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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묵상글 (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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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독서와 복음은 모두 씨앗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밀알 하나와 같은 존재였고,
씨앗을 많이 뿌린 사람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라우렌시오 성인을 씨앗에 비유하여 얘기하는데
복음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바로 밀알 그러니까 씨앗이었다는 얘기인 데 비해
독서는 씨를 많이 뿌린 곧 선행 실천을 많이 한 분이 라우렌시오 성인이라고
얘기하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씨앗이든 자기 선행이 씨앗이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공통의 목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씨앗은
씨앗이 아니거나 불량 씨앗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오늘 라우렌시오 성인을 묵상하고,
저 자신에 대해서는 반성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순교하였으니 진정 밀알 하나였고,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니
씨앗을 많이 뿌린 분이었고 그래서 많은 열매를 거둔,
다시 말해서 로마 교회를 굳건히 하고 확장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도 되는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저를 보고 수도원 들어온 사람 하나도 없고,
제 조카들 가운데도 수도자나 재속 프란치스칸이 된 놈이 없으며,
저를 보고 세례받았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위하는 차원일지 모르지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저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 성인과 비교하여 왜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사랑 차이겠지요.
죽도록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적당히 사랑하는 차이,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과 일부를 내어주는 사랑의 차이,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과 바라는 사랑의 차이,
섬기는 사랑과 시혜적인 사랑의 차이, 뭐 이런 거지요.
알면 됐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데
다 욕심부리지 않고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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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밀알을 죽게 하는 힘은 생명력입니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이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요,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이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됩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기보다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거나, 수도자가 집과 가족을 떠나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따름에도 진정한 섬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 속에서 죽는 장엄한 순교의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계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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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태12,24). 이는‘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입니다.’ 물론,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 능력, 물질,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배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에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입니다(홍승모).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 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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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매주 평화신문을 읽습니다. 1면부터 20면까지 꼼꼼히 읽습니다. 이유는 제가 신문사를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읽어달라고 권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으로 신문을 읽을 때는 귀찮기도 했고, 시간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으면 건너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신문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그 지면들에는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도 있었습니다. 가톨릭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글들이 교회의 보물이라 생각하니 신문을 읽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며칠 여행을 갈 때면 꼭 신문을 챙겨서 갔습니다.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신문을 읽으니 시간도 금세 지나갔습니다.
공부도 그랬습니다. 성격상 미리 준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는 늘 먼저 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과제가 있으면 동창 중에서 가장 먼저 하곤 했습니다. 해야 하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과제는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제게 동기부여가 한번 있었습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달콤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했었고, 원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제게 공부는 의무가 아니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선생님들이 인정해 준다는 것을 알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수업시간이 졸리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20문제 중에 아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나뭇잎의 운명이듯이 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유혹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했던 추억과 기억은 제게는 문신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논문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논문주제를 ‘설교’로 정하였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면 꼭 필요한 논문이라 생각하니 준비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는 말처럼 즐겁게 하니 논문도 동창 중에 가장 먼저 제출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주변에서 신앙의 기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대부, 대모를 서는 것이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자, 대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대자, 대녀의 축일을 챙겨주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런 대부, 대모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대자와 대녀들은 신앙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지난번 ‘신앙 강좌 기획팀’의 모임도 그랬습니다. 그분들은 비행기가 연착되었어도, 길이 막혀 12시간 넘게 운전을 하였어도 전혀 짜증내지 않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미사가 없는 날은 미사가 있는 미국 성당으로 가서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미사는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러니 멀어도, 언어가 달라도 기쁘게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들만 중독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나눔도, 봉사도, 희생도 기쁘게 하면 중독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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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제가 머무는 곳이 ‘갑곶순교성지’이기에 순교라는 말은 더욱 특별하게 들립니다.
몇 달 전 교구 연수 안에서 들은 특강의 한 부분이 생각납니다. 특강을 해주신 강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방식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것이 주님의 구원 방식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함은 주님과 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부분을 모두 포함하는 ‘동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특강을 들은 후 저에게 ‘함께’라는 단어는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닌 ‘동감’ 즉 마음까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순교로서, 그 신앙의 뜨거운 피로 주님과 함께(동감)한 순교자들은 모두 주님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길 위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합니다. 본당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가장 작은 교회의 가정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하고 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진짜로 우리는 함께 하고 있는 걸까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같은 공간에서 입을 하나로 모아 기도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함께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함께….
서로의 마음을 서로가 이해하며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산다는 건….
산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
조금 틀어서 말하면
행동해야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신앙의 길 위에서도
우리가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기도와 함께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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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교에 입학하고 군대 포함해서 거의 10년의 시간을 보내면 사제가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의 대학원 시절인 1~2년만 잘 보내면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나갈 거면 조금 일찍 결정하면 좋았을 것을, 그 오랜 시간을 그냥 시간 낭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한두 해도 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두 해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 이상 되시는 분에게 여쭤보십시오. 자기와 한두 살 차이 나는 것을 크다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라는 표현도 쓰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기에 세상 속의 한두 살은 대단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못되었다고 해서 시간 낭비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간도 쓸모없는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을 때가 가장 빠른 선택이 될 수 있지요. ‘가장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간의 빠름에 한 것 없다면서 아쉬워할 것도 없고, 또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쉽고 후회할 일이 있다면 지금부터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늘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강조하셨지요. 어떤 결정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결정입니다.
결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주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당신 뜻을 따를 것을 명령하시는데, 우리는 아직은 할 수 없다면서 이유를 나열합니다.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남들도 안 하니까, 나만 하면 손해니까, 남들로부터 잘난척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결국 끝까지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 노력은 언제 해야 할까요? 언젠가 할 것이라면서 뒤로 미루는 노력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하며, 지금 당장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세속적인 물질과 이기심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만족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직도 멀었다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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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은 대부분 사소하고 기억되지 않는 친절과 사랑의 행동으로 채워진다(윌리엄 워즈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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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삶
-주님을 섬기고 나누고 따르는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112,1)“
오래전 애독했던 ‘니코스 카찬스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읽다가 흥미있는 예화가 있어 나눕니다.
-옛날 후궁에 많은 아내를 거느린 위대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무척 잘 생겼고, 잘 먹고, 잘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도원에 가서 고행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불쌍하다는 듯 고행자를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굉장한 희생을 치르시는군요.”
그가 말하자,
“당신의 희생이 더 커요.”
고행자는 대답했습니다.
“어째서요?”
“나는 덧없는 삶을 버렸는데, 당신은 영원한 삶을 버렸으니까요.”-
-어느 날 젊은 여자가 사막의 안토니오를 찾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고, 정성껏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 천국문을 열어 주시겠죠?”
이어지는 안토니오와 여자와의 대화입니다.
“당신에게는 가난이 부유함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아바”
“불명예는 명예가 되고요?”
“아닙니다. 아바”
“적들은 친구가 되고요?”
“아닙니다. 아바”
“그렇다면 아가씨, 지금 당신은 아무 것도 갖지 못했으니 어서 가서 정진하세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하는 일화들입니다. 덧없는 삶중에 어떻게 하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어떻게 살아야 덧없는 삶중에도 모두를 지닌 내적 부요의 삶, 영원한 삶을,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을 섬기고 나누고 따라 살면 됩니다. 어제 써놓은 짧은 깨달음의 글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 인생인데
남은 휴가 얼마 안남았는데
날마다 휴가처럼 사는데
새삼 무슨 휴가?”-
덧없이 흐르는 세월, 하루하루가 소중한 인생 휴가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가 영원한 삶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 오늘 지금 여기의 꽃자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런 진리를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영원한 삶의 비결을 말씀해 줍니다. 무지의 눈을 활짝 열어 영원한 삶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순교성인과 순교적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을 그러했습니다. 이미 살아서 끊임없이 사랑으로 버리고 비워 죽어감으로 무수한 열매를 맺기 시작한 삶이 영원한 삶입니다. 죽어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악귀는 욕망을 먹고 자란다’ 며칠전 신문에서 읽은 대목입니다. 누구나 세상 욕심중에 살면 악귀가 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다음뿐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지고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정말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에 초연한 사람들로 자기를 비워가는 무욕의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늘 사랑으로 섬기고 따르는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에 항구함이 답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섬기고 나누고 따를 때 끊임없는 자기초월의 비움의 삶, 겸손한 삶, 영원한 삶, 천국의 삶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새삼 우리의 단 하나의 영성은 “섬김servive과 종servant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나눔이 주님을 따름입니다. 섬김과 나눔과 따름중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요 아버지의 존중과 사랑이 뒤따릅니다. 저절로 나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 고백대로 살 때, 영원한 삶입니다. 자발적 사랑으로 이런 주님을 선택하여 사랑을 훈련하며 살 때 사랑의 습관화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지면서 자발적 나눔의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섬김의 표현이 나눔이요 따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갈 때 하느님의 은총은 차고 넘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스페인 출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역시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기 까지, 덧없는 삶중에도 영원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성인은 순교직전 교회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눠준후 이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리고 나타나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입니다. 영원한 삶에 활짝 눈이 열렸기에 참보물이 가난한 사람들임을 알아챘던 성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늘 현존하시는 참보물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성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시인 프루텐타우스는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며 그를 칭송합니다. 성인의 축일은 4세기부터 교회전례에 도입되고 그에 대한 공경은 널리 빠르게 확산되어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빈민과 요리사, 소방관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모든 성인이 그러하지만 성 라우렌시오 부제 역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따름으로 덧없는 삶중에도 주님과 일치되어 영원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덧없는 삶중에도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 초연한,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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