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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17. 큐티
사도행전 24:16 ~ 27
로마 총독 앞에서의 바울의 변론 (2)
관찰 :
1) 이 때 까지 있던 일에 대한 정리 - 부활에 대한 문제로 이곳에 있나이다
- 16절.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태도의 기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존재로서 자신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겸손이다. 그는 사실은 당당했다. 그러나 교만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진심이었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하는 신앙인으로서의 태도이기도 하다.
- 17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오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루살렘에는 오랜만에 오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연보를 모아서 왔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벨릭스 역시 정보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정결예법을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었음을 말하고 있다.
- 18절.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 자신이 7일간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는 것을 대제사장도 보았고, 자신을 고소하러 올라온 사두개파 장로들 및 여러 유대인들이 보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어떤 소요도 없었고, 정결예법에 따라 잘 마쳤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신에 대해서 오해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 19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문제를 일으킬 일을 행했다면, 그 당사자들이 와서 고발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은 아나니아 대제사장이 더둘로 변호사를 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자신을 죽이고자 무리들을 선동했던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정작 자신을 고발하지 않았고, 슬그머니 사라진 상황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 20절.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서 가이사랴까지 내려온 아나니아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장로들에게 자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본 것을 말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 21절.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당당하다.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이 사실이고, 확실하기에 누구의 앞에서도 이 부분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문제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을 공회에서 말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대제사장 아나니야와 사두개파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2) 총독 벨릭스의 조치
- 22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 사실 벨릭스는 잔악하지만 미련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유대 총독으로서 유대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특별히 유대교와 신흥 기독교에 대해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재판은 로마법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제사장 아나니야와 장로 그룹의 마음을 져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벨릭스는 자기 딴에는 지혜롭게 일을 처리한다고 천부장 루시아에게 그 책임을 미루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 있는 루시아가 가이사랴로 내려오면 이 일을 처리하겠다 재판을 미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가 아니라 교활한 것이었다.
- 23절.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자유를 준다. 그리고 바울의 사람들이 바울을 섬기는 것과 접촉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다만 바울을 감시하고, 그가 가이사랴를 떠나거나 허락없이 이동하는 것은 금했다. 바울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방명해야 했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시간을 끄는 작전을 펼친 것이다.
3) 유대인의 환심과 돈을 원하는 벨릭스
- 24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 “드루실라”는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누이였다. 드루실라는 A.D. 37년 출생했다. 그녀는 코마겐의 왕자 에피파네스와 약혼했지만, 에피파네스가 할례를 거부했기 때문에 파혼했다. 그 후 할례를 조건으로 에메사의 왕 아지주스와 15세에 결혼했다. 벨릭스는 미모가 뛰어난 드루실라에게 반해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 아토모스를 동원해서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다. 드루실라는 벨릭스의 3번째 아내가 되었다. 드루실라는 유대인으로서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벨릭스가 예수에 대한 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드루실라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내 드루실라의 요청으로 바울을 함께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벨릭스와 드루실라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 25절.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 벨릭스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메시지를 증거하는 바울에 대해서 두려워했다. 의, 절제의 덕목은 벨릭스가 따르지 않는 길이었고,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는 그 심판을 현재 자신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는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게 되면, 이제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현재의 삶을 포기할 수 없어서 바울의 말에 설복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반응은 “지금은 가라”였다. 안타깝고, 오히려 벨릭스가 불쌍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절호의 회개의 기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모습이다.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 26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 벨릭스는 거액의 연보를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푼돈 차원이 아니라 큰 액수의 뇌물을 받고 바울을 자유롭게 할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목적으로 바울을 불렀고,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말씀을 듣고자 바울을 만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벨릭스 부부는 끝까지 복음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 27절.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 벨릭스가 바울의 판결을 연기하기로 한 뒤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천부장 루시아가 그동안 여러차례 가이사랴에 오갔지만, 바울에 관한 재판은 2년이 지나도록 다시 열리지 않았다. 벨릭스는 바울을 풀어주게 되면, 대제사장 아나니야와 사두개파 측의 반발을 가져오게 될 것을 염려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 정도는 별 일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이사랴에 있던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이 분쟁에 벨릭스가 개입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고 투옥을 당하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그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표를 파견하여 강력한 항의를 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벨릭스가 소환되었다. 벨릭스는 그의 형 팔레스의 도움으로 형벌을 면하게 된다. “보르기오 베스도”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유능했으며, 비교적 선량한 총독으로 공정한 재판을 했고, 벨릭스와는 다르게 자신이 맡은 행정구역에서 강도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정도만 알려지고 있다. 다만 전후 사정을 모르는 보르기오 베스도에게 다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임자가 구류하여 두었고, 그 이유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기에 바울은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가르침 :
1)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고소한 대제사장 아나니야와 사두개파 장로들의 고발이 근거없는 것임을 밝혀내고 있다. 바울은 지혜롭게 대처하되 담대하게 맞서고 있다.
2) 벨릭스는 예수의 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바울을 통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지금은 말라”였다. 이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그의 영적 상태이다. 심령이 가난함이 없는 자가 자신의 영적 실체를 모르기에 범하게 되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벨릭스는 게다가 유대인들의 환심과 거액의 연보를 한 바울을 통해 뇌물을 기대했다. 이런 자의 말로는 좋을 리가 없다.
4) 새로운 총독 보르기오 베스도가 부임했지만, 여전히 바울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로마로 바울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쉽지 않은 2년의 시간 +a 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했다.
적용 :
1) 바울은 양심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의 중심을 벨릭스가 재판장으로 있는 재판정에서 담대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복음이 있기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치밀한 잣대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놓치는 것이 또한 믿음을 놓치는 행위가 된다.
2) 사도 바울이 변증하는 이 재판의 문제의 핵심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자신이 그 길을 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벨릭스 부부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그들의 귀에 달콤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가르쳤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기 보다는 복음의 핵심을 바르게 말하고 그 사람이 바른 길 가는 것을 더욱 기대했다.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의 딜레마다. 바울의 본을 통해서 말씀 사역자가 가야할 바른 길의 모범을 깨닫게 된다.
3) 벨릭스가 나쁜 사람이고, 바울을 고발한 이들도 악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임한 환란은 멈추지도 않았고, 환경이 변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서 그 뜻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설령 주님의 신실한 종 바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 가운데서 바울은 환란을 당하고 또 당했다. 환란을 피하는 것만이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 지금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사태들,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일들, 코로나 팬데믹 등등. 모든 일들을 그냥 벗어나는 것만이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