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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뤄 놓았던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강원감영을 찾았다. 김강이(시몬), 최해성(요한), 최비르짓다, 이 세분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받던 역사의 현장이다. 예전에도 한 번 와 본적이 있는 곳이지만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둘러보던 곳이다.
백색순교의 빌미라도 교감 받고 싶은 심정으로 오늘 다시 감영을 찾았다. 나는 예전에 임치백(요셉)성인과 최해성(요한)순교자의 고신(拷訊) 장면을 연출 했었다. 9년 전, 교구설정 40주년 기념 겸 순교자 현양대회 때 순교자 최해성(요한)님을 극화하고 연출한 후 이방으로 출연하여 배론성지에서 공연하였는데 연습에 전념하지 않고 무대에 올랐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감영으로들어가기 전 돌담을 찍었다. 조선의 감영과 현대의 번화한 거리가 접경을 이루는 신비스러운 곳이다. 역사와 시대가 공존하는 거리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포정루(浦政樓)다. 강원도 지역을 다스리던 감영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출입문루다. 믿음을 가졌던 분들이 쇠도리깨로 난타당하고 머리채를 잡히고 오라줄에 묶여 무지막지하게 끌려 들어가던 문루다.
나는 자유롭게 걸어 들어간다. 아무 이유도 아니다. 시대의 경계가 나를 자유롭게 했을 뿐이다. 저 시대에 내가 살았고 천주님을 알았다면 나도 모질게 끌려들어가는 그분들과 한 패였을 것이다.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곤장(棍杖)을 치는 틀이다. 다섯 가지 형(五刑:笞·杖·徒·流·死) 가운데 장형에 속하는 죄인을 다스리는 데 쓴 형구다. 중곤(重棍)·대곤(大棍)·중곤(中棍)·소곤(小棍)이 있고, 특별곤에는 치도곤(治盜棍)이 있었다. 버드나무로 만들었다. 도범(盜犯)에게 가하던 치도곤이 가장 큰 곤이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치도곤을 사용했을것 같다는 생각이다.
저 그림의 구멍에 얼굴을 들이밀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는가? 맞는 사람이 되려는가? 치는 장리가 되려는가.
포졸들이 포승줄을 들고 죄인을 잡으러 다닌다. 밤늦게 모였다가 새벽이면 흩어지는 무리들을 잡으러 다니는 지도 모른다. 나도 그들의 눈길을 피해야겠다. 아직 내 눈으로 봐야할 곳이 많다. 포졸들의 눈에 띄면 낭패다.
포정루로 이어진 돌 디딤 길을 돌아본다. 다시 저 길을 내 발로 걸어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세 분께서는 하셨을까?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 시대의 상식으로 감영 포청을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때는 시대가 다르다. 조선이 어떤 나라 였나? 정승, 판서끼리도, 당여(黨與)가 다른 무리끼리도, 당쟁에서 지면 서로 사약을 돌려 먹여 목숨 줄을 끊고 절해고도로 귀양을 보내던 시대다. 하물며, 천주쟁이는 대역죄인과 같은 급으로 취급하며 박해하던 시절이었다.
관찰사(觀察使)와 목사(牧使)들의 선정비다. 원주 내에도 이곳저곳 이런 선정비가 많이 세워져 있었다. 모을 수 있는 것만 모아 감영 마당에 세운 것이다.
이곳 선정비에 이름을 올려 칭송을 받는 분들은 어떤 선정과 공덕을 베푸신 분들일까? 내가 존경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다산 정약용, 같은 분들의 행적을 보면 선정비의 진실성은 충분하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좀처럼 (공덕비, 선정비)신뢰가 가지 않는 비석이다. 후임자가 전임자를 의식한 전관예우 차원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대물림 되는. 진정 순수 주민들의 자발적인 비 세움 이었을까? 양민들을 겁박하고 부추기여 스스로 세우다시피 한 비는 없었을까? 선정비가 깨져 있는 것은 자연 파손도 있지만 다른 연유도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는 감사나 목사가 강력한 사법권의 칼날도 휘두를 수 있는 때였으니 그 만큼 신중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보았으리라 애써 긍정의 생각을 가져 본다. 높으신 분들끼리 사약도 주고 밭던 시대였으니 실정(失政)을 경계 했으리라.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목민관이 시대마다 왜 없었으랴.
중삼문(中三門)이다.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은 이곳 중삼문(中三門)에서 재차 신원과 방문목적을 밝혀야 한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이라 하여 관동관찰사영문(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한 명칭까지도 가지고 있다. 점점 냉기가 돈다. 공권력의 중압감을 중인이하 양민, 천민들은 어찌 견뎌 내었을까?
나는 이제 내삼문(內三門)앞에 왔다. 마지막 신원 확인을 하는 곳이다. 이곳만 통과하면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으로 곧장 들어가는 문이다. 편액에는 징청문(澄淸門)이라 쓰여 있다. 뜻 그대로 맑고 맑은 마음과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이다.
관찰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관찰사를 만나러온 사람도 그런 마음으로 이 문을 통과하라는 뜻이다. 청탁, 뇌물, 음해, 무고, 이런 거 하지 말라는 말이다.
행각(行閣)건물 앞에는 옥에 갇혀있는 수인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자유를 잃은 몸들은 옥중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감옥에서는 먹는(음식)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밖에서 마음 놓고 먹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침을 흘린다. 듣는 사람도 지겹지 않다는 듯 듣고 또 들으며 공감한다.
음식은 생명이지만 생명 유지의 음식쯤은 제공되는 옥 안에서의 음식 상상은 또 다른 의미다. 음식이 자유를 갈망하는 의미로 작용 한다. 감옥에서의 음식은 자유를 상징 한다.
순교자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복돋워 주었다. 무엇으로? 천주님 말씀으로. 자나깨나 천주님만 생각 했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기도가 일상이었다. 사경을 해매는데 긴 기도문을 줄줄 외우며 기도할까? 아닐것이다. 깊은 구덩이에 생매장 당할 때에 했던 기도도 예수 마리아였다 한다.
선화당(宣化堂). 관찰사의 집무실이다. 선화당의 뜻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각 지역의 행정, 조세, 민원, 군사훈련, 재판 등에 대한 총괄적인 업무를 수행 한다. 행정과 사법, 병권을 모두 쥐고 있다. 만능이다.
행차때에는 강원도제군사령(江原道諸軍司令)깃발을 앞세우고 산천초목을 으름장 놓으며 조정에서 파견하는 정3품 순영중군(巡營中軍), 종5품 도사(都事) 판관(判官)같은 관리이하 향리 육방의 영리(營吏)들과 병졸, 비속들을 거느린다.
박해 때에는 먼저 참하고 후에 조정에 보고하기도 했으니 막강한 힘이다. 물론, 힘없는 양민과 천민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양반과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은 함부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장계를 올려 사형 교지를 받은 후에 시행했으리라.
최(崔)비르짓다는 최해성(요한)의 고모다. 조카인 최해성을 만나려고 옥(獄)을 찾아가 어미라고 둘러대고 면회를 청했지만 천주교인이냐고 묻는 포졸들에게 ‘분명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여 옥에 갇힌다. 崔비르짓다에게는 굶겨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목숨은 약할때는 한 없이 약하지만 질길때는 한 없이 질기다. 목적이 있을때는 더욱 그렇다. 최비르짓다는 조카 해성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아사 목적의 굶주림 형벌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다. 배교하면 해성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천주를 배신하느니 안보고 말겠다한다.
평소 해성을 자식처럼 생각했던 분이었으니 얼마나 보고 싶고 걱정이 되었을까 만은 그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도 배교는 할 수 없다는. 그러나 조카를 두고는 쉬 목숨줄을 놓을 수도 없었던 애절함이여.
책방지(冊房址)다. 선화당 뒷켠에 있다.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관할 지역에서 올라온 인구, 세금, 날씨 등에 대한 보고 자료와 각종 소송 관련 문서를 보관하던 곳 터이다.
최비르짓다는 4개월을 죽지 않고 버텼다. 처음에는 배교를 유도할 목적으로 숨이 붙어있을 정도의 음식과 물은 주었을것이다. 죽어도 그만이고 배교하면 목적 달성이고. 사람 목숨이 그렇게 저울질 당했다.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으니 윗선에서 3일 안에 죽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물과 곡기를 딱 끊고 아사하기를 바랐으나 죽지 않으니 옥졸들은 몸이 달았다. 불똥이 자기들에게 튈 참이다. 할 수 없이 목을 졸라 죽인다. 교살이 행해진 것이다. 57세. 최해성(요한)이 참수형을 당하고 난 3개월 후의 일이다.
한 송이 꽃이 꺾여 땅에 떨어 졌다. 그리고 그 꽃은 하늘로 올라가 천상의 꽃으로 피어났다. 내 생각이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을 때 이런 경우, 나는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표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온통 매사에 하느님나라 지향으로 표현 된다.
선화당에 대금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감영 직원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이 첫 날인 모양이다. 감영에 근무 하시는 분이 문을 활짝활짝 열어젖힌다. 시원하다. 한국 건축물의 백미를 여기서 본다.
최비르짓다가 죽고 옥리의 어미가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인들을 찾아가 고백 한다. ‘최 씨는 분명 천국에 갔을 거여. 숨을 거둘 때 한줄기 빛이 그의 몸에서 흘러 나와 하늘로 올랐거든. 아들이 나에게 예기 했어.’
‘여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강이(시몬?~1815)는 충청도 서산, 중인 집안 출신으로 장성한 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재산이 많았으나 입교 후에 다 버리고 고향을 떠나 동생 김창귀(타대오)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배교하지 않고 버티다가 형벌로 인한 상처가 심한데다가 이질까지 앓고 있어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돼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그의 나이는 50살이 조금 넘은 나이였고 최해성(요한)보다는 24년 앞서 순교 하셨다.
9 년 전, 세 분 중 한분을 극화하라는 교구의 말씀에 세례명이 나와 같은 김강이(시몬)을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최해성(요한)을 극화 하고 연출 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비르짓다님과 김강이 시몬님도 극화해 보고 싶다. 부족한 재주지만.
대금 연습중이다. 소년이 대금을 분다. 안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소년의 스승과 다른 몇 분이 대금을 분다. 연습에 방해가 될까봐 살짝 흔적만 찍었다. 대금, 참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
악기 하나쯤은 다루는 것이 좋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나는 음치에다가 콩나물 대가리는 음식으로만 좋아 한다. 게다가 끈기가 없고 게으르다. 그래서 부러워만 한다.
나는 이런 풍경을 좋아 한다. 비스듬히 열려진 문이나 창을 통하여 후원의 풍경이 보이는 그림말이다. 시원한 바람이 낮잠을 몰고 올 것 같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행위의 생각을 자주 한다. 좋게 생각 하자. 운치라고. 낭만이라고. 신선의 경지라고.
행각(行閣)중에는 사료관이 있다. 먼저 가신 분들의 손길이 여기에 있다. 먼저 가신 분들의 애환이 여기에 있다. 우리도 살다 가면 이런 사료 안에 조금의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게 될까?
이왕 흔적 없이 사는 인생, 머문 자리에 아무것도 남기지 말자. 미련까지도. 동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영광(榮光)과 한(恨)속에 내 사연도 함께 하겠지.
선은 천상의 꽃으로 피지만 죄는 지상에 흉한 허물로 남는다. 살아온 날들은 그렇다 체념 하더라도 살아갈 날들은 살피고 또 살펴야 겠다.
감영 사료관에 우리 선조 신앙인들의 사연이 전시되어 있다. 그 시절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다. 신앙의 신비다. 사도 바오로가 회심하고 개종하는 신비의 순간이 이에 비유될까?
천주학쟁이들을 잡아들이던 감영에 ‘감영의 옥에서 핀 순교의 빛’이라는 제목의 패널이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고통의 십자가가 구원의 표식이 되었듯 고통의 믿음과 처참한 순교가 신앙인의 부러움이 되었다.
십자가 처형의 끔찍함을 생각한다면 어찌 십자가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고 십자가를 보면 안심이 되고 무서움 중에 십자가를 잡으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그렇듯이, 저 패널속의 그림이 이제는 희망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알 것 같지 않은가?
강원감영 역대 관찰사의 재임 기록이다. 관찰사는 종2품, 높은 관직이다. 관찰사 임명의 어명을 받아 놓으면 임지로 떠나기 전 지체높으신 분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인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정도다.
경찰권·사법권·징세권을 행사하며 도내 수령에 대한 지휘권은 물론이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직책을 겸해서 군사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 하기도 하였다.
물론, 벼슬 높으신 분들은 새 관찰사에게 청탁을 넣기도 했다. 새 관찰사의 부임지와 인연이 있는 자들이 향리(鄕里)의 친족과 일가를 잘 좀 봐 달라는 청탁, 부탁 같은 것을 하는 그런 거 말이다. 혹 가다가는 귀양, 유배를 가있는 피붙이나 지인을 염려하는 당부와 그 지역 특산물을 눈치껏 보내 달라는 청탁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대는 다 그렇다.
감영 안 담장 밑에 접시꽃이 피었다. 그 시절 강원감영에도 접시꽃이 있었을까? 현대 어느 시인은 ‘접시꽃 당신’이라고 했지. 당신. 부부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형제일 수도 있고 친한 이웃과 벗일 수도 있다. 그런 정다운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라도 어찌 배교하지 않았을꼬. 채송화 꽃이 피어 있었으면 좋겠다. 과꽃도.
채송화, 과꽃이 피었었다면, 감옥 영창 밖으로 시선을 둘 때 얼마나 가슴 미어지고 가족이 그리웠을까? 그 고운 빛깔 때문에라도. 그런 것 까지도 다 이겨 내었기 때문에 순교는 장한 것이다. 나는 그리 못할 것 같다는 고백은 아직 이 세상에 미련이 많아서일까? 미련은 겁이다.
강원감영은 전대사를 받는 조건 장소 중 한 곳이다. 지나가시는 분에게 부탁해서 사진 한 컷을 얻었다. 독백의 물음이다. 백색순교. 내 천상의 자리도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백색순교만이 살길이다. 쉽지 않은 길이다. 이렇게 들 떠들어서라도 잊어먹지 말고 내 각오를 조금씩 완성해 나가야 한다. 많이 떠들어 조금 얻더라도, 빈 수래 요란 떨지라도 할 수 없다. 내 각오는 항상 무뎠다는 것을 상기한다.
감영을 다 돌아보고 나와 시내 길을 걷는다. 저 만치, 원동성당과 그 앞 가톨릭센타가 보인다. 날이 덥다.
감옥이 있고 형을 집행하던 곳은 어디 였을까?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을 기점으로 가까운 곳에 옥(獄)이 있었고 그곳에서 모든 문초와 고문이 행해졌을까? 당시 강원감영은 지금의 원주 중심 도심 대부분을 품을 정도의 넓이였다. 그 안에 관청도 있고 민가도 있었다.
현제 보존(복원)되고 있는 감영터와 건물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사적(史蹟)일 뿐이다. 복원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복원 예정 조감도 그림에서 보듯 책방지(冊房址) 느티나무 서 있는 뒷편은 연못이 있는 후원이었다 한다. 관찰사가 휴식을 취하고 손님을 맞아 담소를 나누기도 풍류를 즐기기기도 했던 곳이다. 확실한 연못터로 발굴된 곳이라 한다.
그 시절 감옥은 지금의 풍물시장에서 중앙시장께로 해서 원주역 가기전 어디쯤 이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오늘도 어느분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이 구전이 틀리고 옥이 다른곳에 있었다면 이 구전은 형을 집행하던 장소를 짚어줌은 아닐까? 조선시대 공개 처형(특히 정치범이나 흉악범, 천주교 신자)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집행되었지만 강가나 바닷가에서 처형한 사례도 많다. 구전의 지점 쯤이라면 원주천이 가깝다.
그런가 하면 선화당 뒷편(느티나무가 서 있는 책방지를 지나)후원, 연못이 있었던(복원 중)그 뒷편, 지금의 상가나 도로 어디쯤 자리에 옥이 있었다는 말씀도 들었다.
그러나 강원도 최고의 권력자가 손님을 맞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풍류를 즐기는 장소 가까운 곳에 옥을 두었을까? 조금은 의문이 든다.
살벌하고 험한 문초와, 살이 헤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은 이를 응시물어도 아픈소리 감출 수 없었을텐데 그런 죄수들의 단말마 비명과 신음소리도 들릴 수 있을 후원 가까이에 감옥을 둘 리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관찰사가 번거러움 없이 친국을 할 수 있도록 선화당(宣化堂)과 가까운 곳에도 옥(獄)을 두어(지금의 구치소 같은)그 옥에서는 문초와 대질 심문, 작은 형태의 고신(拷訊)만을 하고 큰 옥은 따로 있어 그곳에서 험악한 일들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생각이 가지를 친,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덥다. 나는 이제 현대인으로 돌아온다. 아침밥을 박탈당한 뱃속이 가난하다. 가까운곳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필립보형님에게 가서 커피 마시고 점심도 먹자. 그래야 겠다.
어느 건물, 길 모퉁이에 조경을 해 놓았다. 누구의 생각이고 손길인지 가상하다. 더위를 5도는 떨어뜨리는 발상이다. 여기를 보라!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는 돌에 새긴 메시지를 보라! 돌이 아니라 가슴에 새길 일이다. 그래, 모든 결말은 사랑이다. 내어줌이다. 밥이 되어주는 것이다. 김수환(스테파노)추기경님 말씀처럼.
복자품에 오르시는 세 분을 생각하면 기쁘다. 그 분들 고단한 생의 끝자락을 쥐락펴락했던 강원감영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
................................................-동선 시몬-
첫댓글 시몬님의 옆자리에서 본 듯한 생생함이 느껴지는 참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항상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축일 선물이 마음에 드신다니 고맙소이다. 사진작업과 글 올림에 시간이 많이 걸려(엄살 아님^^)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소이다. 오랫만에 자정을 30분이나 넘긴 시간 까지 깨어 있어 보았더니 피곤 하더이다.^^
더운 날씨에 수고해준 덕분에 편하게 강원감영 구경(순례?)잘 했네요. 설명도 좋았구요. 고맙습니다.
가끔씩 혼자 카메라 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재미도 낙 중에 하나였는데...,차꼬를 찬 듯, 예전 걸음걸음이 아니랍니다.^^
매 번, 선듯선듯, 순교를 당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다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