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문학과지성사, 2024.04) --------------------------
* 이병률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등 2006년 현대시학작품상, 2018년 발견문학상, 2021년 박재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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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일까 없었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행복한 고백이 아닐 수 없겠다. 없었다면 지금의 사랑이 그만큼 돌올하고 유일하다는 뜻이겠고, 있었다 해도 듣는 이의 부러움을 살 법한 자랑질이 아니겠나.
시의 화자는 지금 사랑의 감정이 벅차올라 말문이 막힌 상태다.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다고도 없었다고도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은 강렬하다. 사랑은 언제나 말보다 크고 강하다. 말로는 부처의 깊은 깨달음을 전하기 어렵다는 ‘언어도단 불립문자’의 이치처럼, 사랑 역시 말로써는 역부족인 것. 서술어를 줄일 수밖에. 그러니까, 말줄임표의 사랑이다.
- 김화연 (시인)
*********************************************************************** 사랑의 감정을 이처럼 절절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 것이다. 이 시는 사랑의 사건을 기억 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역의 플랫폼에서 연인을 배웅하며 눈물을 삼키는 사람이 있었다. 사랑하였으나 그 빛의 양감(量感)이 늘 모자란 듯 느껴졌던 때가 있었고, 또 사랑의 빛이 분에 넘치게 넉넉해서 가슴이 벅찰 때도 있었다. 그이가 마냥 좋아 그이가 가는 대로 똑같이 가고만 싶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그이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사랑의 몸이 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에 사랑이 영원할 것을 예감한 적이 있었다. 사랑이 세차게 솟아오르던 때가 있었다.
시인은 시 「언젠가는 알게 될 모두의 것들」에서 “사랑을 감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번 생의 암호를 풀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러고 삽니까”라고 썼다. 우리는 사랑을 감각하기 때문에 밤의 대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꽃다발을 품에 안아 개화하고, 의지할 데를 잃어 빈 의자처럼 서고, 문장을 뜯어고치며 긴 편지를 쓴다. 그리하여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다른 내가 된다.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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