曉吟(효음)
유혁연(柳赫然, 1616~1680)
매서운 눈보라는 새벽이 되니 더 거세어
병든 장군의 이불 속으로 한기가 파고드네
억지로 일어나 앉아 활시위를 튕기니
음산에서 한바탕 사냥하고픈 마음 간절해
獰風驅雪曉來深(영풍구설효래심)
寒透將軍病臥衾(한투장군병와금)
平明强起彈弓坐(평명강기탄궁좌)
惟有陰山大獵心(유유음산대엽심)
조선시대에 무신은 찬밥 신세였다. 유혁연은 무신이었고, 소수파인
남인(南人)에 속했다. 북벌론을 주장해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문
신 특히 서인으로부터 견제를받을 수밖에 없었다. 평안도 선천부사
시절 이 시를 지었다. ‘병든 장군’이란 표현에서 비록 벼슬은 하고
있으나 녹록지 않은 현실을 내비치고 있다. 결국 유혁연은 경심환국
(1680)때 윤휴와 함께 사역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영수로 한 서
인 노론(老論)이정쟁에서 이긴 것이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노론이
정권을 독차지하며 장기집권에 들어갔다. 이 시는 무인의 호방한 기
운이 잘 표현되었다. 유혁연은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시(詩)와 서(書)
에도 능통했다.
[작가소개]
유혁연[ 柳赫然 ]
출생-사망 : 1616 ~ 1680
직업 : 무신, 서화가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무신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회이(晦爾), 호는 야당(野塘; 野堂) · 필심재(筆心齋),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유혁연의 집안은 문화유씨(文化柳氏)에서 분파한 진주유씨(晋州柳氏)로, 전통적 무반(武班) 명문가이다. 조부는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유형(柳珩), 부친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진 유효걸(柳孝傑)이고, 외조부는 진무공신 1등으로 의충군(宜春君)에 봉해진 남이흥(南以興)이다.
1636년 병자호란에 부친 유효걸이 안주(安州)에서 전사하자 형 유호연(柳浩然)과 함께 출전했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어 청과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다. 여러 문무 말직을 거쳐 1644년 무과에 급제하여 덕산현감 · 선천부사를 역임했다. 1653년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이어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군병과 기계를 잘 정비한 공으로 효종으로부터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북벌(北伐)을 염두에 두고 군비확충과 국방에 전력하던 효종에게 발탁되어 이완(李浣)과 더불어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이어 수도방어의 핵심인 어영청의 대장직에 오르고, 공조판서 · 훈련대장 · 한성판윤 · 포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숙청될 때 경상도 영해(寧海)에 유배되었고, 이어 제주도 대정(大靜)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사사당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혁연은 전통적 무반 가문에서 성장했음에도 시부(詩賦)와 서화(書畵)에 능하였다. 유혁연의 예술적 자질은 신잠(申潛) ·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묵죽화가인 고조부 유진동(柳辰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묵죽도>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화면 구성에 필치마저 일률적이어서 다소 단조로운 느낌이 들지만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그의 묵죽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유혁연 집안의 묵죽화 전통은 종손 유덕장(柳德章)에게 계승되어 조선 후기 묵죽화풍의 양식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사 · 행정 분야 뿐 아니라 서화 분야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편지 글씨 초서는 김석주(金錫胄)와 대장 유혁연과 정승 조현명의 글씨가 모두 촉체1)로 비쩍 마르고 딱딱하고 굳세고 기이하여 한 시대에 으뜸이다. 김석주와 조정승은 다른 글씨를 잘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나, 유혁연은 해서를 잘 써서 지금 한성부의 옛 판문의 편액에 작은 글씨로 경조부(京兆府)라고 쓰여 있는 것이 바로 그의 글씨이다."라고 기술하여 유혁연이 송설체를 잘 썼음을 증언하였다. 또한 같은 책에서 "근세 무인(武人)으로서 시와 글씨에 능한 자는 유대장을 제일로 꼽는다."라고 하며 높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글씨 수는 매우 적으며,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근묵(槿墨)》에 실린 간찰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행서와 초서를 섞어 과감히 붓을 운용하여 힘있는 필치를 이룬 모습은 이익의 평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잘 말해준다.
시부(詩賦)에도 능하여 1666년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전하고 있고, 매화와 죽림사(竹林寺)에서의 감회,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토로한 오언절구 3수가 남아 있다. 1909년에 9세손 유석조(柳錫祚)가 여러 문집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수집하여 유고집 『용만록(龍灣錄)』을 간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혁연 [柳赫然]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