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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출 1: 1-10
여러분, 6-7년전인가 나왔던 “Prince of Egypt”라는 영화를 기억하세요. 디즈니에서 만든 모세에 관한 만화영화로 이집트의 왕자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모세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오는 출애굽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생생이 기억이 납니다.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가 몰려 오고 앞에는 홍해에 가로 막혀 있는 가운데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에 딱 꼽으니까 쏵-하면서 물이 좍 갈라지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는 장면, 참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뿐 아니라 대부분 출애굽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이렇게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얘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출애굽기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실제 그 얘기는 전체의 1/3도 채 안되고 나머지 2/3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들, 율법 얘기, 제사 얘기, 그리고 성막을 짓는 얘기들로 가득차 있어서 이런 얘기들이 출애굽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면서 실망을 하곤 하지요.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출애굽기는 그 여러가지 얘기들이 하나의 주제 안에서 기가 막히게 짜여져 있는 책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즉, 출애굽기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있고, 동시에 그 구원의 계획은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도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의 내용을 잘 알면 구약전체의 흐름을 알 수가 있고 또 신약을 이해하는 Base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전 앞으로 12월까지의 설교 계획을 세우면서 출애굽기는 한번 책 전체를 설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조금 딱딱한 설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한번 정도는 의미가 있겠다 싶기도 해서 오늘은 출애굽기 책 전체를 한번 개관해 보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는 대충 네가지의 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집트를 나오는 사건, 그리고 시내산에 도착해서 언약을 맺는 사건, 그 다음에 율법이 주어지는 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하는 사건 이 네가지 입니다. 따라서 이 네가지 사건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이 출애굽기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첫번째로 우리가 볼 사건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이끌고 나오는 사건인데 이것을 출애굽기 1장에서부터 15장까지가 다루고 있습니다. 긴 얘기를 줄이자면 이런 얘깁니다.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민을 간 이후 400년이 지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로 학대를 받으면서 삽니다. 그때 태어난 모세는 우연히 이집트 공주의 손에 들어가 이집트 공주의 양 아들로 왕궁에서 자라지요. 모세가 다 자라서 자기 동족을 도와 주려고 하다가 사람을 죽이게 되고 그래서 그 길로 도망을 가서 40년동안 목동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불러내어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겠다라고 하시지요. 그래서 모세가 가서 이집트 왕에게 하나님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십니다 하는데 그 말을 바로가 들을리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열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를 결국 항복시키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사막을 건너 시내산에 도착한다는 얘기가 1장부터 15장까지의 얘기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고나와서 시내산으로 데리고 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인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 했던것입니다. 기원전 2,000년경,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단 한명도 없었던 세상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 신앙을 심어 주신 후 이들이 한 민족이 되기까지 기다리신 겁니다. 그러구나서 때가 이르렀을 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보려고 하셨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출해 내는 과정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뭔가를 가르치시려고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수업을 하신 겁니다. 그게 뭔가 한번 살펴보고 지나가겠습니다.
1) 하나님만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시다.
첫번째 수업은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만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범신론이었습니다. 만물 하나 하나에 다 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는 것이죠. 400년동안 이집트의 통치밑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범신론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하나님도 많은 신들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것을 하나 하나 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열가지 재앙에 동원되는 그 열가지는 모두 다 당시의 신이었거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처음에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데, 그 당시 이집트 사람들에게 나일강은 신과 같은 존재였지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Control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열번째는 바로의 장남을 치는데, 특별히 바로가 이집트의 최고 신인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왜 장남을 치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즉, 너희들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있는 태양도 결국은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한분야의 신, 또는 어떤 것에는 능력을 발휘하고 어떤 분야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해시키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은 목축의 신이니까 농경을 할 때는 뭔가 다른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서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기도 하고 해서 하나님을 마음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만, 그리고 하나님이 능력있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우리들도 “이것 만은 하나님이 어쩌지 못하세요.” 하는 분야를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 만은 내 방식으로 해야 하고, 이것 만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야가 있다는 겁니다. 많지요. “딴건 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데, 자녀 교육만은 내 방식대로 해야 되요.” “딴건 다 좋은데 사업에서만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않되요. 술접대가 안좋은 것은 알지만 이것만은 이 방식이 아니면 안되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쩌지 못하는 분야를 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였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불신아닙니까? “하나님, 제가 이건 하나님을 위해서 할테니까, 이건 건드리지 마세요.” 한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신뢰하고 부분적으로 순종하고 사는 겁니다.
지난번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적이 있는데 우연히 이랜드 박성수회장이 간증자로 왔었어요. 다른 것은 기억이 안나는 데 한가지가 기억에 남아요. 이분 말에 의하면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중 장부를 안가지고 있었던 기업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중 장부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더니 모든 사람이 말렸데요. “당신 믿음도 좋고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된다. 이중 장부가 없이 정부의 세금을 견뎌 낼 수 있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그때 이분이 그랬답니다. “하나님 방법대로 해서 망했다는 소리 한번 듣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외환위기가 터지고 모든 중형기업이 다 무너졌는데 이중 장부를 안가지고 있었던 자기 회사만 외국 자본이 비젼이 있다고 돈을 대 주었답니다. 그래서 그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답니다. 아! 그 소리를 듣는데 멋지더라구요. “하나님 방법대로 해서 망했다는 소리한번 듣자.”그런데 비록 망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이 그냥 두셨겠어요? 체면이 있지. 하나님뜻대로 하다가 망했다는 소리를 어떻게 듣고 계시겠어요. 그래서 우리도 혹시 오늘 아침에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는 부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가 살펴보시고 아, 내가 이부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신뢰하지 못하고 있구나하는 것이 있으면 그 문제 정리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노예근성을 해결하기 바라신다.
두번째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훈련시키려고 하셨던 것은 노예근성의 해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뭔가하면 말이죠, 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래도 애굽, 여기가 좋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비록 노예로 살지만, 먹을 것 많고 편하고 강한 나라밑에 있으니 외적의 침입 신경써야 할 필요없고, 강제노역이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그것만 해결되면 여기가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패배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가 없지요.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와 전쟁을 시켜서 스스로의 힘으로 나오게 했을겁니다.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까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단계적으로 노예근성을 버리도록 광야의 기간을 주시는 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노예근성을 못버립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우면 모세를 원망하고,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러고, 그러다 조금 더 심해지면 하나님 원망하고.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가 없지요. 그래서 노력하고 하고 하다가 안되니까 결국 하나님은 그 세대를 포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40년을 광야에서 떠돌게 하시고 그러면서 노예시절을 경험하지 않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이 자랄 때까지, 그리고 그 전 노예세대들이 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에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사실 우리도 이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끌어 내시고, 그래서 그분의 백성으로 만드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래도 그때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 그때 뭔가 불편한 것은 있고 힘든 것은 있었지만, 그 점만 해결된다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와는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아예 처음부터 “나는 술은 못끊어.” 혹은 “이건 타고난 성격이라 어쩔 수가 없어.” “예수를 믿어도 이건 안바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노예 근성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얘기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따라서 나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죄의 노예 근성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못한다 보다 할 수있다는 생각을 가지시기 한걸음 내딪는 그래서 새로운 삶이 살아지는 것을 경험하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언약을 맺으신다.
자,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그들을 시내산까지 이끌어 오시고 그런 후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얘기가 16장부터 19장까지 계속됩니다. 특별히 19장을 읽어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별 특별한 것이 없는 구절인데, 고고학이 발전하면서 성경외 다른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은 이 19장이 그 당시의 계약, 특별히 아주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맺는 주종관계의 계약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4-6절은 서문입니다. 계약을 맺자하는 서문이 발표가 되고 나니, 7절에 중계자인 모세가 백성들에게 계약을 맺겠는가 하고 묻고, 그러니까 8절에서 백성들이 그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지요. 그래서 다시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니까 10절에 그러면 양자가 만나자 하면서 옷을 빨아입고 거룩하게 준비해라 합니다. 자, 그렇게 준비를 거쳐서 16절에보면 마침내 하나님이 내려오시고 17절에 모세는 백성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산기슭에 세우지요. 즉,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출해 내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치신 후에 백성과 하나님이 얼굴을 대면해서 계약을 맺는 겁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니, 너희는 내 백성이 되어라.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에서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조금 이상한 의문이 하나 들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고 했는데 무슨 사랑의 관계를 계약을 통해서 하나? 그런 생각이 들지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는 계약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계약이 필요한가? 바로 우리를 보호하실려고 그런 겁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한가지 한가지 행동과 생각이 너무 비뚤어져 있고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네가 요것만 하면 네 책임은 다하는 거다. 지금 그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계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계약이 되고 나면 너희는 나의 보물, 선택한 백성, 거룩한 민족, 제사장나라가 된다고 하셨지요.
3. 법의 제정
자 그런데 어떤 계약이든지 계약을 맺으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할테니까 너도 이렇게 해라하는 조건.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다음장인 20장에서 십계명으로 시작되는 율법을 주십니다. 20장 1절에서 시작한 23장까지 계속되고 그렇게 율법이 다 주어지고 난 다음에 24장에서 드디어 실제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율법은 영광의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정말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사람이 함께 하기위해서 우리가 적어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래야 하는 정의를 내리주신 것입니다. 즉, 이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사는데 우리가 해야하는 최소한의 필요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십계명과 그리고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율법의 정신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무시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이 잘못 알고 있는 것중 하나가 뭐냐하면, 율법대신에 은혜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흡사 우리는 율법이 없이 그냥 살아도 되는 것 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여전히 새로운 계약 즉 신약 가운데 살기 때문에 우리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과 구약이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 율법의 특징은 지킬려고 하면 할 수록 안지켜진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죄 많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Rule이 잘 지켜질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 수록 우리의 부족만 느껴지고 죄만 깨달아 질 뿐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0절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와 질수 없고 죄만 인식한다고 고백하지요. 즉, 율법은 우리에게 부족함만 느끼게 해 주고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줄 뿐이었지만 그런 우리에게 신약에서는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율법을 지키며 살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8:1-4절까지에서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계약의 조건은 여전히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율법을 지키고 살아야 했던 것 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차이는 하나님께서 내안에 계셔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구를 주시고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과 구약의 차이인데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650년전에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약속하셨던 얘기입니다. (예레미아서 31:31-33)
자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질문을 하나만 더 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구약의 사람들이 못지킬 것을 알면서 율법을 주셨나? 함정을 파놓고 빠지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아니예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후에 바로 그 뒤를 이어서 제사 규정을 주시는 거에요. 즉 법을 깨뜨릴 때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시는 겁니다.
자,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거룩해 진 후에 하나님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거룩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상당기간 참석하고서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영접할 자격이 있나? 하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면 어떻하나 하는 염려입니다. 당연한 염려지요. 그런데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지킬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또 능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내가 크리스천이 되기로 마음먹고 예수님을 영접할때 하나님이 날 괜찮은 크리스천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아직 부족함이 느껴지더라도 자신있게 예수님앞으로 나아오시는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4. 성막을 지으심으로
자, 이렇게 구원해 내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제정하시고, 그리고 난 후에 출애굽기에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성막을 지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 성막을 지으라는 지시를 받는 장면과 그것을 실제로 짓는 얘기를 끝으로 출애굽기는 끝을 맺습니다. 자, 그러면 성막을 지으라는 의미는 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함께 사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제 언약을 맺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었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너희 가운데 살겠다 하는 겁니다. 하지만 물론 죄많은 사람들 사이에 거룩한 하나님이 거하시려고 하니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제한을 많이 두십니다. 지성소, 성소, 뜰을 구분해 놓아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섣불리 대하지는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째튼 부족한 우리와 같이 사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바로 이 성막입니다.
이런 우리와 함께 사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결국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완전해 집니다. 우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지성소,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막을 제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27:50-51)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는 그 막이 찢어지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고, 그 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서 우리와 함께 살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소원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막을 출애굽기에는 증거막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그 이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막은 증거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성막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계약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산다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고린도 후서 1:22절에서 성령의 우리의 구원에 보증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이 새로운 계약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본것처럼 하나님은 기원전 1500년경 출애굽기에서 하신 말씀 하나하나를 신약에서 신기할 정도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1600년에 걸쳐서 40명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스승과 제자의 사이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BC1500년에 쓰여진 얘기와, BC650년에 쓰여진 얘기와, 그리고 기원후 1세기때 쓰여진 얘기가 이렇게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이루어 질 수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얘기는 사람이 지어낸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애타는 기록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본 이 네가지 사건, 구원해 내고,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시고, 그리고 성막을 지으시는 이 사건중에 어떤 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도로 이루어 진것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우리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오셔서 사시는 이 사건 중 어느것도 우리의 주도로 된 것은 없습니다. 저는 출애굽기의 이 얘기와 오늘날 우리의 구원과 이렇게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금부터 3500년전에 이 출애굽기에 그 구원의 계획을 적어놓으셨구나. 이 출애굽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에 계획에 동참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한 교회성장
출 1: 1-14
출애굽기의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저자가 모세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견
도 없습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인 반면에 출애굽기는 구원의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이 애굽에서 핍박을 당하고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말미암아
출애굽을 하게 되고, 광야에 40여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영적인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더 나아
가 그들은 야곱의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법률과 조직을 갖춘 하나의 국가로 성장
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그린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에는 특별히 많은 모형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애굽기의 모형
을 잘 이해를 해야 신약성서에 나타난 중요한 교리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
니다. 출애굽기에는 수 없이 많은 모형이 있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로 애굽은 세상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노예로
삼고 하나님 백성을 타락시키기 원하는 그런 세상의 모형이 바로 애굽입니다. 바로왕
은 무엇의 모형입니까? 사단의 모형입니다. 그는 이 세상 신의 모형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경배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노예로 삼는 주체가 됩
니다. 바로는 사단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세상의
핍박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광야같은 영적인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을 체험하는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모세는 누구의 상징입니까? 그리
스도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내는 구원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네 가지 모형을
마음속에 생각을 하고 출애굽기의 내용을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의 내용은 세 가지로 구별이 됩니다. 1-7절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입니
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다른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
으로 처음 올라올 때에는 남자가 70명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400여년의 세월이 지
나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늘어나서 국가를 형성해도 족할 만큼
그런 숫자가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1-7절에 기록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8-14절까지는 애굽의 새로운 왕이 일어났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
굽을 다스리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왕은 요셉을 알지 못합니다. 요셉
이 애굽에 와서 애굽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애굽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을 때
에 어떻게 은혜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애굽의 새로운 바로왕은 힉수
스족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북방에서 쳐들어 와서 애굽을 점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요셉이 애굽에 베푼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바
로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반란군과 연합을 해서 애
굽에 반란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한 것입니다. 이것이 14절까
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5절부터는 핍박만으로는 부족해서 애굽에서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를 모두 죽이려
고 하는 새로운 전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왕이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산파에
게 너희는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산할 때에 여자자이거든 살려두고 남자아이면 다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산파들은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라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왕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여자
들은 애굽과는 달라서 도착하기 전에 애들을 낳아서 죽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의 편을 확실하게 들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
게 여기시고 산파들의 집을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왕이 이 산파들로는 이스라
엘 백성을 죽일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남자가 나거든 너
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
고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말씀은 출애굽기 1장 12절입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
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학
대하고 핍박하고 진멸하고 죽이려고 하면 희한하게 더욱 더 번식하고 창성하고 늘어나
고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학대든 고난이든
핍박이든, 그것이 도리어 번식하고 창성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성경 창세기의 말씀에 따르면 뱀의 후손과 여자
의 후손으로 갈라집니다. 뱀의 후손은 불신자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뱀처럼 교활한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고 잔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뱀의 후손이 승리하고 여
자의 후손들이 패배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시게 되면 전세가 역전됩니
다. 하나님은 언제나 개입하시면 저주를 바꾸어 축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모압왕 발락이 술사 발람을 고용해서 뇌물을 주고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
주하라 하지만 발람이 입을 열어서 저주하려고 할 때 도리어 발람의 입이 축복의 입으
로 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고 해도 하나님은 도리어 그것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
입니다.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고 핍박하고 없애버리려고 해도 하나님
은 도리어 그것을 번식하고 청성하고 부흥케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명백한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고난
과 어려움과 핍박이 도리어 축복과 부흥과 성장의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제 맞이하게 되는 2005년은 어찌 보면 밝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해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기근이 만연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서 수만 명
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국내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우리가 겪고 있습니
다. 그러나 아무리 2005년에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것을 바꾸어서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표어 가운데 실천사항 하나가 ‘대 부흥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
은 어려운 시대에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부흥을 기대하며 기도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받으면 도리어 번창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세
가지로 입증이 됩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입증된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의해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에 와서 처음에는 잘 살았습니다. 고센 땅에 정착을 해서 애굽의 온갖 좋은 음식도 먹
게 되었고, 애굽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애굽의 문화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서는 애굽의 신까지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
성이 번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반란군이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를 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울 생각으로 계획을 낸
것이 바로를 위해서 국고성을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국고성이라고 하는 것은 양곡을
저장하는 성입니다. 바로왕은 비돔과 라암셋이라고 하는 두 군데 국고성을 짓기로 합
니다. 한 군데에 아예 크게 짓지 않고 두 군데로 나눈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힘을 양
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만 골라서
시킵니다. 흙이기기, 벽돌 만들기 등의 고역을 시키고 무서운 감독을 두어서 채찍으
로 다스리며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쇠잔케 하
고 힘을 쇠약하게 해서 결국은 아무 힘이 없어서 반란을 일으킬 수 없는 그런 백성으
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바로왕의 계획을 어떻게 바꾸셨습니까?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좋은 훈련의 기회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왕의 이 핍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는 도리어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고센 땅도 싫어하게 되었습
니다. 애굽과도 정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애굽은 우리가 살 영원한 땅이 아니구
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하신 땅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땅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출 3장 9절에 보니까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
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상달되
는 기도를 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땅에 떨어지는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
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야 응답
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식이 가야 답이 올 것 아니겠습니까? 가다가 말면 무
슨 답이 오겠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응답받기 원하시는 기도제목이 있으시
다면 그것이 천국에 상달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며 부르짖은 것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정을 떼고 가나안을 사모하며 간절
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얻고자 했던 목적이었습니다. 바로왕은
핍박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이 그래도 더욱 번성하자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습
니다. 바로왕은 태어난 남자아이는 모두 하수에 던져 버리라 했습니다. 개도 나면 하
수에 던지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것을 물에 던져 죽이라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조치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로 말미암아 누구를 일으켜 세워주
십니까? 모세라고 하는 위대한 구원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갈대상자
에 넣어서 모세를 물에 던졌습니다. 갈대상자가 떠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로의 공주가
그곳에서 우연히 목욕을 하다가 갈대상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의 공주는 모세가
히브리인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데려다가 기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애굽 최고의 궁중교육
을 받게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위대한 구원자 위대한 참 하
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도리어 구원자를 일
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사단의 상징인 바로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멸망시키
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도리어 최고, 최선의 결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이것이 하
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울 때에 뱀의 후손이 이기는
듯하지만 하나님이 그 현장에 개입을 하시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는 사실이 이스라
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2. 기독 교회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천년의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서도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쉽
게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강림해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흥되니까 따라오는 것
은 핍박과 순교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주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 당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을 당하고
사도들을 제외하고 온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이방나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과 사마리아로 복음을 증거하면서 도리어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습
니다. 사도행전 8장에 사마리아성의 부흥도 스데반의 사건 이후에 사마리아로 갔던 빌
립집사를 통해 일어난 것이고, 사도행전 11장에 나타난 안디옥 교회의 부흥도 스데반
의 일로 인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난 이후에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이 헬라
인에게 복음을 증거 하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핍박해도 하나님은 부흥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입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일어난 수많은 핍박 사건들은 교회는 잔멸하고자 했습니다. 로
마의 열황제가 교회를 잔멸하고자 핍박을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로서 분명히 말씀드
릴 수 있는 것은 교회를 핍박한 열명의 황제는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러나 교회는 도리어 핍박 가운데 더 왕성하게 부흥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너무
나 편안하면 도리어 부패합니다. 그러나 핍박과 환란과 어려움이 오면 오히려 부흥하
고 영적인 유익을 얻습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는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
다. 교회는 핍박을 받으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음
부의 권세를 흔듭니다.
교회는 핍박을 통해서 세상과, 타락한 교회와도 분리되고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종
교개혁은 핍박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1517년에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에 걸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살펴보면 그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21년에 교황과 로마황제가 소위 보름스 칙령이라는 것을 발표했습
니다. 그 내용을 쉽게 이야기하면 마르틴 루터의 목은 누구라도 쳐도 좋다는 것입니
다. 루터를 죽이는 자는 살인자가 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로마제국에서 상을 받는 그
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핍박 중에 참 진리를 찾고 위대
한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룩한 존 칼빈도 그냥 개혁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1536년에 젊은 나이로 그 위대한 기독교 강요라고 하는 책을 써
서 그것으로 제네바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개혁을 하려니 개혁
이 됩니까? 온갖 반대파가 일어나서 칼빈은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독일에서 3년
간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의 개혁을 이끌기 위한 적임자로 칼빈 만한 사람
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3년 만에 다시 한번 칼빈을 불러오게 되었고 그래서
위대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지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핍박이 오면 도리어 개혁되고 도리어 발전되고 도리어 순수
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핍박을 통해서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가 됩니다. 가라지
는 핍박을 통해서 교회를 떠나게 되고 알곡은 더욱더 교회에 붙어 있게 되어서 그 결
과 교회는 더욱 순수해지고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괴뢰군들이 쳐들어 와서 강남
중앙침례교회에 기관총을 들이대고 “이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겠소,” 하면 여러
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면
가라지들은 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라지들은 핍박이 오면 배교하고 믿음을 떠납
니다. 그러나 알곡들은 핍박이 올수록 더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수
해지고 경건성을 더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회개하며 “하나님 무엇 때문에 핍박이 왔습니까? 우리에게 죄가 있지 않습니
까?” 하고 기도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려하기 때문에 경건성
의 향상이 오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면 신앙의 위인도 나옵니다. 영국 사람들은 자기 교회의 역사에 순교당한 사
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모아서 기록을 해서 ‘팍스의 순교사’라고 하는 책으로 만들
어 냈습니다.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다음으로 그 책을 많이 읽습니다. ‘아 우
리 조상들이 예수 믿다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구나, 이렇게 인내했구나, 이렇게 자기
를 부인했구나, 이렇게 헌신하고 희생했구나.’ 하는 것을 읽고서 후손들이 신앙을 배
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과 환란과 고난은 사단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손을 거치면 도리어 정금 같은 보석으로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2000
년 역사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환란이 오든 고난이 오든 핍박
이 오든 어려움이 오든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
회는 그런 것을 통해서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요동해도 두려
워하지 마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005년도에 국내외로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여러분은 요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어려움 가운
데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성도 개인의 삶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세 번째로 이 진리는 성도 개인의 삶을 통해서도 입증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어려움이 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디모데 후서 3
장 12절에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
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내가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어려
운 일이 많은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것인
가?”고 묻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욕망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여러 가지 핍박과 어려움 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안한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핍박의 원인도 많
습니다.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가족들이 핍박을 합니다. 복음 전한다고 핍박합니다.
왜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당신들은 예수 믿으라고 하느냐고 핍박을 합니다. 제가 미국
에서 목회를 할 때에 “당신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죄사함을 받습니
다.”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성질을 내면서 “나는 불교신자이지만 당신에게 불교
믿으라고 안하는데 왜 당신은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는가!” 하고 성질을 내는 것이
었습니다. 복음 전한다고 성질을 내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핍박하고, 아내가 기
도 열심히 한다고 핍박하고, 왜 새벽마나 교회 가서 기도하느냐고 핍박합니다.
또 핍박하는 주체도 많지 않습니까? 황제가 핍박을 하고 불신자가 핍박을 하고 심지어
는 가족이 핍박을 합니다. 같이 예수 믿는 성도끼리도 코드가 안 맞는다고 핍박을 합
니다. 그러나 어떤 누가 어떤 환란과 핍박을 우리에게 준다고 할지라도 환란과 핍박
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환란당하고 핍박당하는 성도를 향한 주님의
말씀 가운데는 부정적인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
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팔복 가운데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이 아닙니까? 복 중에 최고의 복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복이라 했습니
다. 여러분 예수 믿다가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예수 믿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
로 인해서 어려움이 초래되셨습니까? 그것은 최고로 기뻐할 팔복중의 가장 최상의 복
을 받고 있는 것인 줄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로 12
절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
음 6장 22-23절에도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
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
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아무 환란과 핍박과 고통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일
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삶에 핍박과 환란과 세상의 박대가 오면 말씀 그래도 기
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프리카고 사냥 휴가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실컷
사냥을 하고 잘 놀다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배의 특등 칸에 다 타고 좋
은 음식도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자면서 보내고 뉴욕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도착을 하
니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군악대는 연주를 합니다. 뉴욕 시민이 다 나와서 국기를 흔
들고 뉴욕 시장이 환영연설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간 후에 아프리카
에서 40년을 사역하다가 온 선교사가 한 명이 헌 가방을 들고 내려갑니다. 누구하나
맞아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하나 팡파르를 불어주는 사람도 없고, 국기 하나 흔들어 주
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선교사는 ‘40년 선교를 했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박대를
받는가? 나도 차라리 대통령이 한번 되어봤으면’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날 밤에 모텔
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납니까? “하나님 나는 인생을 잘못산 것이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40년을 선교해도 아무도 반기지 않는데 저 루즈벨
트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으니 내 인생은 잘못 산 것 같습니다.” 하며 울고 있는
데 주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얘야 너는 아직 고향에 온 것이 아니니라.” 하
는 주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주님의 그 음성에 그 선교사는 위로를 받았다고 하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오는 핍박이 클수록 천국의 상이 큰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
니다. 우리는 2005년에 여호와의 대사를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대 부흥을 이루기
를 원하고 대 도약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고 대 화합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이 없이, 어려움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를 위
해서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함께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결단이 없이는 이루
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의 영광, 승천의 영광,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시는 영광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거친 뒤에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핍박과 환란과 고난을 거치면서 부흥하는 것입니다. 우리
에게 내적인, 외적인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흥
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
인생 살다가 환란이 와도 아무 의지할 신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지옥에
떨어져도 건져줄 구세주가 없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참으로 가련한
사람은 도와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예수 믿지 아니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
를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 믿으시기
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환란이 변하여 축복이 됩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
이 됩니다. 베옷을 입을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띄워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시기 때문인 것
입니다.
여러분, 2005년은 하나님이 일마다 때마다 여러분의 돕는 자가 되시고, 여러분의 모
든 어려움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
리교회도 핍박과 고난가운데에서도 “여호와의 대사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어 대부흥
이이루어지고 대도약이 이루어지며 대화합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난 받을수록 강한 믿음
출 1: 1-14
새 해 들어 두 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는 ‘예수님의 비유’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는데, 금년에는 출애굽기를 강해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신구약의 말씀을 골고루 전하고 싶은 마음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거룩한 성극에 비한다면 물론 제 1막은 구약이고 제 2막은 신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1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이고, 신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두 가지 사건은 쌍봉낙타의 두 봉우리처럼 신구약 성경에서 높이 솟은 두 봉우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크로스웨이’라고 하는 성경공부 교재의 그림으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같은 구속적인 사건을 출애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켜 눅 9:31에 보면 ‘별세’라고 했는데, 실제적으로 이 말은 ‘출애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의 사건들은 둘 다 시종일관한 주제 즉 ‘구출’(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의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새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가 구약의 출애굽기를 상고해 보는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강해하는 중에 우리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제 2책’ 혹은 ‘EXODUS 곧 탈출 혹은 출발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연속이며, 모세가 기록한 책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맺으신 언약을 기초로 큰 민족을 이루시고, 그들을 통해서 천하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과 소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18장은 노예가 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게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19-40장은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그들에게 두신 소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큰 민족으로 창성케 된 과정과 애굽 왕 바로의 노예로 전락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스라엘의 창성
1-5절을 보면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 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간 그의 가족은 모두 70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왜 그 가족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까? 그 이유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아들 요셉의 초청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 때문에 바로의 은총을 입어 고센 땅 라암세스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고센 땅은 애굽의 동북에 있는 변방으로 아주 넓은 목초 지대였습니다. 그곳은 물을 끌어 대기가 어려워 농사를 주로 하는 애굽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축하기에는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애굽 사람들은 짐승을 키우는 것을 가증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 사람들과 격리된 가운데 신앙을 지키며 자치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가나안 땅에 비하면 모든 환경이 너무도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매우 번성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창성케 되었습니까? 6-7절에 보면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80년 동안 총리로 지내다가 110살에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과 모든 형들도 죽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이스라엘은 자손들은 번성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져서 온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신 1:46에 보면 출애굽 할 때 인구가 20세 이상 장정만 603,500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여 200만이 넘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70명이 430년 만에 200만이 되는 것은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큰 민족을 이루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이삭과 야곱에게도 그 후손을 심히 번성케 하고, 땅의 티끌같이 동서남북에 편만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그 후손들을 심히 번성케 하고, 창성케 하셨습니다. 요셉 시대의 사람들은 다 사라졌고, 요셉을 알던 왕들도 다 죽어 피라미드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심히 창성하여 땅의 티끌같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을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민족들이 다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영적인 무지와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어두운 시대에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에 남다른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남달리 출중합니까? 그렇다면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큰 민족적인 기대나, 사회적인 기대나, 세계적인 기대나, 복음적인 기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병석에서 골골하다가 건강해져서 아주 튼튼해졌다면 이는 죄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가난하다가 안정되어 어느 궤도에 올라 이제 먹고 사는 것에 걱정이 없다면, 이는 방탕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은혜를 받아 감격과 축복 속에 있다면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연후에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다면, 우리에게 오는 축복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우리가 받는 축복 이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하심과 목적하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축복을 손에 들고 “하나님이여! 무엇 때문에 내게 이것을 주셨습니까?”라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 가정에 이 축복을 주셨습니까? 왜 내 자녀에게 이 축복을 주셨습니까? 왜 내 건강에 이 축복을 주셨습니까? 왜 물질생활과 사회생활에 이 축복을 주셨습니까?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물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주신 것이라는 대답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여러분은 그 축복을 가지고 오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받은 바 축복가지고 오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민족과 시대와 사명을 위하여 값있고 보람 있게 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로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을 위해 대단히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애굽을 건져낸 사람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밀어닥친 그 무서운 7년간의 대흉년을 극복할 수 있게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란 요셉이 애굽에 끼친 업적을 인정치 않는 새로운 왕조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애굽의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들어선 제 18왕조를 가리킨다고도 하고, 18왕조를 몰아낸 19왕조라고도 합니다. 힉소스 왕조는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으로 애굽 왕을 몰아내고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셈족인 요셉과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인들이 이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제 18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그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이 누리던 모든 특권을 박탈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왕이 두려워한 점이 무엇입니까? 9-10절에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창성하는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자손들이 쫓겨난 힉소스 왕족들과 합세하여 애굽을 대적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도 애굽 사람들과 같지 않고, 문화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욱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묘책을 구하던 중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경제건설에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강제노동을 시키고 괴롭혀서 번식을 억제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모든 특권을 상실하고 바로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왕은 이들 위에 감독을 세우고, 국고성인 라암셋과 비돔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3. 학대를 받을수록 창성해진 이스라엘
그런데 중노동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당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에 보면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몸과 마음이 더욱 튼튼해졌습니다. 양만 치다가 힘든 운동을 하니 몸이 더욱 건장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노동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했으나 오히려 더욱 번성하고,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왕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엄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13-14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엄하다는 말은 ‘산산조각을 내다’, ‘부수다’는 뜻으로 노예와 같이 철저히 부려먹고, 조금이라도 말 안 들으면 사정없이 때려죽일 만큼 잔인하게 학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벽화 중에는 나체가 된 노예들이 땅에 엎드려 있고, 가죽 채찍을 든 감독들이 사정없이 내려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그림 중에는 “내 손에 채찍이 있다. 게으르지 말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애굽 왕이 얼마나 잔혹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흙이기, 벽돌 굽기, 운하를 파고 댐을 건설하는 일, 또 높은 곳으로 물을 퍼 올려 농장에 물을 대는 일도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대 절대 군주들은 노예들을 이런 일에 엄청나게 동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운하를 팔 때 동원된 인원이 15만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 2만 명의 노예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애굽의 그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것을 쌓을 때도 수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을 때, 그 백성은 번성하였으며 자꾸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이러한 고통 속에 두셨습니까? 이스라엘은 300년 이상 애굽에서 살면서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애굽에 머무르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떠나야 함을 알도록 깨우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심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박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끼리 합심하게 되고, 민족의식과 동포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야 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날 마음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모세 한 사람을 키우시고, 출애굽의 대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조상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변개치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참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작정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환란을 당하는 것은 저주도 아니고 버림받은 것도 아니라 바로 애급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 부채질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환란을 당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아 신앙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환란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기도를 찾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태평이나 개인주의로 살았으나 환란을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똘똘 뭉쳐 단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환란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고, 환란은 잃어버렸던 기도를 찾고, 환란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백성의 단결을 찾는 촉매가 되어 필경은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축복 준비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해갔습니다. 마치 불이 나서 두드리면 불씨가 사방에 번지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더 더욱 번창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통과 시련이 부딪혀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쇠약해지지만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역경이 부딪혀올수록 더 강성해집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어쩌면 우리 그리스인의 생애는 ‘그러나’의 생애일지 모릅니다. 고난과 역경이 닥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무너져 내리지 아니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오히려 더욱 힘차게 일어서는 모습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인생은 삶은 달걀과 같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오거나 고통을 기념하는 날이면 삶은 달걀을 먹는다고 합니다. 더욱 인상 깊은 것은 그들의 결혼식에도 종종 삶은 달걀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대개 뜨거운 불 위에서 끓으면 끓을수록 액체로 변하는데 그러나 오직 달걀만은 끓으면 끓을수록 단단하여 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스런 날이면 삶은 달걀을 먹으며 자신의 삶에 용기와 힘과 소망을 얻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인은 고난이 오면 약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경 속에서 더욱더 강하여집니다. 고난 중에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실패 중에도 낙심치 아니하며 오히려 힘차게 불행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고 성공과 승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은 런던의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켐브릿지 대학에서 청년기를 보냅니다. 그는 21세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너무 과로한 나머지 44세가 되었을 때에 두 눈을 완전히 실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역경 속에서 절망하지 아니하고 어린 조카딸에게 소설을 구술해서 받아 적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쓴 작품이 건강할 때 쓴 작품보다 더욱 많았으며 대표적인 작품이 나왔습니다. 그때 쓴 글이 유명한 ‘실낙원’이나 ‘복락원’같은 소설입니다. 그리스의 유명한 전기 작가인 푸루타코스는 “인간의 위대성은 그가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고난당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건강문제 직장문제로 생활고로 어려우신 분이 있습니까?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고난에 함께 하시며, 고난 받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이기도록 돕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고 환난을 만나거나, 역경을 만나거나, 사방에 우겨 쌈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거나, 꺼꾸러뜨림을 당하더라도 한겨울의 송죽과 같아서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딸들의 위치를 지키고 늠름한 모습을 과시하는 성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이 찾아 올 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으로 이끄시는 지름길일 수도 있습니다. 밤이 캄캄하면 새벽이 가까워 온 법입니다. 겨울이 혹심하면 혹심할수록 봄이 가까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환란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란 때문에 연단을 받고 더 큰 축복을 받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이것이 진정 참된 신앙인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더욱 믿음이 강하여 지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