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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련산 서릉 681.5m봉에서 바라본 보련산
자기 힘을 시험하는 뜻으로, 혼자서 그리고 밤에, 동알프스 최대의 암벽인 와츠만과 같은 높
이 1,800 미터의 동벽을 제일 어렵다고 하는 잘츠부르크 루트를 골라서 겨울철에 올라갔다.
이러한 행위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인 공명심에서도 아니었다.
다만 헤르만 불이 위대한 산에 내미는 명암에 지나지 않았다. 불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준비했습니다. 내 생애는 당신에게 와서 뵙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내가 아직 당신을 몰
랐을 때에도 모든 것은 그 준비였습니다.”
―― 헤르만 불의 『8000 미터 위와 아래』에서 쿠르트 마이크스가 쓴 서문 ‘땅과 하늘 사이
의 방랑자’에서
▶ 산행일시 : 2019년 7월 7일(일), 맑음
▶ 산행인원 : 3명(킬문, 두루, 악수)
▶ 산행거리 : GPS 도상 14.8km
▶ 산행시간 : 9시간
▶ 갈 때 : 동서울터미널에서 목계 가는 버스 타고, 목계에서 택시 타고 봉황내로 감
▶ 올 때 : 진달래공원묘원에서 택시 타고 감곡으로 가서, 감곡에서 동서울터미널 가는 버스 탐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가급적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6 : 55 - 동서울터미널에서 목계 경유 제천 가는 버스 탐
08 : 41 - 목계(牧溪)
09 : 00 - 봉황내, 산행시작
09 : 28 - 정토사 위 안부
10 : 15 - 무쇠봉(△370.8m)
10 : 29 - ┣자 갈림길 안부
11 : 12 - 국사봉(國師峰, 482.1m)
11 : 45 - 동막고개
12 : 10 - ┣자 갈림길, 오른쪽은 능암리에서 오는 등로
12 : 14 ~ 12 : 35 - 노송 그늘진 암반, 점심
12 : 45 - 팔각정
13 : 09 - 쇠바위봉(591.5m)
13 : 24 - 성안고개, ┣자 갈림길 안부
13 : 56 - 보련산(寶蓮山, △764.4m)
14 : 30 - 된언덕고개, 석굴
14 : 47 - 681.5m봉
15 : 10 - 하남고개
16 : 27 - 국망산(國望山, △769.5m)
17 : 10 - ┣자 능선 분기, 직진은 둔터고개, 오른쪽은 진달래공원묘원으로 감
17 : 35 - 진달래공원묘원 진입
18 : 00 - 진달래공원묘원, 산행종료
18 : 38 ~ 19 : 50 - 감곡, 저녁
21 : 32 - 동서울터미널, 해산
1-1.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25,000)
1-2.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25,000)
2. 산행 고도표
▶ 무쇠봉(△370.8m), 국사봉(國師峰, 482.1m)
목계(牧溪). 목계는 자연 지리적 이점으로 1750년 이전에 이미 내륙의 상항(商港)으로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었으며, 한강의 가항구간 중 중간에 위치하여 육
지와 바다의 물산이 집산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목계는 1900년대 초까
지도 충주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다. 1909년 충주 지역 장시 가운데 목계장이 장날 운집인구
500명, 거래금액 600원으로 지역에서 최고의 장시였다.
충주 노은 출신인 시인 신경림은 목계는 물론 보련산 주변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시집 『농
무』(1973)을 출간했다. 그 시집에 수록된 ‘목계장터’는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이제는 궁
핍한 삶에 지친 목계 농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절창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붇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그런 목계가 지금은 한촌으로 대처인 제천을 가는 길목의 간이 정류장으로 쇠락하였다. 출장
중인 택시기사님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6.3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
은 민주열사 김중배의 추모비와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고, 그 옆 울타리 너머 텃밭의 하얀 도
라지꽃과 눈 맞춤한다.
저간의 오지산행에서 도라지란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더니 마치 내가 지어낸 얘
기로 알고 다들 시큰둥하기에 그 출전을 밝힌다. 도라지는 ‘길경(桔梗)’이라고 하며 도라차
(道羅次)에서 ‘도랒’으로 다시 ‘도라지’로 변했다고 하는데(이우철, 『한국 식물명의 유
래』), 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아래의 과학적인 설명은 얼마나 알아듣기 쉬운가.
“옛날 금강산 어느 골짜기에 화전을 일구어 근근이 살아가는 ‘도’가 성을 가진 노인에 ‘라
지’라고 부르는 외동딸이 있었다. (……) 라지의 무덤에 하얀 꽃 한 송이가 피어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승에 간 처녀가 사랑하는 총각에게 얼굴을 내민 것이리라! 이때부
터 마을 사람들은 그 꽃을 처녀의 성과 이름을 붙여 ‘도라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안옥규, 『우리말의 뿌리』)
택시 타고 봉황내 봉황교 건너고 굴다리 지나 벌목한 산기슭에 왔다. 일반 등산로가 나 있을
턱이 없다. 물론 조금 더 가서 정토사 뒤쪽 안부를 겨냥했더라면 한결 수월했겠으나 우리는
무쇠봉을 보다 더 알뜰하게 오르려고 한다. 골짜기 산판 길 따라 한 피치 오르면 변발한 모양
의 산봉우리에 올라서고 잡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이 다음의 진행이 매우 어렵다.
왼쪽 사면을 더듬어 내렸더니 가야 할 능선 마루금은 오른쪽 저편이 있고 골로 갈 듯하여 뒤
돌아갔으나 이번에는 너무 갔다. 다시 절반쯤 뒤돌아 밀림을 뚫는다. 잡목과 더불어 아까시
와 산초나무가 맹렬히 저항하니 우리는 난데없이 복병을 만난 셈이다. 킬문 님은 반팔 맨손
차림 했다가 곧바로 상황이 녹록하지 않음은 간파하고 팔 긴 옷으로 갈아입고 목장갑을 낀다.
야성이 등등한 야산이 오지보다 더한 오지다. 서로 연호하며 무쇠처럼 억센 가시덤불 숲을
뚫는다. 어렵사리 야트막한 안부에 내려서고 정토사 쪽에서 올라온 흐릿한 인적을 쫓는다.
가파른 수직사면을 한 차례 기어오르면 지능선이 합세하여 인적이 더욱 뚜렷하다. 봉황내에
서 산행을 시작한 지 40분이 지나서야 본 궤도에 오른다.
나뭇가지 잇대어 걸터앉을 자리 마련해 놓은 무명봉에 오른다. 벌목한 북동쪽으로 조망이 훤
히 트인다. 입산주 탁주로 칼칼한 목축이며 남한강 건너 첩첩한 뭇 산들을 어림짐작한다. 천
등산과 오청산일까? 한적한 산길 조금 더 가면 무쇠봉 정상이다. 사방 키 큰 나무숲으로 가
려 아무 조망이 없다. 삼각점은 ╋자 방위표시만 보인다. 무쇠봉 높이가 겨우 370.8m인데 우
리는 유수한 고산준봉에서만큼이나 무진 애를 쏟아 부었다.
무쇠봉 정상을 벗어나면 대형 특고압송전탑이 나오고 그 밑을 지나 당분간 활개 치며 운재로
를 간다. 운재로는 벌목을 사면을 내려 대촌 쪽으로 가고 우리는 가파른 서릉 소로를 내린다.
뚝 떨어진 안부는 ┣자 갈림길이 나 있다. 안부에서 약간 더 가면 넓게 자리 잡은 통덕랑 김
재형(通德郞 金在衡)의 무덤이 나온다. 커다란 오석의 비석 사면에 묘갈명을 새겼기에 공의
행적이 궁금하여 문집이나 왕조실록 등을 찾아보았으나 의미 있는 자료는 얻지 못하였다.
완만한 풀숲 소로를 가다 암릉과 맞닥뜨린다. 왼쪽으로 사면을 길게 돌아 오르는 우회로가
있지만 나는 직등한다. 한바탕 힘쓰면 노송이 줄 이은 평평한 바윗길이다. 왼쪽 우회로는 산
지당에서 만난다. 산지당(山地堂)은 누군가 임의로 우람한 노송 아래에 석축을 쌓아 만든 단
(壇)이다. 국사봉은 산지당에서 100m쯤 더 오른 노송 숲이다. 정상 표지석이나 표지판은 없다.
3. 도라지꽃, 목계에서
4-1. 산판길에서 산행은 시작한다(두루 님이 찍음)
4-2. 앞 골짜기가 올라온 길, 들판 끄트머리에 흐르는 강은 남한강이다
5. 무쇠봉 가기 전 조망 트인 곳에서 바라본 천등산, 오청산(오른쪽)(?)
6. 남한강
7. 타래난초(무쇠봉 내린 안부의 묘지에서 두루 님이 스마트 폰으로 찍었다)
8. 국사봉 오르면서 바라본 양지말산(?)
9. 국사봉에서 바라본 보련산(맨 오른쪽), 그 앞이 쇠바위봉
▶ 쇠바위봉(591.5m), 보련산(寶蓮山, △764.4m)
국사봉에서 동막고개로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킬문 님이 17년 전에 동막고개에서 이 국사
봉을 올랐다가 내렸다고 하나 그때는 밤이라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랬을 것. 동막고개
가는 넙데데한 서릉이 지도를 보나 실경을 보나 수직의 절벽이라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
하고 산지당까지 뒤돌아가서 산자락 도는 인적을 찾기로 한다.
그래도 국사봉 정상 부근에서 곧장 서릉을 내리는 편이 나았다. 쏟아지듯 해도 얼마 안 가 인
적이 나올 테고 그 인적은 동막고개 고갯마루에 닿는다. 나는 어중간하게 뒤돌아 내리다 국
사봉 사면을 돌아가는데 생 오지를 만들어 가는 셈이 되고 만다. 낙엽 깊은 너덜을 허방 디뎌
엎어지고 가파른 슬랩을 트래버스하려다 쭈르륵 미끄러져 골에 처박히기도 한다.
낙엽이 덮인 슬랩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국사봉에서 곧장 내려오는 인적과 만나고 동막고개
가까운 절개지 사면에서는 안면 블로킹한 날랜 푸트워크로 잡목 숲을 뚫는다. 동막고개. 2차
선 도로가 지난다. 뙤약볕에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 도로라 얼른 건너편 옹벽 올라 벚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 가쁜 숨을 고른다. 고개 뒤로 한껏 젖혀 올려다보는 국사봉이 첨봉이다.
이제 쇠바위봉이다. 마사토가 드러난 절개지 수직사면의 소로를 일보전진 이보후퇴하며 오
른다. 그렇게 한 피치 오르면 하늘 가린 숲속 능선의 한갓진 길이 앞서간다. 풀숲 사면을 만
나면 가는 걸음에 멀리 가까이 실눈 뜨고 샅샅이 스캔해보지만 빈 눈이다. 등로 옆에 노송 그
늘진 암반이 나오고 솔바람이 불어 점심자리로는 천하명당이다. 킬문 님과 두루 님은 산꾼의
체질인 타고난 소식이라 김밥 한 줄이 전부다. 킬문 님은 김밥조차 동행인들에게 폐를 끼칠
까봐 사왔다!
노송 암반을 뒤로 하고 긴 한 피치 오르면 가파름이 수그러들고 2층 팔각정 전망대가 나온
다. 당연히 들른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촌 마을을 지나 멀리 아스라하게 보이는 산은 월악
산 영봉이 틀림없다. 팔각정을 내리니 대로다. 이렇다면 쇠바위봉, 보련산 가는 길이 이 동네
주민들의 산책길인가 했더니만 잠시 후 대로는 왼쪽 사면 아래로 방향을 틀어 수룡산림욕장
으로 간다.
바윗길이다. 왼쪽 사면의 낭떠러지 추락방지 쇠난간 붙잡고 오른다. 이래서 쇠바위봉인가?
너른 공터에 벤치 2개 놓인 쇠바위봉 정상은 울창한 숲속이라 아무 조망이 없다. 여기에서도
시원한 솔바람을 맞는다. 쇠바위봉을 한 차례 뚝 떨어지면 ┣자 갈림길 안부인 성안고개다.
보련산을 잔뜩 높여 놓고 오른다. 0.8km 줄곧 가파른 오르막이다. 그렇지만 바람이 쉬지 않
고 등 떠밀어 걸음걸음이 사뭇 가볍다.
보련산. 세상의 한 가운데라는 중원(中原)의 최고 경점이 아닐까 한다. 사방 조망이 훤히 트
인다. 눈이 시도록 보고 또 보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찍고 또 찍는다. 정상 표지석 옆
의 삼각점은 마멸되어 ╋자 방위표시만 보인다. 갈 길이 멀어 그만 보련산을 내린다. 북서진
한다. 완만한 내리막 잘난 숲길이다. 710.3m봉에서 잠깐 멈칫하다 쭈욱 내리면 된언덕고개
안부다.
10. 가운데 멀리 흐릿하게 월악산 영봉이 보인다
11. 자주봉산과 평풍산(왼쪽)
12. 뒤가 가섭산(?)
13. 국망산, 왼쪽 뒤는 원통산(怨慟山)
14. 오른쪽 뒤가 원통산
15. 오른쪽 뒤가 가섭산
16. 보련산 정상에서
17. 멀리 왼쪽이 백운산, 오른쪽은 구학산
18. 보련산
19. 국망산
▶ 국망산(國望山, △769.5m)
된언덕고개인 안부를 지나 바윗길을 조금 오르면 석굴이 나온다. 골바람을 한데 모아 내뿜어
대는 냉풍구이다. 금방 소름이 돋게 춥다. 이때는 알탕 생각이 천리만리 달아난다. 폐부까지
냉장하여 바윗길을 오른다. 국사봉에서 바라볼 때 되똑하니 솟은 681.5m봉이다. 681.5m봉
정상에 오르기 전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보련산은 여태와 또 다른 모습이다. 일망하여 그 힘
차고 당찬 기세에 압도당한다.
681.5m봉에서 정서진하여 하남고개 가는 길은 때때로 가파르게 내리지만 그때는 건너편 국
망산의 울근불근한 산줄기를 전망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저기를 가야 한다니 누구라도 그
럴 것이 지레 움츠러든다. 하남고개. 2차선 도로가 넘는다. 국망산 가는 길은 고갯마루 왼쪽
을 돌아가면 등산 안내도가 1.9km의 첫 피치인 통나무계단의 가파른 오르막을 안내한다.
바람이 새어들 틈이 없는 숲길이다. 장맛비 대신 비지땀을 줄줄 흘린다. 한참동안 숲길을 지
루하게 지나다 두 차례 고정밧줄 잡고 슬랩을 오르면 남쪽으로 조망이 트이는 암봉인 607m
봉이다. 경점이다. 암봉 주변의 바위틈을 비집은 노송들도 드문 가경이다. 밧줄 잡고 낮은 절
벽 내려 수림에 잠수하고 다시 긴 오르막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있으랴. 묵언 수
행한다.
대슬랩을 고정밧줄 움켜쥐고 바짝 올랐다가 평탄한 숲길을 숨 고르며 지나고, 맞닥뜨린 암벽
을 왼쪽의 좁은 테라스로 트래버스 하여 잠깐 밧줄 잡고 오르면 국망산 정상이다. 국망산 정
상 또한 중원 최고의 경점이다. 돌탑 앞에 있는 삼각점은 ‘23 복구, 1976.7 건설부’이다. 재
설한다면 그 지명은 ‘장호원’이 될 것이다.
국망산은 옛날 금방산(金傍山)이었던 것이 국망산으로 개칭된 것은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고종의 황후였던 명성황후가 이 고장으로 7개월 동안 피신하여 있는 동안 한양 소식이 궁금
해 매일 산마루에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며 초조해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전혀 근거
가 없지 않지만 이 험산을 명성황후가 매일 올랐다는 건 믿기 어렵다.
역사학자 이선근(李瑄根, 1905~1983)이 1934년 2월 7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속 조선
최근세사」을 보면 이 대목이 매우 신랄하다.
“임오군란 제2일 군민의 손에 죽은 줄 알엇던 민비! 그를 위하여 의복으로나마 이미 국장을
치른 지 오랫고 전 국민은 모다 백립을 써 국상에 복하는 중이 아니엇든가? 그러나 만인의
기대와 疑懼之念을 저바리고 그는 선녀의 再降이 아니라 현실인간으로 경성에서 이백리도
못 되는 충주 장호원에 친정족속의 정성스런 위안을 받어가며 晏然히 생존해 잇엇던 것이다.
(……) 민비가 국망산으로 숨게 된 이면을 살피건대 당시 諸閔에 대하야 반감을 가진 장호원
주민들은 張文五란 자를 수령으로 하야 이 경성으로부터 온 閔族의 진객들을 습격코저 하엿
던 것이니 (……) 그러나 李根澤이란 소년의 밀고로 미연에 정세를 살피어 민비 일행은 장호
원에서 북방으로 약 육십리쯤 되는 국망산중으로 피신케 된 것이니 산곡간을 방황하다가 십
수호의 소촌을 찾어들어 獵民 李時榮이란 이의 집에 겨우 의탁케 되었다.”
하산! 건너편 원통산(怨慟山)을 내처 오르지 못하는 발걸음이 아쉽지만 다음날을 기약하고
국망산을 내린다. 국망산 주등로는 서릉 안부인 둔터고개다. 우리는 둔터고개로 가는 중간쯤
되는 지점의 ┣자 능선 분기봉에서 오른쪽 지능선을 타고 용포로 내릴 것이다. 잘난 길 따라
줄달음한다. 용포로 내리는 지능선의 길도 좋다.
일로 직진한다. 좌우에서 출몰하는 지능선에 인적을 나누어주다 보니 우리가 붙든 인적은 어
느새 희미해졌다. 수미상관의 산행이다. 오늘 아침 산행을 시작할 때처럼의 가시덤불 잡목
숲속에 갇힌다. 일단 낮은 자세하여 머리부터 디밀어 뚫는다. 갑자기 세상이 트이고 진달래
공원묘원이다. 사자들의 세상에 들어가 우리가 산다.
우리나라에서 이 공원묘원보다 규모가 더 큰 공동묘지가 있을까? 묘원 주도로를 오르고 내
리는데 어찌나 팍팍한지 차라리 숲속 산길을 가는 게 훨씬 더 나았다. 30분 가까이 잰걸음하
였으나 묘원 절반도 못 갔다. 난간 석축에 주저앉는다. 세 사람 모두 쌍수 들어 동의한다. 감
곡 택시 부르자고.
20. 가운데가 자주봉산과 평풍산
21. 가운데가 오갑산(?)
22. 가운데가 자주봉산과 평풍산
23. 왼쪽 뒤가 가섭산
24. 앞은 승대산, 오른쪽 뒤가 원통산
25. 국망산 정상에서 북서쪽 조망
26. 오른쪽 뒤는 원통산
27. 국망산 정상에서 북동쪽 조망
첫댓글 더운날 전망좋은 곳을 다녀오셨네요...두루님도 슬슬 움직이고 있네요^^
안가본 산이네요. 산도 많기도 해요. 바람같은 세분이 바람과 함께 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