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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회장님의 카톡에서]
❤ 서서평(徐徐平) 이야기 ❤
엘리자벳 조안나 셰핑은 1880년 9월 26일 독일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안나 셰핑은
세 살배기 딸을 가톨릭 신자 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해 가버렸다.
셰핑은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셰핑은 태어나면서
부터 버림과 외로움을
몸소 겪으면서 자랐다.
그의 나이 9살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종이 쪽지 한 장 손에 들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1889년 어머니를 재회한후 그녀는 가톨릭재단의 성마가병원 간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1년 뉴욕에 있는 시립병원
에서 간호사 실습을 하면서 동료의 권유로 장로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가톨릭에서 장로교로 개종을 하게 되어 성경교사 훈련학교에 입학,
8년이 지난 그녀의 나이
31세때 겨우 졸업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조선은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핑은
조선 선교를 지원했다.
왜냐하면,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음에 내몰리고 있다는 선교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셰핑은 선교사 서약에서 조선인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고 1912년 2월 20일 32살의 셰핑은 미국 남 장로교회 조선의료선교사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으로 가는 코리아호에 올라 그해 3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했고, 작은
예수의 삶을 시작했다.
광주에 와서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그녀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에 서서히 임한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를 더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자를 천천히 할 서(徐)자로, 두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셰핑의 발음을 본따 살린 것이기도 했다.
서평은 서양 선교사라기 보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다. 고무신에 한복을 즐겨 입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조선 사람들이 평소 입는 옷과 신발을 신고 조선말을 하던
서양 처녀 서평은 광주 사람
들과 함께하기 위해 결혼도
거절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서평의 첫 사역지는 광주 제중원, 군산의 구암예수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등 세 병원에서 일을 해가면서 간호원을 총감독하고, 간호원들을 훈련시켰다.
어느 기자가 서평과 인터뷰하면서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서평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조선 여성들 가운데서 미래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반대로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아동들, 결혼은 했으나 소박당한 여인들,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 불우하고 기회를 놓친 다양한 계층의 여인들을 상대로 신학교인 이일(裡一)학교; 1961년 전주로 이전
(한일장신 대학교로 개명), 조선 간호부회(대한 간호협회 전신)를 세운 것도 이들을 가르쳐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다
셰핑 선교사는 1년에 최소한
백 여일을 조랑말을 타거나 아니면 봇짐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찾아 순회 전도하고 그들의
벗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이렇게 기록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이 넘는 조선 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렸다.
여인들은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녔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한글을 깨우쳐 주는 것이
제게 가장큰 기쁨 중 하나이다."
서평에게 있어서 간호사역, 사회사역만큼이나 비중을 차지
했던 사역이 또 전도사역이었다. 순회전도를 통해 서평은 가을과 겨울 농한기에 시골 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며 부인회를 조직했다.
선교사들과 함께 전도하였던
이 교환 목사는 서평을 가리켜 1000대1이라 하였다. 1000명분의 일을 할 만큼 열정과 근면함으로 일했다는 뜻이다. 그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 그러나 서평은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걸인들을 데려와 씻기고 옷을 사 입히는가 하면, 버려진 아이를 수양아들로 삼아 길렀습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운 아이가 14명, 아이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다.
한번은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어느 집에 맡겼는데
잘 키우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보고
그 동안의 양육비를 주고 데려오기도 했다.
그녀는 1930년 마지막
선교 보고서를 썼다.
서평은 미국에서 많은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여성들이 담배에 사용하는 돈만으로도 영적으로 죽어가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한센 환자들을 돌볼수 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서평은 광주천 부동교 밑 어느 움막 속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곳에는 거지 노인이 있었다.
서평은 아무 거리낌 없이 다리 아래서 거적을 덮고 잠을
청하던 그를 깨우며 말했다.
"최씨 아저씨 아직 안 죽고 살았소. 이불을 가져왔으니
덮고 주무시오."
서평은 이불과 요를 나눠주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추운 겨울 한밤중 빈민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덮고 쓰던 이불과 요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다 보니 정작 자신의 이불은 없었고 옷만 단
두 벌뿐이었다.
서평은 이렇게 말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
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타의 구제는 사랑의 발로이다. 제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터져라 예수님
을 부르짖고 신자라 자처한다. 할지라도 구제가 없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 아니다."
1933년,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 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한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 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 다 들었고, 소록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엇보다 낮은 곳을 향한 끊임없는 서평의 관심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가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다.
과부의 심정은 과부만이 알수 있듯이 고아의 상처와 눈물을 자신이 충분히 겪었기에 진심으로 이들을 섬길수
있었던 것이다.
거적떼기를 덮고 자는 사람에게 그녀의 담요 반쪽을 찢어주고 남은 반쪽으로 앙상해진 몸을 가린 채 이 땅의 삶을 그렇게 마쳤다.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에서 선교사의 생활을 하는 도중 언제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부 나눠 주고 베풀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영양실조로 1934년 6월 26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한장... ]
이것이 유품의 전부였다.
시신마저 기증하고 떠나는 그녀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명은 통곡하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그로부터 90 여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광역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녀가 사용하던 침대맡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Not Success, But serv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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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 가불하세요 ♡
행복을 가불하세요.
행복을 외상으로 사세요.
자신의 뇌를 잘 알고
뇌를 잘 활용하는 사람은
행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하다고
100% 확신이 서면,
그때 나는 웃겠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가불해서 쓸수록 좋고,
외상이라도
가져다 써야 합니다.
그렇게 오늘
행복을 쓰다 보면,
내일은
더 행복한 일이 생깁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항상 사랑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행복을
만드는 비법입니다.
감사함은 영혼을 구합니다.
감사함은 세상을 구합니다.
감사함은 기쁨의 원천이고,
기쁨은 새로운
창조의 원천이 됩니다.
그리고 감사함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행복해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즉시 행복을 가불하십시오.
-'일지희망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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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四君子) 와
인품(人品)○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체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동물은 짐승에 따라 각각 다른 냄새가 있고
식물도 종류에 따라 다른 냄새가 있는데
우리는 그 것을
" 향기 " 라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도 냄새가 있습니다.
체취는 의식주와 환경에 따라 생기는 냄새이고
사람 냄새를 이야기할 때는 체취가 아닌
사람됨됨이에서 풍기는 냄새를 말하며
우리는 그 것을
" 인품 " 이라고 합니다.
옛날 부터 동양인들은
덕성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인격자를 가리켜
" 군자 " 라고 칭했고
선비들은 철 따라 피는 꽃 중에서
매화 , 난 , 국화 , 대나무 를 가리켜
"사군자" 라 칭하고 묵화를 치며 군자의 도를 닦았습니다.
20 까지를
인생의 봄으로 간주해 매화와 같은 기상으로,
40 까지를 난과 같은 자세로,
60 까지를 국화와 같은 마음으로,
80 까지를 대나무 같은 절개로 삼아
4 군자의 향기를 고루 가지고 살기를 바랐습니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의 꽃말은
"맑은 기상 , 인내 , 순진무구"입니다.
20 살까지는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라는 것이
보통인데
부모는 자손들이 매화와 같이 "맑은 기상"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 멀리 퍼뜨리며 고고한 자체를
뽐내는 난의 꽃말은
"고결함" 입니다.
공자는
삼십 '이립'이요 ,
사십 '불혹'이라 하여
나이 30 살에 모든 기초를 세워 홀로 서고
40 살에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난과 같이 고상하고 결백한 향기를 간직할 때입니다.
국화의 꽃말은
"성실 , 청결"입니다
국화는 가을의 대표적인 꽃으로
모든 꽃들이 지는 계절에 홀로 피어나
찬서리에도 그 모습이 아름답고 향기 또한 그윽해
어떤 꽃들보다 으뜸 입니다.
60 까지는 가져야 할 향기 입니다.
곧은 줄기에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꽃말은
"변함 없는 절개" 입니다
후손이나 후배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인생의 막다른 어귀에서 뚜렷한 사상이나 철학없이
오락가락하는 세태를 보면서 일생을
잘 정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나무의 꽃말을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 모두
맑은 기상과 고상하며 성실하고
변함없는 절개의 사람 냄새인 고매한 인품의
향기를 풍기며
사군자 답게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있느냐에 따라서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도
냄새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이 향기나는 인생을
선물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건강하고 행복한 향기나는 삶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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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슬픔을 넘어 기쁜 이유>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과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에 대한 전설적인
실화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미군 군수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 부산역 건너편 산 판자촌에 큰 불이 났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 커녕 먹을 것조차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휴전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하였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관계자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재학생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수근댔지만 개의치 않았고 온 맘과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고...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에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에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 때 간첩 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생을 달리했다.
부산 UN공원묘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다.
이 땅에는 이러한 장군을 기리는 동상 하나가 없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아니 부산대학교에도 메리놀병원에도 물론 없다.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 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 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 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한다고.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 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 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 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 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 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0만 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 같다.
그리고 정부는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너무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정말 기쁜 날이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 그렇게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브라보!
* 부산 출생인 박선영 국제대학교 교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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