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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중동 지방을 묘사한 화가들을 오리엔탈리스트라고 하죠. 물론 음악과
미술, 영화 등 예술 전분야에 걸쳐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있지만 특히 회화에서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제가 말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화려하고 고운 그들의
그림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을 이집트에서 보낸 영국의 존 프레드릭 루이스
(John Frederick Lewis / 1805~1876)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 귀족의 정원 In the Bey's Garden, Asia Minor
잘 꾸며진 정원입니다. 꽃을 꺾어 화병에 담는 여인의 키와 비슷한 꽃은 혹시 양귀비 아닌가요?
아무래도 꽃 이름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이름을 불러야 나에게로 와 ‘의미’가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수
많은 의미들이 제 곁에 ‘무의미’하게 서 있는 것이겠군요. 그림 속 아가씨에게 배우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좀 무섭습니다..
루이스는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풍경화가이자 목판화가였고 삼촌 역시 화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술가 집안 분위기였겠지요. 아버지는 어린 루이스를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었습니다. 루이스도
미술에 재능이 있었는지 처음에는 목판화와 에칭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동물을 주제로 한 에칭과
숙달된 수채화가로 어린 나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하렘 생활 Harem Life in Constantinople / c.1857
나른한 오후, 하렘의 여주인이 고양이에게 장난을 걸고 있습니다. 여인의 옆에는 세상과 통하는 큰 창문이
있지만 몸은 절대로 나갈 수 없는 통로입니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것만으로 본다면 여인은 고양이가 부럽기도
하겠지요. 서 있는 여인은 하녀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하렘의 주인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들의 원초적 본능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지만 여인들만의 세상이 된 하렘은, 그래서 그 어느 곳 보다 화려합니다. 그리고 쓸쓸합니다.
혹시 그림 속에 몇 명이 등장하는지 세어보셨는지요? 거울 속 두 사람까지 합하면 4명이나 되는군요.
(아내가 아무리 봐도 세 명이라고 해서 거울 속 오른쪽 위에 조그맣게 발이 보인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발로 보여? --- 발 아닌가요?)
어떤 경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스는 당대 초상화의 대가였던 토마스 로렌스의 제자로 들어갑니다.
열 여섯 살에 로열 아카데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니까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 아닌가 싶습니다.
20대 초반 루이스는 유럽 여행을 떠납니다. 집안 사정이 부유해서 그의 여행이 가능했는데 4년간에 걸친
그의 여행 종착지는 유럽의 동쪽 끝, 콘스탄티노플이었습니다.
커피 나르는 사람 The Coffee Bearer / 30.4cm x 19cm / 1857
제목을 ‘커피 배달 왔어요’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뜰을 지나 문지방을 살짝 밟고 햇빛이 내리쬐는 정원으로
커피를 들고 나오는 여인의 모습이 고혹적입니다. 살짝 걸린 웃음도 절묘한데 약간 돌린 얼굴의 눈도 웃고
있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예쁜 여인만 보면 정신 못 차린다고 한 소리 듣겠군요.
여행에서 돌아 온 그의 작품의 주제는 다양했습니다. 동물과 풍경화, 풍속화에서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고
특히 스페인을 주제로 한 작품은 풍부한 색상과 화려한 의상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행이 사람을 키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 아직도 더 크고 싶은데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카이로 근처의 터키 학교 A Turkish School in the Vicinity of Cairo
학교가 야단 법석입니다. 선생님 맞은 편 방석에는 고양이가 앉아 있고 새들은 공부방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먹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잠시 후에 고양이가 새들에게 덤벼들겠지요. 숙제를 안 해왔나요? 선생님 앞에 꿇어
앉은 학생은 눈치 보기에 바쁘고 기가 막힌 선생님은 회초리를 손에 들었습니다. 소녀의 책상에 새가 앉았지만
소녀는 잠이 들었습니다. 참 어수선한 카이로판 ‘봉숭아 학당’이군요.
1832년, 27세가 되던 해부터 그 다음 해까지 루이스는 스페인에서 머뭅니다. 이 기간 동안 북 아프리카의
모로코를 여행하는데 이 때 아랍의 의상과 삶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여행을 다니는 화가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루이스처럼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곳을 화가는 과문한 탓인지 처음 아닌가 싶습니다.
빼앗긴 편지 Intercepted Correspondence / 74.3cm x 87.3cm / 1869
보통 귀족들의 하렘에는 4명의 여인까지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법으로 4명까지의 아내가 허락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은 예외이겠지요. 묘한 장면입니다. 손목이 잡혀 끌려 온 여인은
누구엔가 마음을 전하다가 현장을 목격 당한 모양입니다. 기세 등등하게 남편에게 그 사실을 말하는 여인
주위의 여인들의 표정은 냉랭합니다. 모두들 고소하다는 눈빛들입니다. 경쟁자가 하나 준다고 생각하는 것
일까요? 화려하지만 무섭고 섬뜩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남자 ---- 좀 부럽군요.
1841년, 36세가 되던 해 루이스는 이집트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가 처음부터 작심을 하고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0년간 카이로에 머뭅니다. 19세기 유럽과 미국의 많은 화가들이 중동을 순례하고 현지를 묘사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루이스처럼 10년이나 머문 사람은 그가 유일했습니다.
소문 Indoor Gossip, Cairo
여인들의 규방에서 오고 가는 말이 담을 넘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되죠. 치장을
하는 여인을 돕는 여인이 목걸이를 건네면서 던진 한 마디에 귀걸이를 달던 여인의 얼굴이 흠칫합니다.
그거 정말이야?
그럼, 내가 들었다니까
세상에 어쩌면 ---
규방정담이 규방괴담이 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하기 요즘 세상 밖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담들이 돌아
다니는데 카이로라고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도 거울이 등장하는군요.
10년 동안 카이로에 머무르는 동안 루이스는 아랍사람처럼 생활했습니다. 런던에서는 가장 최신 패션의 옷을
입은 멋쟁이 그 자체였던 그는 카이로에서는 이집트 귀족의 사교 예복을 입고 생활했습니다. 특히 옷에 아주
매료되었습니다. 도시의 삶에서 ‘도시화’되는 것을 벗어나고 싶다고 했던 그의 정열이 혹시 그런 선택을 한 것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믿음의 기도가 환자를 구할 것입니다 And the Prayer of Faith shall Save the Sick
주인 마님이 아파 누웠습니다. 침대 주변에 모인 집안 식구들 얼굴이 침울합니다. 성직자가 경전을 무릎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도 식구들의 고민과 함께 하늘에 닿겠지요. 그런데 턱을 괴고 있는 소녀의
표정에는 의심과 호기심이 반씩 어려있습니다. 저런 상황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간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도 간절함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지요. 그림 속 간절한 사람이 또 있군요.
경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몸을 거의 눕히다시피 해서 책을 넘어다 보는 검은색 청년 --- 예전에 전철을
타고 통학을 할 때 어깨너머로 신문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루이스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이집트의 오지를 찾아 야영을 하며 별빛 쏟아지는
밤 하늘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간혹 도시를 벗어나는 여행을 할 때 밤이 되면
물방울이 솟아 오르듯 별이 하늘에서 돋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사람은 어느 별에선가 왔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손님 접대 The Reception / 1873
손님을 맞는 안주인의 자세가 예사롭지 않아 혹시 왕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저를
여러 가지로 놀라게 했습니다. 화려한 실내 장식과 그 것을 거의 완벽하게 그림 속에 담은 루이스의 기술이
놀라게 했고, 방 안에 작은 연못을 둘 정도의 풍요로운 왕궁 (귀족일 수도 있지만)의 모습은 저를 압도
했습니다. ‘빼앗긴 편지’에도 남자 옆에 앉아 있던 고라니 같은 동물이 여기서는 어슬렁거리며 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인가요? 혹시 눈치 채셨습니까? 이 작품에는 거울 대신 거울처럼 맑은 물이 그림자를
담고 있습니다. 루이스에게 거울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10년간의 이집트 생활을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 오는 루이스의 짐에는 당시 영국사람들이 좋아했던 중동
사람들의 삶과 풍경이 담긴 수채화가 가득했습니다. 어떤 자료에는 그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채워줄 영감과 그림이 함께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삶이 무르익는 나이에 10년이면 그럴 수 있겠지요.
카이로 시장 A Cairo Bazaar - The Della / 64.7cm x 49cm / 1875 /watercolor
붉은 천을 든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천을 만지는 여인이 관심이 있는 듯
합니다. 이럴 때 마지막 승부를 던져야 하는데 --- 장사꾼은 애가 타는 눈치입니다. 손에 든 푸른 쟁반과
발 아래 놓인 도자기는 그 다음에 팔 물건인가 봅니다. 열심히 팔아야겠군요. 그런데 이 작품에도 거울이
등장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드려다 보는 것처럼 하면서 관객을 보는 오른쪽 구석의 저 남자, 혹시 루이스
아닐까요?
귀국 후 열린 전시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루이스는 매우 낙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국의 많은 수채화 단체의 대표를 맡게 되는 영예도
누립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루이스는 다른 말로 갈아탈 결심을 합니다.
점심 The Midday Meal, Cairo / 88.3cm x 114.3cm / 1875
2층에 있는 식당이 점심을 먹는 사람들과 시중드는 종업원들로 왁자지껄합니다. 음식상을 넘어다 봤더니
과일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음, 좋은 메뉴. 한 사람은 벌써 다 먹었는지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식사 속도가 빠른 사람이 있지요. 건너편은 음식상을 치우고 있군요.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새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앞의 음식상 앞에는 아예 새를 위한 음식 그릇을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 그릇이 눈에 들어 오는 순간, 점심 상 둘레 않은 사람들이 좋아졌습니다. 많이 드세요.
살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싸워서 이기거나 피하거나 적당히 화해를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가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루이스의 경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수채화를 버리고 유화로 방향을 바꾼
것이죠. 물론 루이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산속 사람들의 환대 Highland Hospitality
가운데 화로를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산악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여행객이나 탐험가 아닌가 싶습니다. 몸을 잠시 쉬자고 들렀는데 주인은 한 손에는 술 잔을 들고 한 손은
술병을 꺼내 드는 중입니다. 순박하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쉽게 마음을 열고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양 쪽으로 나뉘어 사람들과 개가 서로를 쳐다 보고 있는데 맨 왼쪽의 소녀는 눈동자만 향하고 있습니다.
혹시 낯 선 남자들 때문에 둥둥 뛰는 가슴 소리가 들릴까 봐서?
유화로 방향을 바꾼 이유는 첫째 유화가 수채화보다 오래 간다는 이유였습니다. 미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수채화 작품의 물리적 수명이 유화보다 짧은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유화가 더 많은
범위를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유화가 더 많이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금전적으로도 더 비싸다는 이유였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아주 인간적입니다.
사막에서의 만남 The Greeting In the Desert, Egypt / 36.2cm x 49cm / watercolor on paper
야, 이게 누구야? 그 동안 잘 지냈어?
그럼, 꽤 오랜만이지? 그 동안 자네 아들도 많이 컸는데 -- 이제 한 몫 하겠어.
아직 어리지 뭐, 세상 돌아가는 걸 배우라고 이 번에 데리고 나왔어.
좋은 생각이지. 그런데 낙타들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인데?
굳게 잡은 손을 보면서 저도 사람들의 손을 잡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고 사막을 넘고 싶어졌습니다.
60세가 되던 해 루이스는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이 됩니다. 유화에서도 그의 기교는 눈부셨습니다. 영국에서
활동한 가장 중요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평가가 따랐습니다. 매우 정교한 기법은 라파엘 전파의 그 것과
아주 비슷했고 특히 꽃을 묘사한 부분이 더욱 같았는데 이집트에 거주하는 동안 중동 지방의 장식을
섬세하게 배운 결과였습니다.
당대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말도 들었지만 정작 루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진
화가였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다시 각광을 받았는데 묘하게도 작품 경매 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고가에 거래된다고 합니다. 극과 극은 늘 통하는 것인가요?
첫댓글 즐겁게봤습니다
더 좋은곳이 않보이입니다 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