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기행
지난 일요일(5월 26일) ‘시와 늪’이 주관하는 문학기행으로 경남 사천(泗川)을 다녀왔다. 그 지역의 ‘항공우주박물관’ 입구 주차장 울타리나 담벼락을 이용하여 ‘시와 늪’을 위시한 여덟 문학단체가 합동으로 펼치고 있는 ‘걸개 시화전시회(4월 1일부터 8월 30일까지)’를 둘러볼 겸해서 택한 여정이었다.
이전의 모임에 비해서 참여율이 낮아 아쉬운 반면에 단출해서 좋았다. 불과 스물을 채우지 못한 인원인데도 서울이나 부평과 파주, 부산과 대구, 진해와 진주, 하동과 마산 등의 다양한 지역에서 모였다. 전날까지는 동녘의 돋올볕마져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얕은 구름이 해를 가려주어 마치 하늘에다 하얀 차일(遮日)을 친 것 같아 야외활동에 안성맞춤인 날씨였기 때문에 결국은 자연으로부터 커다란 부조나 은전을 받은 모양새였다.
기행의 첫 행선지는 우주항공산업 클러스터(cluster)를 이룬 개활지의 한쪽에 자리한 ‘항공우주박물관(aerospace museum)’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걸개 시화전시’ 작품을 둘러보는 일이고, 두 번째는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된 비행기와 우주선이 진화해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유물을 살펴본 뒤에 우리의 항공우주상산업 클러스터 전체를 조감(鳥瞰)하려는 의도이다.
박물관 입구 주차장을 중심으로 좌우의 울타리에는 ‘시와 늪’을 비롯한 여덟 문학단체 회원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걸개시화’로 제작하여 전시함으로써 어느 누구라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도록 문턱을 아예 없앴다. 이는 문학의 저변확대를 겨냥하는 적극적인 모범사례이지 싶다. 이심전심으로 간절한 염원이 통했는지 많은 탐방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놀라운 현실에서 우리 문학의 내일에 대해 희망가를 불러도 될 성 싶었다.
‘항공우주박물관’의 뜰에는 196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전용기 모형(C-54(Skymaster))을 위시해서 구식 모델의 다양한 비행기와 전차 등이 전시되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박물관의 전시물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항공우주관과 자유수호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서 항공우주관(aerospace hall)에는 비행기의 역사와 원리, 우주항공 역사와 미래를 파악하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오달지게 꾸며져 있었다. 한편, 자유수호관(freedom hall)엔 한국전쟁을 되새겨 볼 수 있게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UN 참전국의 총기류를 필두로 중공군과 북한군의 전사품(戰史品)을 구경하는 과정을 통해 그 처참했던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게 했다. 그 중에 유독 내 발길을 멈추게 했던 전시품은 6.25 당시 1950년 10월 22일 평북의 영변군 신흥동 청천강 변에서 노획한 전리품인 ‘김일성의 승용차’이었다.
겉핥기식의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그곳에서 일하는 Y주간의 특별한 배려로 옆에 자리 잡은 건물의 4층에 있는 ‘VIP 브리핑 룸’으로 갔다. 거기에서 드넓은 사천 항공우주산업의 클러스터 영역을 한 눈에 조망(眺望)하며 친견(親見)하는 호사를 누려 마냥 기꺼웠다.
겨우 항공우주박물관 탐방을 마쳤는데 점심 무렵이었다. 예로부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던가. 곧은 직선도로를 몇 십분 달려 노산공원 옆 어시장에 자리한 횟집(갈매기횟집)에서 허리끈 풀어놓은 채 싱싱한 생선회를 포식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산의 생선회도 타지에 비하면 무척 싼 편인데, 그곳은 마산의 절반 조금 웃도는 가격이었다. 생선회 값이 터무니없이 저렴해서 다음에 회를 먹기 위해 꼭 다시 찾겠다며 벼르고 있다.
점심으로 생선회를 포식하고 걸어서 노산공원 입구에 이르렀다. 공원으로 향하는 입구 계단의 건너편 도로가에 오래된 베니어판 같은 나무에 ‘노산여인숙’이라고 쓴 간판이 무척 정겨웠다. 물론 현재 영업을 하는 여인숙이 아니며 부서져 내릴 듯 빛바랜 낡은 간판을 당국에서 일부러 보존토록 조치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여인숙 간판은 이즈음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는 골동품 같은 존재로서 옛 시절에 대한 향수의 샘을 자극한다. 그 간판을 배경으로 몇몇이 기념 촬영을 하고 계단을 터덜터덜 걸어 봉긋한 산마루에 자리한 공원에 이르렀다.
몇 해 전에 개최되었던 ‘박재삼문학제’에 참가하며 샅샅이 구경했던 곳이라서 특별히 눈여겨봐야 할 게 없었다. 이런 연유에서 박재삼문학관 사무실에 들려 차와 토마토를 대접받으며 그곳 직원들과 올해 박재삼문학제(제16회) 얘기를 비롯해 잡다한 관심사를 주고받았다. 처음 찾은 이들은 문학관을 둘러보고 벤치에 걸터앉아 있는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는 박재삼 동상 옆에 포즈를 취하고 기념촬영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오솔길을 따라 바다 쪽에 자리한 육각정과 대중가요의 제목인 ‘삼천포 아가씨’ 상(像)을 돌아보기도 했다. 정자에서 보는 확 트인 바다 모습과 일출과 낙조는 가히 일품이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에 찾아왔던 적이 없다.
사천 일정의 마무리 탐승지는 조선 선조 30년(1597) 왜군이 축성했다는 선진리성(船津里城)이었다. 그 이전인 선조 25년에 이순신 장군이 이 곳 앞바다에서 최초로 거북선을 실전에 투입했는데, 이 전투에서 왜선 12척을 완전히 섬멸했던 전승지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조 31년에도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얘기이다. 한편, 우리가 겪었던 왜란을 돕기 위해 파병되었다가 선진리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명군(明軍)과 조선 연합군 전사자의 집단 무덤인 조명군총(朝明軍塚)(경남 기념물 제80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전과(戰果)를 증명하기 위해서 전사한 우리 군사들의 코와 귀를 잘라서 자기 나라로 보내 훗날 이총(耳塚)*을 만들었던 슬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이곳 선진리성 조명군총 옆에는 일본에 있는 이총(귀무덤)의 원혼을 모셔 와서 안장한 무덤도 있다. 그리고 선진리성 주변 완만한 언덕과 비탈을 뒤덮은 천 여 그루에서 벚꽃이 활짝 피어나는 4월 초순경에는 벚꽃축제가 펼쳐진단다.
기행을 마치고 원거리에서 참석한 문우들은 개인별로 교통 사정에 맞춰 귀가 길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나머지 예닐곱은 승용차 두 대에 분승하여 남해고속도로 동진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진주 금산의 공군교육사령부 언저리에서 문우가 경영하는 ‘좋은 인연’이라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꿈같은 하루를 복기(復碁)하는 것으로 계사년(癸巳年) 상반기 문학기행의 공식적인 대미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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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총(耳塚) : 일본의 교토시 동부의 시치조(七條) 지역에 400 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의 명을 받은 왜군들이 12만을 훨씬 웃도는 조선인의 귀나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다가 묻어놓은 '귀무덤(耳塚)'이 있다.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첫댓글 교수님의 기행문에 날의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그날의 추억을 되새김질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