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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동(2024.8.11./ 성령강림 후 제12주일, 광복절 기념, 남북평화통일기념주일)
역사의 파수꾼
시편 130:1-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2주일이고, 광복절기념주일이다.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일제 36년 동안 한반도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런데 해방 79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여전히 죄책도, 배상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은 커녕, 혐한(嫌韓)으로 대응하고 있다. 종군위안부를 부인하고, 심지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최근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을 보면 후안무치하다.
더욱 분개하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저자세로 일관하는 현 정부의 태도이다. 우리는 역사의 파수꾼 역할을 맡겼는데, 그들은 역사적 부역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독립기념관장 임명 과정을 보면 국민으로서 조롱과 모욕을 느낀다. 오죽하면 광복회장이 대통령실 내 일본 밀정 운운할까.
우리나라는 친일 청산을 못한 피해를 지금까지 고스란히 겪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민족이 겪은 간난고초와 선조들의 희생마저 부인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서 잠을 설친다. 지금 우리 시대가 겪는 홧병은 고스란히 역사의 심판으로 귀결될 것이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에게 청동 거울이다. 언제나 깨끗이 닦고, 다시 들여다 보아야할 역사의 거울이다. 만약 우리와 자손들이 그 수난과 수치를 잊는다면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그래서 8.15가 중요하다. 얼마나 깊은 어둠의 시간이었을까? 교회가 3.1절과 8.15를 민족 절기로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성경은 우리에게 끝없이 회개와 반성을 촉구한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겨우 79년이 지난 세월이 아닌, 수천 년 이전의 역사이다.
시편 130편은 참회시이다. 이렇게 격한 감정으로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1).
깊은 곳은 무엇인가? 그곳은 깊은 어둠, 무거운 멍에, 견디기 어려운 죄의식일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깊은 어둠을 빗댈만한 것이 무엇일까? 어거스틴은 자기의 죄를 어두운 심연과 같다고 하였다. 불의가 지배하는 역사의 혼돈 상태를 말할 수 있다.
누구나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다. 인생의 어둠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남의 어둠에 대해 이런 저런 말로 쉽게 말할 수 없다. 다만 들어줄 일이다. 기도자는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를 바라면서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고 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표현한 사례가 있다. 어느 날 저물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의 맞은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그때만해도 갈릴리는 평온한 바다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큰 광풍이 일어나고, 사나운 물결이 부딪혔다. 순식간에 물이 배에 그득 찼다.
밤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두려움은 바람보다 물결보다 더 큰 동요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갈릴리는 낯선 곳이 아니다. 제자들의 고향이었다. 평소 익숙한 환경, 일상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두려웠다. 그동안의 바다에 대한 지식, 배를 운전한 경험, 개인의 능력과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생각이나 경험, 내 몸에 대해 믿음이 가는 것은 안전하고 건강이 보장될 때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
우리의 삶에는 자주 위기가 닥친다. 믿음을 꺾는 바람, 소망을 감추는 어둠 그리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가라앉게 한다. 질그릇처럼 쉽게 깨어진다. 그때, 예수님은 배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울부짖는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감리교회 여성 지도자 김활란도 한때는 민족의 형편을 탄식하고, 부르짖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는 부르짖음에 비유하여, 찬송시(찬송가 345장)를 지었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1절).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성난물 큰 파도 일 때에 저 뱃사공 어쩔 줄 몰라하니 아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2절)’.
그런 김활란도 친일의 덫을 피하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징병정책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는 제 나라 젊은이들을 일본의 전쟁 총알받이로 내몬 교육자요, 교회의 지도자였다. 부끄러운 역사는 회개없이 바로 설 수 없다.
시편에서 기도자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2-3).
그는 죽음의 손아귀에 잡힌 듯 한 곤경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그의 기도가 증언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야말로 그가 곤경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셔서 곤경의 깊은데서 이끌어내어 주시기를 기다린다. 용서의 말씀과 함께 그를 살려주실 것을 간청하다. 그는 안다. 하나님의 길은 죄를 헤아림에 있지 않고 용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사유하심은 ‘용서할 사(赦)’, ‘용서할 유(宥)’ 곧 용서하신다는 뜻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를 안다.
깊은 밤, 깊은 어둠, 사람들은 그 캄캄함에 직면하면 두려워하고 당황한다. 그 어둠은 하나님의 부재를 상징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없음은 희망의 부재라는 더 큰 두려움과 병을 앓게 한다.
2)
본문은 순례자의 노래이다.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예레미야의 눈물의 비가 속에도 이런 아픔과 희망이 담겨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한다. ‘비록 우리가 망했지만, 하나님의 자비 덕분에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심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다시 말하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듯이 하루하루 삶 속에서 자신의 역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이 신앙이다. 기도자는 비록 ‘깊은 데에서’ 부르짖으나, 희망을 놓치지 않고 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본문은 ‘바란다. 기대한다’는 말이 반복된다. 우리말 표현으로 ‘쓸고(苦), 기다릴 대(待)’자를 쓴다. 설레임이 아니다.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기도자는 자신의 고대(苦待)를 파수꾼의 기다림과 비교한다. 파수꾼은 밤을 지키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모든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루의 시작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라고 말한다.
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사상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루는 어둠으로부터 시작하여 빛으로 이어진다. 창조의 사건은 사람의 삶에도 반드시 재현된다.
성경은 말한다. 밤을 두려워 말라. 그것은 구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둠, 나의 혼돈, 나의 공허가 나를 새롭게 창조하는 질료가 된다. 이것이 신앙이다. 시편의 저녁기도를 보면, 기도자는 밤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아침을 맞이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성경에서 말하는 깊은 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이전의 삶이다. 그 반대로 밝은 낮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 빛 가운데 살아가는 길, 곧 깨어있는 삶이다. 어두운 박해의 시대를 겪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렇게 고백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예수님은 그 무섭고 두려운 캄캄한 갈릴리의 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파수꾼은 지금 밤이 끝없어 보이더라도 마침내 아침이 동터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파수꾼의 마음으로 지금 ‘깊은 데에서’ 부르짖는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하루밤만 지키는 불침번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파수꾼으로서 길고, 멀리 희망을 내다보는 사람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밤을 4등분한다.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막 13:35)이다. 아마 파수꾼의 교대근무 시간일 것이다. 여기에서 새벽은 마지막 밤이었다. 밤의 마지막 단계, 새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출 14:24, 삼상 11:11)을 의미하였다. 십자가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깊은 어둠이고, 부활은 영원한 아침을 맞이한 사건이었다.
누구나 기다리는 아침이 있다. 지금 나를 돌아보라. 나는 여전히 깊은 어둠 속에 있는가? 혹은 동이 터 오는 아침인가? 아니면 대낮에 빛 가운데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어둠, 공허, 혼돈의 밤을 지나 새로운 창조의 신앙을 품기를 원하신다. 성경의 아침은 창조의 새벽과 더불어 온다. 생명이 다시 깨어나는 약동이 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시 143:8).
이것이 일용할 믿음이다. 일용할 희망이다. 일용할 기도가 되어야 한다.
3)
이제 기도자는 개인의 어둠을 넘어서 자기 민족의 어둠에 대해 고백한다. 기도자는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회복을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
시편의 기도자들은 인간 권리가 상실되고, 자유가 억압받으며, 진리가 외면당하고, 정의가 사라진 현실 곧 역사의 밤을 암울하게 노래한다. 그러나 이제 그 절망 속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리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8).
오늘은 광복절기념주일이다. 광복(光復)은 빛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광복은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숱한 선각자들의 눈물과 피와 희생 덕분이다. 그들은 역사의 파수꾼이었다.
남과 북의 교회는 광복절을 ‘남북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이라고 정하였다. 아직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단의 어둠이 여전히 깊다. 우리는 여전히 자유를 갈망한다. 남이든, 북이든 자유롭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역사의 파수꾼’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2002년 봄에 평양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일이 있다. 그때 독일에서 방문한 4인이 특송을 불렀다. 오늘 우리가 부를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다. 특송을 부르고 들어오는 내게 옆에 앉은 리성봉 목사가 이런 말로 추켜 세워주었다.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은 이 찬송을 못 부르게 했어. 모두 백지로 가려두게 했단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계속 불렀단 말이지.”
리성봉 목사는 5년간 조선기독교연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그 이전 10년 동안은 강원도 도연맹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내가 1995년 연초에 이영빈 목사와<새누리 신문> 희년 특집 인터뷰를 할 때 그가 “1980년에 원산을 방문했을 때 그곳 가정교회를 방문했는데, 인도자가 이성봉 장로였다”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났다.
나는 예배 도중에 틈틈히 궁금증을 풀었고, 그분 역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1923년 생인 그는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중국 연길로 건너가서 20년을 살았다고 한다. 거기에서 연길감리교회(도인권 목사)를 다녔는데, 중학생부터는 성가대 활동을 하였다. 어릴 때에 친한 동무였던 도인권 목사의 작은딸 도기봉이 지금은 브라질 쌍파울로교회 권사인데, 작년에 평양 봉수교회를 방문 했다고 하였다.
동갑내기인 그들은 57년 만에 만났는데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예전과 똑같아, 금새 알아보았지.” 아마 사람들의 눈 역시 나이에 따라 늙어가나 보다. 리 목사님은 내가 이북교회의 뿌리와 역사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도록 의외의 도움과 기회를 준 셈이다.
교회는 이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아픔과 눈물, 절망과 깊은 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평화는 없다. 하나님은 지금 깊은 곳, 어둠 가운데 있다고 여기는 그 사람을 찾으신다. 그는 아침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대낮인지, 어둠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부름을 듣지 못한다.
우리 색동교회의 비전 중 하나는 ‘진리 안에서 역사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깨어있는 하나님의 자녀, 빛 가운데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어둠에 빛을 비추시길 빈다. 늘 우리의 깊은 데에 찾아 오셔서 위로와 회복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그런 광복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