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황해도 - 개성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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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4. 21:04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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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어제와 오늘
장단을 지나 40리를 가면 개성이다. 1955년에 개풍군과 장풍군, 판문군을 만든 뒤 개성시와 이들 3개 군을 한데 묶어 광역 행정구역인 개성직할시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천마산ㆍ수륭산ㆍ대둔산ㆍ화장산 등이 솟아 있고, 풍덕평야ㆍ삼성평야ㆍ신광평야 등이 펼쳐져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진봉산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진봉산 철쭉이라고 한다. (······) 천마산(송악의 북쪽에 있다)은 모든 봉우리가 높고 험하여 하늘을 찌르는 듯한데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서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풍속」조에는 “고려는 기자의 유풍(遺風)을 익혀서 주몽의 옛 풍속을 어루만진다. (······) 천성이 인(仁)하고 유해 죽이는 것을 싫어하여 짐승을 도살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성은 고려 500년 사직의 도읍지로서 송악산1)이 진산이고, 그 아래가 궁궐이 있던 만월대2)다. 『송사(宋史)』에 큰 산에 의지하여 궁전을 지었다는 곳이 곧 이 지역이다. 김관의는 『통편(通編)』에서 이곳을 “금돼지가 누워 있는 곳”이라 하였고, 도선은 이곳을 “메기장 심는 밭”이라고 하였다.
개성 남대문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그 당시 개성의 주민이 13만 호라 하였고, 김육이 쓴 『송경지(松京誌)』에서는 10만 호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개성엔 약 70만 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성시내의 길옆에 늘어선 집들은 추녀를 6자씩 일정하게 내어 지어 개성에서 예성강 하구인 벽란도까지 40리 길을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물산이 풍부하고 산천이 아름다워서 그런지 개성에는 미인이 많았는데,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인 최성대가 지은 「개성 여자」라는 시를 읽어보자.
개성의 젊은 여자 그 모습 꽃 같더라.
높게 쪽 진 머리 붉은 화장에 얼굴을 반은 가렸네.
저녁에는 궁터로 풀싸움하러 가기 바쁘네.
잎사귀 틈에 숨었던 나비도 은비녀 꽂은 머리로 날아드네.
‘개성 사람은 오줌도 맛보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개성 사람들이 그만큼 이재에 밝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개성을 두고 이익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개성은 서울과 가깝고, 서쪽으로 중국의 문화와 교류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며, 고려의 옛 도읍지로 아직도 고려의 유풍이 남아 있다 하겠다. 성조(聖朝)가 건국한 뒤 고려의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에서도 그들을 버려 금고(禁錮)하였으므로 사대부의 후예들이 문학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므로 손재주 좋은 백성들이 많아 그곳 물건의 편리함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은 918년 6월이었다. 『고려사』 제1권에는 왕건이 개성에 도읍을 정하게 된 연유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개성 남대문 연복사 종
조선시대에는 새벽 4시와 밤 10시에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종을 쳐서 알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아 100여 리까지 퍼졌다고 전한다.
당나라 선종이 13세 되던 해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십육원(十六院)을 떠나 오랫동안 외지를 유랑하다가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너왔다. 선종은 드디어 송악군으로 와서 곡령재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며 이 땅은 도읍을 이룰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시종하는 사람이 여기는 곧 8진선(八眞仙)이 사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 밑으로 와서 보육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선종은 두 처녀를 보고 기뻐하며 자신의 타진 옷을 꿰매달라고 하였다. 보육은 그가 중국의 귀인인 줄 알고 과연 술사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곧 맏딸을 들여보냈더니 겨우 문지방을 넘다 코피가 터져서 되돌아 나오기에, 이번엔 대신 진의를 들여 모시게 하였다. 선종은 머무른 지 한 달 만에〔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혹 1년 동안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의에게 태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종은 진의와 이별할 때가 되자 자신이 당나라의 귀족임을 밝히고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만일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그 후 진의는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작제건이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맹함이 남달랐다. 5~6세쯤 되어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자, 진의는 아들의 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라는 것만 알려주었다. 아버지가 남겨둔 붉은활을 가지고 활쏘기를 익혀 솜씨가 아주 훌륭해진 그는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들어가는데, 바다 복판에 이르자 안개가 자욱하여 갈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배 안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자, 각자 갓[립(笠)]을 던져서 누가 길하고 흉한가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고려 사람인 작제건의 갓만이 물에 잠겼다. 결국 배 안의 사람들은 양식을 준비하여 작은 섬에다 작제건을 내려놓고 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섬에 홀로 있는데 한 늙은이가 나타나 “나는 서해의 용왕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매일 저녁나절만 되면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형상을 하고 공중에서 내려와 일월성진을 운무(雲霧) 중에 늘어놓고 소라 나팔을 불고 북을 쳐 음악을 하면서 이 바위 위에 앉아 옹종경(擁腫經, 병을 부르는 독경)을 읽습니다. 그러면 내 두통이 심해집니다. 낭군이 활을 잘 쏜다고 하니 원컨대 그 궁술로 나의 곤란을 덜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용왕의 요청에 따라 관음보살로 변장한 늙은 여우를 죽였고, 용왕은 작제건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작제건이 동방의 왕이 되고 싶다고 하자, 용왕은 동방의 왕이 되려면 건 자가 붙은 이름으로 3대를 가야 한다고 하였다. 작제건은 스스로 왕이 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깨닫고 용왕의 사위가 되기를 청하였다. 용왕은 자신의 큰딸 저민의를 작제건에게 주었다.
용왕에게서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얻어 용녀(龍女) 저민의와 함께 개성으로 돌아온 그는 송악 남쪽 기슭에 터를 잡고 산기슭에 가서 땅을 판 뒤 은그릇으로 물을 떠서 썼는데, 그곳이 지금 개성에 있는 큰 우물이다. 그 뒤 그들은 돼지가 가다가 누운 곳에 새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곳이 옛날에 강충이 살던 곳이다.
용녀는 새집의 창밖에 우물을 파고서 친정인 서해 용궁을 왕래하였다. 그 물이 광명사 북쪽에 있는 우물이다. 작제건이 “내가 용궁으로 돌아갈 때에는 절대로 보지 마세요. 만일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용녀와의 약속을 어기고 용녀가 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자, 용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용궁으로 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그 뒤 속리산 장갑사에 들어가 살면서 항상 불경을 읽다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작제건을 의조경강대왕이라 칭하고 용왕의 딸을 원창왕후라고 하였다. 원창왕후는 네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의 이름을 용건(龍建)이라 하였다. 용건은 후에 이름을 융(隆)으로 고치고 자는 문명(文明)이라 하였으니 그가 곧 세조다.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때는 53년에 걸쳐 중국의 5대, 즉 후량ㆍ후당ㆍ후진ㆍ후한ㆍ후주가 줄지어 일어났다가 사라지던 시대의 초기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피를 이어받은 당나라는 마지막 임금 소선제를 끝으로 중국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온 선종의 후손인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합하였고 그 자손이 국운을 계승하여 500년을 내려왔으니, 이것은 마치 진(陳)나라가 망하자 전씨(田氏)의 제(齊)나라가 커진 것과 같다. 이것으로 본다면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시한 것이 박하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대주의인 줄 모르고 사대주의를 펴는 지식인들의 혈맥 또한 계속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 나라가 창건될 때 어느 나라인들 그럴듯한 창건설화 하나 없겠는가. 이중환의 『택리지』는 다시 이어진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태조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 이들이 있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라고 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의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하였다. 그리고 공양왕 요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게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라고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또한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는가마는, 역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부풀려 했던 얘기가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개성의 어제와 오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