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三寶)
1984년 2월19일 칠장사 포살일 법문
2.법보(法寶)
[사제법(四諦法)·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
법보(法寶)라,
부처님의 법이 소중하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을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부처를 찾는 가르침이 법보입니다.
어떻게 부처를 찾아야 할 것인가?
내가 원래 부처고 천지우주의 본바탕이 원래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를 못 찾으면 결국은 큰 가치(價値)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이러한 화신(化身)경계에서 굳어버렸으니까
우리는 굳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얼음처럼 굳어버렸단 말입니다.
우리는 번뇌(煩惱)에 경직되어서 굳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녹여서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법보,
법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법은 우리는 다 들어서 아는 바와 같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 있어서
끝도 갓도 없이 굉장히 복잡한 법문입니다만
이러한 법을 간추려서 이야기할 때는
사제(四諦)법문, 십이인연(十二因緣)법문,
육바라밀(六波羅蜜)법문 그럽니다.
물론 이외에도 말을 많이 하고 있으나
대체로는 세 가지 범주 가운데에 부처님 법은
거의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이것은 성문승(聲聞乘)이라 하는,
성문승은 가르침을 따라서
마치 망아지가 워낭소리를 듣고 가듯이 말입니다.
남의 말 따라서 공부하는 그러한 근기가 성문승인 것이고,
그 다음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이것은 연각승(緣覺乘)이라,
자기 스스로 연구(硏究)해서 닦는 근기가 연각(緣覺)이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이인연법이란 법을 닦아서 공부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
육도(六度)라고도 말합니다만
보살(菩薩)근기, 자기도 닦고 남도 해탈(解脫)시키고자 하는
대근기(大根機)가 닦는 법이 육바라밀인 셈이지요.
허나 이것은 일 차 구분했을 뿐이고
이것이 절절히 한계가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보살도 역시 사제법문이 필요하고,
십이인연법도 필요하고,
성문도 역시 육바라밀법이 필요하고,
이와 같이 원융(圓融)한 것입니다.
일차 이것은 우선 구분한 것이지
원칙은 그와 같이 한계가 있어가지고서
너는 뭘 해라 너는 뭐다 그와 같이 할 것은 아닙니다.
다 필요한 것인데
사제법문은 남의 말 듣고서 겨우 알 수 있는 그릇,
그런 그릇이 사제법문(四諦法門)을 하는 것이고,
사색적(思索的)으로 자기 연구를 많이 하는 그릇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연구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는 것입니다.
1) 사제법문(四諦法門)
[고(苦)·집(集)·멸(滅)·도(道)]
그런데 우선 사제법문이라,
사제법문 이것은 불교의 총강령(總綱領) 같은 법입니다.
사제법문은 어떠한 경전(經典)을 보던지 간에
사제법문의 골자(骨子)가 다 숨어 있습니다.
뚜렷이 사제법문인 고(苦)요, 집(集)이요,
멸(滅)이요, 도(道)요, 이런 말을 않는다 하더라도
내용줄거리는 사제법문의 내용이 다 스며 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은 사제법문은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계(衆生界)의
모든 고난(苦難)을 바로 인식하고
또한 동시에 그런 고난을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지가지의 행동이나 도를 닦는단 말입니다.
중생계의 고난을 떠나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참다운 행복(幸福)을 구하는 길잡이를 말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슨 경(經)이나 가사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 말씀가운데 결론(結論)같은 법문이지만
그런 법문 가운데도 역시 줄거리는
골격은 모두가 사제법문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사제법문은 고(苦)와 집(集)과 멸(滅)과 도(道)를 말합니다.
이것은 사체(四諦)·사제(四諦) 두 가지로 발음을 합니다.
글자 본뜻은 진실할 체(諦)자, 사체라고 합니다만
보통 음편으로 해서 사제라고 하나
지금 사전에는 사체라고 나왔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사제·사체 이것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튼 고와 집과 멸과 도와 네 가지가
변동할 수가 없는 진리(眞理)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라
성자(聖者)가 만든 변동할 수 없는 진리기 때문에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고제(苦諦)
그러면 고(苦)는 무엇인가?
이것은 미(迷)의 우리가 번뇌(煩惱)에 때 묻은 미혹(迷惑)된,
미(迷)의 결과로서 육도(六道), 육도 이것은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
우리 범부(凡夫)가 윤회(輪廻)하는 것이 육도(六道) 안 되겠습니까.
육도의 고보(苦報)란 말입니다.
고(苦)·집(集)·멸(滅)·도(道) 의 고(苦) 이것은
고제(苦諦)라, 우리가 번뇌를 많이 지어서
번뇌(煩惱) 때문에 나쁜 행동을 많이 해가지고서
번뇌의 과보(果報)로 해서 받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
수라(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 육도의 과보(果報)가
소위 고(苦)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역시
육도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는 관계상,
인간도 따지고 보면 고가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개고(人生皆苦)라,
인생은 개고(皆苦)라, 다 개(皆)자, 고통 고(苦)자,
인생은 모두가 다 고통(苦痛)이란 말입니다.
이런 말을 지금 젊은 사람들은
하도 살기가 편리하니까 실감 있게 안 느낍니다만
따지고 보면 인생(人生)은 바로 고통뿐인 것입니다.
우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우리가 면치 못합니다.
날 때 또한 낳는 고통 역시 면치 못합니다.
낳고 병들고 늙고 죽고 하는 그런 고생 말고도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욕심은 많은데 구해서 얻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또는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종국은 헤어져야 하는 것이고,
우리 몸뚱이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의 각 원소(元素)가 모여 놔서
사대가 조금만 조화(調和)가 안 되면
그때는 아프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행복(幸福)스럽다고 하는 것은
잘 못 봐서 그러는 것이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생은 결국 고통뿐이란 말입니다.
인생을 고통뿐이라고 생각해서 살면
별로 큰 고난을 안 받지만,
인생은 안락(安樂)한 것이다, 이렇게 느끼고 살려고 하면
그때는 고통이 앞으로 중첩(重疊)해 온단 말입니다.
성자(聖者)가 보는 바른 견해(見解)는
인생은 고다,
인생은 괴로움이다,
이것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주로 한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그러한 고통,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만나고 싶은 사람과 못 만나는 고통,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
자기 몸뚱이를 구성한 여러 가지 요소가
치성(熾盛)해서 몸이 괴로운 고통,
이런 등등의 고통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 집제(集諦)
이러한 것은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미(迷)의 과보(果報)라,
우리가 진리(眞理)를 몰라서 미혹(迷惑)된 결과로 해서 받는단 말입니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모두가 다 우리가 애초에 미혹되어서
진리를 몰라서 헤매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과보로 해서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집(集)입니다.
모을 집(集)자 말입니다.
고보(苦報)를 짓게 하는 우리 중생(衆生)의 괴로운 보(報)를 모아서
일으키게 하는 원인으로서 탐(貪)·진(嗔)·치(癡) 등의 번뇌(煩惱) 및
선악(善惡)의 죄업(罪業)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고통뿐인데 고통의 원인이 집인데,
집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의 탐(貪)·진(嗔)·치(癡)<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癡心)>이나,
거기에서 일어나는 선(善)이나 악(惡)이나 그런 행동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고통의 원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여러 가지 이유를, 요즘 신문들 보면
여당에서는 야당만 여러모로 질타하고 비방하고 말입니다.
또 야당 그 분들 말씀 들어보면
여당 가운데는 좋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어 보인단 말입니다.
인생의 모든 혼란(混亂)이나 원인들이
상대편(相對便)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이 모두가 어떤 것인가 하면은
탐(貪)·진(瞋)·치(癡)란 말입니다.
인간의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
이것이 인생고(人生苦)의 원인입니다.
이것이 원수지요, 바로.
인생고(人生苦)나 모든 사회혼란(社會混亂)의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우리 인생 스스로의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또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행위가
인생고나 사회혼란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인들은 명확히 느껴야 합니다.
불교인인 정치인도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만
그건 잘 모르는 소리입니다.
뭐라 해도 역시 부처님 법도로 해서
이와 같이 인생고의 원인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체(一切) 사회현상(社會現象)의 모든 고(苦)의 원인(原因),
이것은 역시 인간의 근본번뇌(根本煩惱)인 탐심, 진심, 치심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선악(善惡)의 행위(行爲)란 말입니다.
* 멸제(滅諦)
만약 우리 인간이
이와 같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인 집만 있다고 하면
인생은 참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할 것입니다.
인생은 차라리 살 필요가 그때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인간은 고생만 연속하는 고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떠나 버리면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히 행복한 자리 이것이 멸(滅)이란 말입니다.
불교(佛敎)가 불교인 점은,
불교가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과학(科學)이나
그런 것하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하면은
다른 과학이나 그런 것은 뱅뱅 도는 윤회 밖에는 없습니다만
불교는 다 떠나버려서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이 있단 말입니다.
소위 멸이 있단 말입니다.
멸(滅)을 딱 잡아야만이
비로소 하나의 수행자(修行者)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멸 이것은 오(悟),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혹업(惑業)을, 혹(惑) 이것은 미혹할 혹(惑)자 번뇌(煩惱)를 말합니다.
업(業) 이것은 번뇌(煩惱)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위(行爲)를 말한 것입니다.
번뇌와 행위를 다 멸하고서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
즉 다시 말하면 육도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그와 같이
뱅뱅 도는 생사를 초월한단 말입니다.
초월해버리면 열반(涅槃)의 경계(境界)에 드는 것이지요.
열반 이것은 영생을 말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항시 행복(幸福)한 경계가 열반이고
열반 이것이 바로 멸(滅)입니다.
* 도제(道諦)
[팔정도(八正道)]
우리 불교(佛敎)는
대승(大乘)이나 소승(小乘)이나 모두가 다
멸(滅)로 가는, 멸을 증명(證明)하는 것이 우리 불교(佛敎)입니다.
그래서 멸을 증명하는 길,
영생으로 가는 길 이것이 길 도(道)자, 도란 말입니다.
깨달음의 원인으로서 열반에 통하는 도를 팔정도(八正道)라 합니다.
팔정도는 합리적(合理的)이고 체계적(體系的)이고
어느 때나 우리가 언급[음미]해야 하는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지금 더러는 팔정도를 무시하고서
엉뚱하게 공부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배반한 셈이고
공부가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정견(正見)
팔정도는 무엇인가?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見解)란 말입니다.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하면은
인생을 고(苦)와 집(集)과 멸(滅)과 도(道)와 이와 같이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고생 받는 것은 고와 집 때문에,
탐·진·치 삼독심(三毒心)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느끼고
또한 동시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으로 가는 멸(滅)을 증해야 할 것인데,
가기 위해서는 도를 즉 말하자면 팔정도를 닦아야 한단 말입니다.
무슨 수련법이나 팔정도 정신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정도(正道)입니다.
그러기에 팔정도 아닙니까.
팔정도 정신이 안 들어 있으면 정도가 못됩니다.
팔정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른 견해(見解),
바른 견해는 이와 같이 우리 고생(苦生)의 원인은 집(集)이요,
또는 우리 인간에게는 반드시 영생으로 가는 행복이 있는데
영생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 도(道)요,
이와 같이 느끼는 견해 이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정사유(正思惟)
이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바쁘고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그냥 망각해 버립니다.
그냥 망각해 버리니까 자꾸만 그때그때 생각해서,
생각하고 생각해서 사제법문(四諦法門)을
인상 깊게 가슴에 못 박아 둔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깊이, 우리가 사제법문을 뚜렷이 안다고 할 때는
함부로 남을 비방(誹謗)도 못합니다.
내내야 나쁜 것이나 괴로운 것은
탐(貪)·진(嗔)·치(痴) 삼독심(三毒心)이지
딴 원수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문제입니다만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의 좋은 점을 못 봅니다.
남의 나쁜 점만 봅니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나쁜 점은 안보고 남의 좋은 점만 봅니다.
그래서 공자님 말씀도
군자(君子)는 구제기(求諸己)하고
소인(小人)은 구제인(求諸人)이라,
군자는 모든 허물을 자기한테로 본단 말입니다.
소인은 모든 허물을 남한테만 추궁한단 말입니다.
이것에 소인과 군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어(正語)
우리는 사회나 자기 개인 가정이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모두를 다 자기의 삼독심(三毒心)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다고 생각할 때는
바른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말을 말입니다.
맨 남만 추궁하고 남 험담만 하는 것은
바른말이 못 되겠지요.
사회비평(社會批評) 할 때도
사회비평의 근저를 항시 고집멸도(苦集滅道)에다 둔다고 하면은
바른 비평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정업(正業)
정업(正業)이라, 이것은 바른 행위란 말입니다.
바른 생각하고 바른 말하고 우리 몸으로 바른 행동하고
이것이 정업입니다.
정명(正命)
그 다음에 정명(正命)이라, 바른 생활입니다.
만부득이 할 때는 모르거니와
고기잡이나 도한(屠漢)이나
남의 생명을 잡는 그러한 직업은 안해야 합니다.
또 가능하면 술파는 것도 될 수 있는 대로 안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른 생활,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명이란 말입니다.
정정진(正精進)
그다음은 정정진(正精進)이라,
이와 같이 바른 생활을,
바른 참선(參禪)이나 바른 말이나
이런 것을 쉬지 않고 애쓰고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정진입니다.
즉 앞에 있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이러한 것과
뒤에 있는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애쓰고 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정념(正念)
그 다음에 정념(正念)이라,
이것도 역시 참다운 진리(眞理)만 생각하고
다른 생각을 않는단 말입니다.
정정(正定)
그다음은 정정(正定)이라,
이것도 역시 그냥 외도(外道)나 하는 참선모양으로
어떤 신통(神通)이나 할라고 애쓰고 말입니다.
무슨 재주나 부릴라 하고
이와 같은 목적으로 하는 참선은 정정이 못되는 것입니다.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영생열반(永生涅盤)하기 위해서 하는 참선만이
참다운 참선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정이지요.
이상 든 것이 사제법문(四諦法門)입니다.
* 초전법륜(初轉法輪)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成道)하신 뒤에
맨 처음에 녹야원(鹿野苑) 가셔서
다섯 비구(比丘)한테 최초에 설한 법문,
부처님께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맨 처음에 중생(衆生)을 위해서 나투신 법문(法門)
이것이 사제법문(四諦法門)입니다.
그때 상황을 그린 경(經)을 보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한테 하신 말씀이
“그대들 내 말 들어라!
내 이제 그대들에게 불사(不死)의 길을,
죽지 않는 영생(永生)의 길을 설하노라!”
영생을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훤히 내다보는 부처님께서 말입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태도로 해서
과거에 자기하고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한테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까.
아직 35세 밖에 안 된 젊은이가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때 35세 밖에 안 됩니다.
“그대들 말을 들어라!
내 이제 그대들한테 영생의 길을 말하노라!”
영생의 길을 말한 것이 사제법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길을 분명히 느끼고서
이러한 팔정도(八正道)로 해서
영생(永生)의 행복(幸福), 멸(滅)을 증명(證明)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디 가고 빨리 가는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기어코 가야 하는 것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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