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이를 이웃에 전파하는 것이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면서 감동을 주는 거다.
레지오 주회도 이런 저런 이유로
지각하거나 빠지는 단원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도밍고 형제는 지각 한 번 안한다.
언젠가 고향 부모님 팔순 잔치에 갔다 온 적이 있다.
주회시간에 맞게 고향에서 출발했는데,
도로가 밀려 고속버스 안에서 뛰었다고 했다.
주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정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신앙생활이 초라해 보이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내 신앙생활을 튼튼하게 자라게 하는데 있어
도밍고 형제는 나의 멘토인 것이다.
예수님 같이는 못하지만,
도밍고 형제처럼은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5년을 같이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나의 신앙도 많이 자랐다고 생각한다.
여주로 이사한 후에도 우리 집을 방문했었는데
4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도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실 분인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주님께서 알아서 데려가신 것이라 생각한다.
성 남종삼요한과 가족묘 성지 방문 때
조 도미니코 형제님의 묘소가 울대리 공원묘원에 있다는 것을
오늘 저녁 (2023.3.20) 길음동교우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찾아가 참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아쉽다.
묘소에 와서 혹시 여기에 계시면.. 하고 생각은 했지만
그분의 고향에 묻혔으리라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그분 고향 공소출신 사제 수녀도 많고, 친척중에도 많기에
매년 고향의 모임에 가시곤 했기 때문이다.
조 도미니코 형제는 경북 의성 쌍호공소 출신이다.
2022년 지금도 마을 전체에서 딱 한사람만 빼고 전부 신자이다.
유서 깊은 공소답게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위의 액자 사진 중에서 맨 앞)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14명)와 남녀 수도자(13명)를 배출한 공소로도 유명하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시기는 대략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서
박해를 피해 낙동강가의 외진 마을인 이곳에 주거한 신자
박수광(1770년∼1837년)의 7대손 박근하(요안, 재임기간:1915-1920)는
제4대 공소회장이다.
5~7대 공소회장이 조 도미니코 형제 선조들이다.
오늘(8월 8일) 도밍고 축일을 맞아
조 도밍고 형제님 생각이 나 회상해 본다.
늘 신앙생활이 나태해 지면
나의 광야생활인 갈릴래아와 도밍고 형제를 생각한다.
그러면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
저의 신앙의 멘토 도밍고 형제님 감사했습니다.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 누리고 계시겠지요!
저도 도밍고 형제님을 본받아 열심히 살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2023. 8 .8 도밍고 축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