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이상향)
현세의 삶에서 영원한 행복을 꿈꾸며 그 세계를 향해 간다. 그 세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다. 현세의 삶이 행복하면 그 세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그러하다. 삶이란 차안에서 볼 때는 살아가는 것이지만, 피안에서는 죽어가는 것이다.
유신론은 현세의 삶이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삶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희망과 의미를 갖고 살아간다. 죽음이 끝이라면 희망과 의미가 무의미하며 무질서한 혼돈으로 악의 소굴이 되어 지옥의 세계가 되리라 여겨진다. 지금 곳곳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새로운 질서를 찾아 평화의 길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짓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아 생각하기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 어떤 일에 마음을 굳히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성실히 노력하면 일은 성취되어 기쁨을 덤으로 얻어진다. 그러니까 마음먹기와 생각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철학자 플라톤은 현세의 삶은 그림자의 삶으로 그림자를 있게 한 원형의 실재를 향하여 살라고 한다. 그는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은 바깥 세계를 모른다. 빛이 동굴에 닿으면 반대의 벽에 나타나는 바깥 물체의 그림자만 보고 살아간다. 우리의 삶이 그렇기에 원형의 또 다른 나를 찾는 삶을 살라고 한다.
현실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의 삶은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으로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의 관습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여 죽음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멀리 산으로 내쫓아서 무덤을 만들어 가두었다. 그러나 서양은 살아가는 형태만 다를 뿐이라며 한 동네 공간에서 그들을 묻고 있다.
나도 한때는 죽음의 트라우마에 갇힌 적이 있다. 누구나 죽는데 죽음을 피할 수 없을까 하고 말이다. 한 암초를 만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서야 그 두려움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신앙의 가르침과 배움의 앎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니까 나의 정체성과 현실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느끼게 되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현실에서 삶의 의미와 의지로 꿋꿋이 살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지나가리라. 전전긍긍하지 말고 물 흐르듯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부터 삶과 죽음의 늪에 빠진 철학자들도 죽고 사는 운명은 하늘의 뜻이라며 받아들이고 이상향을 꿈꾸며 이데아로 나가라고 했다. 아모르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