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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한국명 : 牟三悅, 毛三栗) 선교사는
1860년 9월 15일 미국 일리노이 그랜드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했다. 1889년 몬타나 (Montana)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1892)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감동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선교사를 지망했다.
무어 선교사도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1892년 8월 16일 부인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함께
한국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배편으로 호놀룰루와 일본의 요코하마, 부산-인천을 경유하여
목선으로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1892년 9월 21이었다.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걸어서 성안으로 갔다.
남대문에 도착해보니 이미 성문은 닫혀 있어 성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성벽 아래쪽에 개구멍이 있어 브라운 아들은 거기로 기어 성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른들은 체구와 체통 때문에 시도조차 못했다.
하는 수 없이 6m 되는 높은 성벽에 로프를 걸어 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어를 배우는 일부터 착수했다.
한국어 선생을 두어 매일 방문하도록 하여 공부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 이외에 마펫(Moffett)선교사의 성경공부 반을 도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경을 장과 절까지 말하며 척척 외우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그들이 각 처로 흩어져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자로 일할 것이므로
신학반 인도는 더욱 기대를 부풀게 하는 일이었다.
어서 빨리 한국어에 능통하여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마 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급속히 늘었다.
약 반년이 지난 1893년 3월 19일 주일에는 한국인들과 쉬운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예배순서에서 한국말 기도를 담당했다.
1893년 6월, 곤당골 높직한 곳에 2층집을 지어 터를 잡았다.
무어 부인은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아낙네들에게 재봉틀도 보여 주어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환심을 샀다.
약 9m 깊이로 판 우물에서는 다른 집보다도 수질이 좋아 이웃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어느 해에는 100명에게 세례를 집례 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 백장(白丁)을 대상으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하도록 하는데 전력하였다.
1896년 에비슨 선교사와 협력하여 신분 철폐와, 천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고종 임금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복장제한(服裝制限) 제도를 철폐하여
양반과 천민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데 기여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그를 가리켜
“백장 해방운동의 지도자”라 칭호가 붙여졌으며,
사랑의 사도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천민 층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1893년 3월 19일 승동(곤당골)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대현교회,
동막교회 등 25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1906년 7월 12일에는 그리스도 신문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장티푸스로 인하여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15년간의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1906년 12월 2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부인 로즈 엘리(Rose Ely)선교사는 남편이 별세한 뒤 얼마동안 한국에 머물다가
1907년 11월 18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무어 부부는 3남 1녀의 자녀가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전면
묘비에는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Devoted servant of Jesus Christ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 unselfish in his love for the Korean people)'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이 6·25 전쟁 때 총탄으로 파손되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후면
묘비에는 우리말로“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백정 박성춘①…스스로 신분을 해방시키다
김현민 기자
아틀라스뉴스 기사 승인 : 2023.04.21. 14:44
내무아문에 진정서, 백정도 갓과 망건 착용 허가 얻어 내…만민공동회 연설도
조선시대 백정은 인간대우는커녕 개·돼지보다 더 더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도살업을 주로 하던 이들은 일반백성(常民)들처럼 상투를 틀지 못했고,
두루마기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름을 지을 때 인(仁)·의(義)·예(禮)·지(智)·효(孝)·충(忠)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수 없었고,
이름이 아예 없거나 만석(萬石)·억석(億石)·무검(武劍)·소개(小介) 등과 같은
좋지 못한 글자로 지어야 했다.
천인은 일곱 종류로 분류해 승려, 광대, 무당, 점복, 기생, 피장, 백정을
칠반천인(七班賤人)이라고 했는데, 그중 백정이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다.
노비보다 못한 존재였다.
백정은 갓과 망건은커녕 털모자도 쓸 수 없었다.
양민과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공공집회와 장소에는 허가 없이 출입할수 없었다.
일반인의 집을 방문할 때 문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취해야 했고,
길을 걸을 때 일반인과 같이 걷지도 못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었다.
상민과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천인과 결혼할 때도 남자가 말을 타고 여자가 가마를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백정의 신부는 비녀를 꽂지도 못했다.
초상이 나도 상복을 착용할수 없었다.
양반은 물론 상민도 백정에 대해 린치(私刑)을 가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19세기말, 서울 종로 바닥에 박가라고 불리는 백정이 있었다.
이름도 없었고, 아버지가 백정이니 그 아들은 당연히 백정이었다.
종로의 상가에 고기를 운반해주고, 동네 허드렛일을 하던, 천하디 천한 박가가
1998년 10월 26일 종로에서 열린 독립협회 주최 만민공동회에
관민대표로 등단해 연설을 했다.
“나는 대한(大韓)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無知沒覺)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갱민(利國更民) 길이라면,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可)하다고 생각합니다.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힘이 부족하나,
많은 장대를 합치면 대단히 강해집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감히 사람들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하던 백정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했다.
한양 인구 20만명이던 시절에 만민공동회엔 1만명이 모였다.
조선 역사 초유의 대집회에 백정이 종삼품 고관대작들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그들을 타이르는 듯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친 것이다.
백정 박씨가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설 때 이름을 갖고 있었으니, 박성춘(朴成春)이다.
그는 일자무식임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편견에 포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도 고종황제에 충성을 할 자격이 있음을 선언했다.
백정이지만 상민, 양반들과 힘을 합쳐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는데 기여하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박성춘이 만민공동회 연사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실로 당당한 백성이 된 것이다.
대한제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꾼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에서
이미 신분제 차별을 철폐했다.
박성춘은 지신이 속한 백정 신분을 면천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매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선 노예해방 과정에서 남북전쟁(1861~65)이 일어나
나라가 갈라지고 군인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30년후 조선에서는 유혈사태 없이 신분해방, 즉 면천(免賤)이 이뤄졌다.
박성춘이 그 중심에 있었다.
박성춘은 출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1862년경에 서울 관자골(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결혼을 해 봉출이란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무식함을 면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에 서양사람들이 주간학교를 만들어 글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사람이 하는 학교였으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서양사람이 한다니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보냈다.
미국 장로교 소속 새무얼 무어(Samuel Forman Moore, 1860-1906)) 선교사가
1893년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하층민, 특히 최하층 백정들을 선교하기 위해 학교를 연 것이다.
곤당골은 고운담골의 준말인데, 지금의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근처다.
선교사 무어는 백정 출신 남자아이 6명을 받아 주간학교를 시작했고,
박성춘의 아들 봉출도 미국 선교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어느날,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열로 사경을 헤맸다.
봉출은 스승 무어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어는 고종의 주치의(侍醫)였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을 데리고 박성춘의 집을 찾아갔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몸을 만지던 시의가 백정을 돌보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박씨를 치료해 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다.
박씨는 임금의 주치의가 거지보다 더한 대우를 받던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1년후 세례를 받아 “봄을 이루다”는 의미로 성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들도 봉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상서로운 태양”이라는 의미로
서양(瑞陽)으로 개명했다.
박성춘은 세례를 받을 때까지 자신이 백정이란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자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요구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다.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양반들이 떠나가자 박성춘은 동료 백정 임씨, 원씨, 이씨 등
4명을 곤당골교회로 데리고 나왔고, 백정 조합사무실에 나가 복음을 전파했다.
1895년 가을이 되자 백정들의 전도로 곤당골교회의 교인 수가 세례교인 43명,
원입교인 14명 등 57명으로 증가했다.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8년에 경기지방에만 백정 신자가 132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 차별 폐지가 발표됐지만
오랜 관습으로 인해 백정에 대한 관습적 차별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박성춘은 백정 계급을 대표해 유길준이 대신으로 있던 내무아문에 탄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이 무어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당신의 비천한 종들인 우리는 500년 남짓 백정 일을 생활수단으로 살아왔습니다.
매년제(매年祭) 때마다 조정의 요구에 순응해 왔지만 우리는 항상 무보수였고,
가장 천대받는 칠천민(七賤民) 중 하나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다른 천민 계층은 도포와 갓과 망건을 쓸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심지어 지방 관과의 아전들은 돈까지 뜯어가곤 합니다.
만일 그의 요구에 불응하면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때로는 관가에 잡혀가서
놀림을 당하고 욕을 먹으며 억지로 일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어린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그런 고통이 있으며
그 외에도 우리가 당하는 수없는 천대를 어찌 말로 다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보다 낮은 계층인 광대조차 갓과 망건을 쓰는데
우리들만 유난히 허용되지 않고 있어 그 한이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비천한 충복들이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닐 수 있으며 또한 관가에 붙어사는 관리들이
이후 다시는 우리를 부려먹지 못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박성춘이 요구한 것은 백정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상투를 틀고
갓과 망건을 쓰도록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무어 선교사는 애비슨을 불렀다.
1895년 청일전쟁 기간에 콜레라가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했고,
애비슨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콜레라 방역에 힘쓴 결과
콜레라를 퇴치했다는 공로를 인정받고 있었다. 조선 조정도 애비슨은 무시하지 못했다.
무어 선교사는 애비슨에게 “당신이 치료한 박씨가 백정들의 위해 건의문을 냈으니,
백정들을 위해 유길준에게 진정서를 하나 써달라”고 했다.
박성춘의 탄원서와 애비슨의 진정서에 대한
내무아문의 회신이 무어 선교사에게 전달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의 소원을 허락한다. 갓과 망건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포를 입어라.
그리고 평민의 신분을 누리라. 그리고 주의해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외모만 갖추도록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너희들의 내적인 행복을 생각하라.
만일 관가에서 아전들이 너희들을 억압하려고 하면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 교서를 보여주도록 하라.”
이로써 백정들은 일반인과 동등하게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바로 백정들도 일반인과 동일한 인격체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상민이 양반이 되는 것과 백정이 망건과 갓을 쓰는 것이 신분차별에 대한
가장 큰 한이었다.
박성춘은 백정의 한을 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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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무어 선교사와 백정 박성춘 -
- 곤당골교회(현 승동교회) -
1893년 서울에서 새문안교회에 이은 두 번째 장로교회가 시작됐다.
이름하여 곤당골교회(서울 승동교회 전신)입니다.
지금의 관철동과 종로·을지로 1~2가 일대가 곤당골이었다.
일제강점기엔 경성부 미동이라고도 했습니다.
곤당골교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신분질서 타파와 인권운동의 시작이 이 교회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양반, 중인, 상인, 천인, 네 계급의 신분질서 사회였습니다.
10%에 불과한 양반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가운데 기생, 무당, 광대, 포졸, 갖바치, 고리장, 백정은 소위 ‘7 천인(賤人)’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특히 백정은 인도 카스트계급제도의 가장 아랫 계급인 불가촉천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백정은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크리스토의 복음이 조선에 이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상놈이 뒤섞여 교제를 하고 다 같이 하나님 백성임을 고백한 뒤 만왕의 왕 예수를 따랐다.
봉건적 질서를 사수하려는 수구세력에겐 대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곤당골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백정 (白丁) 도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하고 축복했다.
※ 백정(白丁)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에 있었던 계층에 대한 호칭이다.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던 소위 도축업자로서,
조선시대에는 평민 하류에 속해 천민인 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빴으며, 조선 전기 중대한 사회문제로 취급받았다.
- 사무엘 무어 선교사(왼쪽)와 그 가족 -
곤당골교회의 시작은 ‘백정 전도의 개척자’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불리는 사무엘 무어 (1846~1906) 선교사였습니다.
무어는 46세 늦은 나이에 아내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그 무렵 선교사들이 정동 미국 공사관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으나
무어는 백성 속에 깊숙이 들어가 선교하겠다며 민가에서 살며 조선말을 배웠다.
알렌,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안전지역 내에서 양반 등 상류층 전도를 이어갈 때
그는 철저히 현지화 선교로 임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은 이에 대해
‘그때 선교사 모삼열(무어)이 경성 미동에 거주하면서 아직 방언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매일 신도와 함께 시가 전도를 하니,
당시 함께 다닌 조사는 김영옥, 천광실이고…모 목사는 신덕과 자선이 가득하여…믿든지 안 믿는지 상관없이
모두들 그를 어진 사람이라 칭찬하고 그의 집은 인의예지가 있는 집이라 일컬었다’고 기록했다.
무어는 당시 원고 없이 한국말로 설교하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초가에 살며 쌀밥과 김치로 식사하고, 상인 및 천인과 어울렸기 때문에 언어 향상이 빨랐다.
또 수 주 만에 식모를 전도하고 매일 20~30명씩 평민을 접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첫 조직교회가 곤당골교회였다.
영국 출신 감리교 목사이자 종교신학자인 제임스 헌틀리 자료에 따르면
‘창설 교인은 16명이었고 첫 해에 43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했습니다.
무어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책임자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와 협력했다.
1894년 미동 권역 관자골(현 관철동)에 사는 박가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맸습니다.
무당에게 굿을 청했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박가의 예닐곱살 된 아들 봉주리가 곤당골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봉주리는 무어 목사에게 울며 호소했고,
무어 목사는 심방 뒤 에비슨에게 알려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무어 선교사가 지도하는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곳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박성춘을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만민평등’을 내세우며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양반 교인들이 홍문서골(홍문동)로 교회를 분립해 나갔습니다.
그는 서울, 수원, 평택, 양주, 포천 등지의 백정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였고,
1년 사이에 백정과 천민 출신들로 곤당골교회가 가득 차게 되었다.
이후 경기도 수원에도 백정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를 통해 ‘만민평등’의기치를 터득한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름도 없던 백정 박가가 훗날 기독인권운동가 박성춘( (朴成春, 1862~1933)이고, 그의 아들 봉주리는 한국인 첫 양의( 洋醫)박서양(1887~1940)입니다.
- 박성춘 (朴成春, 1862-1933) -
크리스토 안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의 과거의 모습과 관계가 없이 한마음이 됩니다.
한 형제로서 뜻을 합하여 함께 일을 하고 같은 길을 가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어떤 신분으로 살든지도 상관이 없습니다
부자이든지, 가난한자이든지도 상관이 없습니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그런 조건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