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 운동](24) 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22.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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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24) 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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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9. 22:47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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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女工들 핏빛절규 ‘유신 몰락’ 고하다
경향신문 입력 : 2003-09-28 18:54:01
1979년 8월11일 새벽 2시, 서울 마포 신민당사 주위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길게 세번 울렸다. 이른바 ‘101호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조명용 소방차 2대에서 쏟아진 불빛이 당사를 포획하듯 환히 비추자, 당사를 에워싸고 있던 1,000여명의 정·사복 경찰관들이 일부는 정문을 통해, 일부는 당사 뒤쪽에서 2대의 고가 사다리차를 타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듯 밀어닥쳤다. 현관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고함과 비명소리가 터져나왔고, 건물 내부는 연막 가스탄으로 뒤덮였다.
180명의 YH무역 노동자들이 농성중이던 4층 강당에는 사복 경찰들이 먼저 진입하여 열려 있던 창문을 막아섰다. 투신을 막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기동경찰 수백명이 들이닥쳐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며 계단으로 끌어냈다. 격앙된 몇몇 노동자들이 깨진 유리 조각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중과부적, 10여분 만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나갔다. 이 아비규환의 와중에 농성 노동자 중 한명이었던 김경숙이 희생당했다. 김경숙은 당사 뒷마당에서 왼팔 동맥이 끊긴 채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새벽 2시30분쯤 숨졌다. 항의의 뜻으로 동맥을 끊었다가 진압 도중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총재실과 회의실이 있던 2층은 상황이 더욱 험악했다. 출입문이 열려 있음에도 “돌격! 죽여!”라는 소리와 함께 사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벽돌로 벽을 깨부수고 들이닥쳤다. 저항하는 당원들을 곤봉과 주먹질로 가볍게 제압한 그들은 회의실에 모여 있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10여명의 국회의원, 기자, 당원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무차별 구타했다. 벽돌과 화분, 커피 병, 철제 의자가 어지럽게 공중을 날았다.
“총재는 때리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지더니 곧이어 “키가 작고 안경 쓴 놈이 황낙주다!”라는 소리와 함께 원내총무 황낙주가 이들의 구둣발 밑에 깔렸다. “저 놈이 박권흠이다!”. 대변인 박권흠은 손이 뒤로 꺾이면서 피범벅이 되도록 얼굴을 난타당했다. 당 청년국장은 실신할 때까지 두들겨 맞았고, 어떤 당원은 오른팔 동맥이 끊겨 선혈이 낭자했다. “까불면 다 죽인다”는 방침에는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분증을 내보였으나 “기자고 지랄이고 입 닥쳐!” “신문기자 좋아하네” 하는 욕설과 함께 무전기와 곤봉,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사진기도 박살났고 필름도 빼앗겼다.
이렇게 하여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이던 YH무역 노동자들을 끌어내는 101호 작전은 23분만에 끝났다. 야당 당사가 이토록 노골적이고도 야만적으로 짓밟힌 것은 30년 헌정사에 처음이었다.
YH 노조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시작한 것은 진압 이틀 전인 8월9일 오전 9시쯤이었다. 3월30일 회사가 폐업을 공고한 이후 넉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하고 항의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는 각오로 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YH무역은 개발독재의 특혜 아래서 성장한 전형적인 수출의존형 기업이었다. 사주 장용호는 뉴욕 한국무역관 부관장직에 있던 1966년, 자본금 1백만원으로 왕십리의 한 콩나물 공장을 빌려 종업원 10명의 작은 가발공장을 시작했다. 때마침 가발 수출이 최대 호경기였던 데다 정부의 수출 우대정책, 특혜금융에 힘입어 YH는 설립 2년만에 면목동에 대지 2,700평의 공장을 새로 지었으며, 70년에는 수출실적 1백만달러, 종업원 4,000여명의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수출 순위 15위를 기록하고 12억7천만원의 최대 순이익을 낸 바로 그해부터 YH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영진의 파렴치한 외화 도피와 자금 횡령, 부실 경영 때문이었다.
창업주 장용호는 70년 동서인 진동희에게 YH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상당한 돈을 빼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현지에서 호텔과 백화점을 경영하는 한편, YH 제품을 판매하는 상사를 설립하여 YH로부터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외화를 빼돌렸다. 그가 그런 식으로 착복한 돈은 5억원에 달했다. 동업자인 진동희는 진동희대로 사원 상여금으로 10억원을 주었다고 허위 장부를 만든 뒤 그 돈을 빼돌려 73년 대보해운을 설립했다. 가발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드는데도 경영진들은 대책은커녕 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여, 재정관리 이사부터 하급 간부에 이르기까지 회사의 기계를 빼돌려 하청업체를 차렸다. 은행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가운데 진동희는 76년 아예 대보해운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신 경영을 맡은 고용 사장 박정원은 오리온전자를 인수하는 등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74년 6억원이었던 은행 부채가 79년에는 무려 40억원으로 불어났다.
YH는 외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해서 가공한 다음, 다시 수출하는 임가공 업체로서 가공비가 이윤의 주된 창출원이었다. 가공비에서 임금을 최소화하여 이윤을 남기는 만큼 임금 수준과 근로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2억7천만원의 순이익을 낸 70년의 경우, 노동자들이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받는 임금은 월 1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
도급제와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75년 6월 노동조합을 설립했고, 성실한 활동으로 단시간 내에 70년대 민주노조 대열에 끼었다. 그러나 77년부터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된 회사는 이듬해 말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노조는 회사와 협조하여 정상화 대책을 세우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회사는 79년 3월30일자로 폐업을 공고했다. 이후 4개월간 노조는 부채 상환 연기를 통한 회사 정상화나 3자 인수를 통한 고용 승계를 목표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이 하기 싫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냉담한 답변밖에는 얻지 못했다.
8월1일부터 기숙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던 노조는 폐업철회 투쟁 때부터 연계를 가지기 시작한 사회선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종교단체와 인권단체, 재야인사와 협의하여 신민당 당사로 농성 장소를 옮기게 된다. 이때의 심경에 대하여 당시 노조 지부장이었던 최순영은 “동일방직이 처참하게 깨지는 것을 보면서, 이왕 깨질 거라면 확실하게 왕창 깨져서 다시는 당국이 민주노조에 손댈 엄두를 못내게 하겠다는 결심이었다”고 말한다. “마포대로변에 있고 내외신 기자가 상주하는 야당 당사가 가장 파급효과가 클 것이고 그러면 위축된 노동자나 민주세력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장렬하게 산화할 각오를 하고 신민당사에 들어갔던 YH 노동자들은 경찰이 진입하기 몇시간 전 마치 유서를 쓰듯 ‘노조 종결대회’를 열었다. 그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렸으며,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라며 오열했다.
YH의 폐업은 70년대식 개발독재, 수출 주도 특혜경제의 파탄에 다름 아니었으며, 경찰의 야만적인 폭력은 유신체제가 이제 폭력 이외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민중의 정당한 요구에 대응할 수 없음을 자백한 것이었다. 열세살에 고향을 떠나와 ‘공순이’가 되었고, 더운 여름 아이스케키 하나 값까지 아껴 동생의 학비를 보냈던,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해서 어린 노조원들을 살뜰히 보살폈던 김경숙의 처참한 죽음은 역설적으로 유신체제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말해 주었다.
서울시경은 8월17일 노조 지부장 최순영, 부지부장 이순주, 사무장 박태연, 그리고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목사 인명진·문동환·서경석, 교수 이문영, 시인 고은 등 모두 8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YH 사건은 순수한 노사분규를 악의적으로 정치문제화하려는 외부의 충동질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는 게 정권의 인식이었다.
신민당은 당사 침탈에 항의하여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는데, 이 와중에 김영삼에 대한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제기되어 정국은 더욱 긴장상태로 치달았다. 9월8일 법원이 이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데 이어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런 가운데 10월16일에는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이는 순식간에 부산·마산 지역의 광범위한 민중 봉기로 확산되었다. 그로부터 10일 뒤, 박정희는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유신체제를 가격하는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YH 공장 현장서 24년만에 원혼굿판
YH 노동자들이 윤형주의 노래 ‘조개껍질 묶어’의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는 ‘노가바’(기존 곡에다 다른 가사를 붙인 노래)는 당시 상황과 노동자들의 분노를 잘 보여준다.
“장용호 회장님은 탈법으로 돈 빼내어/ 미국에다 공장 짓고 백화점도 차렸다네/ 면목동 공장에는 빈털터리 끌어안고/ 은행 빚이 자산보다 두 배 정도 된답니다// 뼈빠지게 돈벌어주니 미국으로 가져가고/ 노동자는 내몰라라 팽개치고 오지 않네/ 500명 노동자는 어디서 먹고 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살 방법이 막연하네”
이런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신민당사에 들어갔다 경찰에 끌려나온 YH 노동자들은 감옥으로 향한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당국이 마련한 귀향 버스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숨진 김경숙은 가족과 경찰, 회사 관계자만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진 뒤 화장되었다. 이후 당시 노조 지도부가 주축이 된 YH동우회는 김경숙추모사업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경찰의 방해로 번번이 무산되었고, 1989년에서야 비로소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 가묘를 세울 수 있었다. 86년에 열린 ‘김경숙 열사 추모집회’는 이듬해 여성 노동자의 대표 조직인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설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올해 9월20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옛 YH무역 가발공장 건물에서는 24년전 숨진 김경숙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굿판이 벌어졌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산재보상금을 모아 설립된, 직업병 노동자 등을 위한 전문병원인 녹색병원이 이 건물에 입주하면서 마련한 것이었다. 이 건물은 YH 폐업 뒤 그동안 일반 병원 등으로 사용되었다.
수용소나 다름없었던 기숙사 건물 3동 가운데 하나는 병원 건물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주차빌딩과 연립주택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개원식 참석을 위해 오랜만에 현장을 방문했던 당시 노조 사무장 박태연은 “건물 골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만 바뀌었더라”면서 “병원 목적이 YH 노동자들의 염원과도 연결되는 만큼 잘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출처] [실록 민주화 운동](24) 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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