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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거돈사지(原州 居頓寺址. 사적 제168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3리 189번지)
◇시대 : 신라 말기~ 고려 초기 거돈사의 옛 터
◇유구현황 : 법천리에서 황학산 오른편 산길로 잠자울 고개를 너고 학고개를 너머서면 작은 골짜기너머로 정산면 담안리가 있는데 그 윗터에 한계산 기슭을 안고 펼쳐진 절터이다. 이 절터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한줄기가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다. 중문지 북쪽에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3층석탑(보물 제750호)이 있고 탑의 동쪽에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고 부도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 있었는데 현재 경복궁 뜰 안에 옮겨져 있다.
◇내력 : 거돈사는 신라말 안락사로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도헌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된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중심인물인 원공국사(圓空國師, 930~1018)는 속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법호가 지종(智宗)인 그는 여덟살 나이에 개경 사나사(邪那寺)에서 출가 광화사의 경천화상으로부터 공부를 했고 17세에 송악산 영통사에서 주족계를 받았다. 955년 중국 오월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의 법맥을 전수받았다. 그 후 중국 천태종 근본도량인 천태산 국청사에서‘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우고 천태종지를 가르치는 교수사가 되어 970년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정치를 표방하던 광종의 비호를 받으며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고 그의 급진적 개혁정치가 중도에 그치면서 법안종 세력도 급속도로 위축되고 원공국사도 89세인 1018년 병든 몸을 이끌고 거돈사에 이르러 임종을 맞았다. 입멸 후 현종으로부터 국사 원공으로 추증된 그는 탑비와 함께 비의 서쪽 기슭에 부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지금 거돈사 터에는 현종16년(1025) 조성된 부도비(보물제78호)만 남아 있고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은 짝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和田)가 서울의 자기 집으로 옮겨간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절터 아래 옛 정산분교 자리에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당간지주를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짐작된다.
◇양식적 특성 : 이 절터는 현재 남아 있는 3층석탑(보물 제759호)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사가 좀 센 까닭에 석축을 높이 쌓아 조성한 평지에 중문지를 만들고 이러 일탑 일금당식 가람 배치를 중심으로 동남축으로 가람을 전개하여 금당 후면 강당지 까지 회랑으로 둘러싸인 거돈사지는 삼국시대 고식의 가람배치형식을 지닌 절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중문지를 지나면 3층 석탑이 있고 바로 뒤에 기단위에 초석이 있고 정면5칸 측면 3칸의 금당터가 있고, 강당지는 초석은 없고 터만 남아 있다. 이 금당은 거돈사의 중심 건물로, 초석의 배열간격으로 보아 중심에 있는 어칸의 길이가 협칸보다 길게 되어 있고 평면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상 대좌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은 이미 금당이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조성한 후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크기가 일반 단층목조 건축으로는 불상 높이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2층 내지는 3층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당의 뒤로 낮은 석축이 쌓아 있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강당지로 추정된다. 금당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축 오른편으로 많은 건물지가 있고 절 뒤편 약한 언덕 위에 지금은 경복궁에 옮겨져 있는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서로 근접해 있어야 할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는 절의 오른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왼쪽 회랑지 끝에 이 절터 발굴에서 나온 각종 석재들이 모여져 있다. 거돈사지는 1968년 2만4천7백 86㎡의 터가 문화재보호구역(사적 제168호)으로 지정되어 1982년부터 토지매입을 시작했다. 91년까지 10여년에 걸쳐 한림대박물관이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벌인 후, 1차로 7천5백평의 사역을 정비하였다.(출처:원주시청)
중문지를 지나면 3층 석탑이 있고 바로 뒤에 기단위에 초석이 있고 정면5칸 측면 3칸의 금당터
금당은 거돈사의 중심 건물로, 초석의 배열간격으로 보아 중심에 있는 어칸의 길이가 협칸보다 길게 되어 있고 평면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상 대좌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은 이미 금당이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조성한 후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크기가 일반 단층목조 건축으로는 불상 높이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2층 내지는 3층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
우물터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재현탑
절터 발굴에서 나온 각종 석재들이 모여져 있다.
오래된 느티나무
절터 아래 옛 정산분교 자리에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당간지주를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짐작된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 보물 제78호.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44번지)
거돈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출처:문화재청)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原州 居頓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3리 188번지)
시대 :1025년(현종 16),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
양식적 특성 :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석탑이 탑신(塔身)으로 올린 형태를 보면 형식적으로는 신라 양식을 보이나, 세부적인 수법과 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초층 기단은 두단의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네모진 면석을 탱주석 없이 한줄로 세워 벽을 만들었다. 그속에 흙과 잡석을 체워 판축으로 지반을 다진 다음 면석위에 외벌대 지대석으로 마감하여 기단을 조성했다. 그 위에 석탑과 직접 연결된 기단을 세웠는데 2벌의 지대석을 쌓은 다음 긴 장방형의 면석을 4개 세우고 4조각의 기단 받침석을 포개올려 탑신 자체의 기단을 조성했다. 그런 다음 남·북쪽에 무늬없는 면석을 세우고 동·서면에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탱주석을 조각한 면석을 끼워 맞추고 사춤한 방식으로 석탑 자체 기단을 조성했다. 이탑은 탑신과 각층의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탱주가 조각되어 있을분이며 옥개석 하부는 방형의 밑받침이 점차 커지면서 5단의 밑받침으로 옥개석 하부의 경사면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이 만드는 처마곡은 거의 직선으로 보이나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있는 통일신라 양식이다.
탑의 상륜부는 사각형 노반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어 놓았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면석에 탱주의 새김, 2단의 갑석과 3단의 옥개석등으로 미루어볼 때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출처:원주시청)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 있던 것을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출처:문화재청)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 보물 제190호.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사람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현재 탑은 바닥돌이 없이 바로 기단(基壇)이 시작되고 있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출처:문화재청)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 재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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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 전부터 세운 계획을 실천하고자하여 ..., 지난 토요일(7월2일) 장마비가 오락가락하는 우중에 자랑하는 애마(소렌토)를 타고 원주지방에 있는 폐사지 3곳(법사터.법천사터.거돈사터)을 답사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비는 피하였습니다. ...>, 졸지에 <거돈사居頓寺>가 <거돈사巨豚舍>로 ... , <그래 그곳 巨豚舍에 돼지 만마리 정도있으니 오늘 돼지 실컷 구경하자. 잘하면 돼지 고기도 얻어 먹을 수 있다> 하고, 한참 웃고, 동행하였습니다.
아침에 知人에게 <거돈사> 간다고 전화하니 <거기 돼지 몇마리 키우는데
김성호 교수님 덕분에 원주에 있는 유명 寺地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