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비금속제의 십자무늬 장식이다.
화살촉 모양의 장식 표면 위에 5개의 원을 상-하-좌-우 및 중앙에 찍어 놓아 십자모양을 형성하였고
그 주위로는 작은 점을 연속적으로 눌러찍어[押印] 십자무늬를 장식하였다.
십자무늬장식
금강산경교유행중국비 탁본 (1930년경, 177.5×85.4cm)
중국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경교비를 탁본한 것이다.
경교의 동양전래설을 주장했던 고든(E.A.Gordon) 여사가
우리 나라 경교 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6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조한 경교비를 건립하였는데, 김양선 선생이 이를 탁본하였다.
원래의 비[781년 건립]는 1625년 중국 서안부(西安府)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경교의 선교내력과 당시의 선교현황이 736자 정도로 소개되어 있다.
비문 내용 중 “법도가 전국에 퍼지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교당이 각 성읍에 충만하여 집집마다 큰 복이 번성하였다”(法流十道 國富元休 寺滿百城 家殷景福)라는 기록에서 당시 경교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경교유행중국비 탁본 (금강산) 이 탁본은 경교의
동양 전래설을 주장한 고든(E.A.Gordon) 여사가 금강산 입구에 세운 모조비를 1930년에 탁본한 것이다.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 A. Gordon)은 크리스토교의 동양전래(東洋傳來) 및
크리스토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를 전념하였는데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머물면서 경교의 전래 가능을 연구하고 나서 고든 (E. A. Gordon)
‘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들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의 능이나 문 앞에 세운 무인상(武人像)들에서도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경교성서(The Chinese Nestorian Scriptures), 35.4×24.3cm
크리스토교 일파인 경교(Nestorianism)가 635년 중국에 유입된 후 곧 성서가 번역되었다.
경교성서는 알로펜(아라본 선교사- 아브라함의 중국명)에 의해
당에 전해진 경교성서로
송나라 초기 돈황불동에서 발견된 경교 성서(7세기 중엽) 중 하나를
1931년 영인한 것이다.
신의 명칭을 ‘일신(一神)’으로 표기하였으며, 성서의 어구(語句)를 인용하여
일신(一神)이 천지를 창조하였음을 강조하는 등 경교 교리가 잘 나타나있다.
중국 시안 비림에 있는 대진경교류행중국비 모조품,
경교(景敎)는 7세기경 페르시아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크리스토교의 일파로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유럽에서는 교세를 잃었지만
동방으로 옮겨가 크리스토교를 전래하였다. 중
국의 경교 역사는 선교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이 635년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西安)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며,
원대(元代)에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였다.
경교가 중국사회에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종교나 불교와 습합되면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당에 수많은 사신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당시 빈번한 문화교류를 행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한반도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주로 초기 크스토교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동제십자무늬장식,
마리아상 등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크리스토교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1907년 덴마크 사람 홀이 라는 사람이 매입하여 반출하려다고 발각이 되는 바람에 보존될 수 있었다.
원본은 비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것은 경교비가 발견된 장소에 세워진 모조품이다.
대진경교류행중국비 진품, 비림박물관, 1625
교(敎)자 위에 희미하게 보통 십자가와 다른 특유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이 비에는 70명 이상의 경교 사제의 이름과 더불어 교리의 내용과 역사적인 결과
비석 건립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와 중국 불교와 도교적 개념이 혼합된 혼합주의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들은 하루에 일곱번 평신도 들은 네번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경교비를 설명하는 현판에 분명히 크리스토교로 말하고 있고,
경교비의 머리 부분에 연꽃과 용과 어울어진 이상한 모양의 십자가 형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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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경교비 제막 100주년 기념예배
크리스토교 문화가 아시아 불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던 경교의 중국 대진경교비 제막 1230주년과,
한국 경교비 제막 95주년, 일본 고야산 경교기념비 제막 100주년이 되어
지난 10월 1일 광명 한소망교회에서 기념예배를 가졌다.
일본 동경에 체류하며 아시아교회사를 연구한 영국인 (故) 엘리자베스 A. 골든 여사가
일본 동경에서 발표한 경교연구 논문을 통해, 한국, 중국, 일본 및 아시아 불교에 영향을 끼친
크리스토교 문화의 내용을 강연했던 것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동양 크리스토교는‘파사교(波斯敎·페르시아를 가리키는 중국말)’라는 이름으로
서기 635년 당나라 태종 9년에 중국에 들어온다.
이후‘대진교(大秦敎·대진은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중국말)’이름을 거쳐 경교(景敎)로 불리게 된다.
경교는 중국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으나, 유교와 도교 신봉자들의 박해로 사양길을 걷는다.
경교의 업적을 찬양해 세운‘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일명 경교비)’도
산시성 서안에서 지하에 묻힌다.
중국에서 동양크리스토교의 전래 사실은 800년 동안 까맣게 지워져 있다가,
1625년 청나라 초기에 경교비가 발굴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미 크리스토교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가 국교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아시아 불교에 깊이 묻혀있는 크리스토교 문화를 들으며, 왕성했던 크리스토교 문화의 전달과 함께
복음도 전달이 되었을 텐데, 불교의 유적에만 남겨져 있는 크리스토교 문화의 잔상을 생각할 때
안타까움이 더한다.
아시아의 크리스토교 문화를 통해 복음을 다시 찾고 회복하는 일에서
우리 아시아 크리스토교 인의 정체성을 더욱 인식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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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의 경교비(景教碑)
중국 역대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시안(西安). 당나라 때는 장안이라 불렸다.
시안 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구시가지로 가니 당나라 때의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지난 몇 년 사이 시안에는 옛 당나라 복식을 대여해 주고 1시간 동안 머리(가발)치장에 화장까지 해 주고 하루 동안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가게가 많이 생겼다.
다른 성에서 관광 온 젊은이들은 이런 복식으로 다니다가 내가 외국에서 왔다며 말을 걸면 하나같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고 사진 포즈를 취해 주었다.
젊은이들은 이방인을 경계하기보다 호기심을 가지고 개방적으로 대한다. 당나라 때도 그랬을까?
시안의 비림박물관에서 보았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가 원래 있었던 곳에 찾아간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행운이었다.
몇 년 만에 찾아간 시안 근처 저우즈(周至)의 우칭징 주교는 그 비석의 탁본을 선물로 주면서 비석이 발견된 곳이 자신의 교구 안에 있다고 했다. 그는 비석에 새겨진 경교 십자가를 자신의 주교 문장(紋章)에 디자인해서 넣었다. 우주교는 내가 경교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을 보고 직접 운전해서 다친쓰(大秦寺/대진사)로 안내했다.
경교비가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다친쓰는 당나라 때 경교의 수도원이었지만 오래전에 불교 사찰이 되었다.
송나라 때 세워지고 여러 차례 수리된 아름다운 탑은 피사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그런데 여기 세워진 비석(복사판)과 안내판에는 경교(景教)라는 글자가 다 훼손되어 있다.
누가 왜 그랬을까? 당나라 때의 그 개방과 포용의 정신이 현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까?
경교비는 당나라 덕종 때인 건중 2년(781) 중국에 들어온 지 거의 150년 뒤에 세워졌다.
경교의 수도사경정(景淨, 서역명은 아담)이 썼다.
높이 약 2.8미터 폭 1미터 두께 30센티미터. 비석 상부에는 연꽃 받침이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고
32행에 각행 62자로 한자 1천9백84자, 고대 시리아 어 문장도 40여 개 있다.
크리스토교 의 기본 가르침과 함께 경교가 중국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기록했고
당시 대덕(大德)이라 불리던 주교 70명과 성직자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 명나라 말기에 재발견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경교비의 재발견
서역과 교류가 활발했던 당나라 때 네스토리우스파의 아라본 주교가 페르시아를 거쳐 635년 중국에 들어갔다. 크리스토교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이다.
중국 대륙을 다시 통일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세계를 향해 문호를 활짝 열었던 당 태종 때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시대로 ‘대당성세(大唐盛世)’라 불린다.
태종은 아라본 주교를 환대했고 경교 사원(수도원)을 지어주었다.
경교는 이후 2백 년 동안 황제의 비호 아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 말기인 회창 5년(845) 도교를 몹시 신봉했던 무종은
장안 밖의 불교 사찰을 모두 철폐하라고 명하면서 불교 타도 정책을 시행했다.
황제의 폐불 칙령은 외래 종교에도 적용되어 마니교, 조로아스터 교와 함께 경교도 철퇴를 맞았고
다친쓰의 유명한 비석은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8백 년이 지난 뒤, 명나라 말기인 1623~1625년에 이 비석이 시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번에 내가 찾아간 곳이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 때 이후 크리스토교의 명맥이 끊어졌다가
명나라 말기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던 선교사와 첫 신자들에게 이 비석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당나라 때 이미 복음이 전해졌고 황실의 보호 아래 발전하고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경교비가 발견된 산시성의 선비는 탁본을 해서
항저우의 천주교 교우이자 학자인 이지조(李之藻/1565~1630)에게 보냈다.
일찍이 마테오 리치를 만나 같이 과학 기술 활동을 했고 1610년에 세례를 받았던
그는 흥분과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경교비에 대한 해설문을 쓰면서
“오늘 이후 중국의 선비들은 성교(聖敎 크리스토교)가 중국 땅에 늦게 전해졌다고 아쉬워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선교사들은 경교비 소식을 유럽으로 전했고 당시 유럽에도 이것은 큰 화제가 되었다.
5세기에 에페소 공의회가 이단이라고 배척했던 네스토리우스파의 중국 선교 활동 기록이 17세기에 와서 서방교회에서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과 당대의 중국 지식인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기쁨과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크고 놀랍다.
신한열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살면서 30년 이상 유럽과 동아시아를 오가며 국제 젊은이 모임을 이끌었다.
2020년 한국으로 돌아와 비영리단체 이음새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서울시 문화다양성 전문강사로도 일한다.
쓴 책으로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지성사)이 있다. ‘수사’는 직분이나 직책이 아니라
개신교의 ‘형제’와 같은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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