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빌4:5절 2023.5.28. 주일오전
오늘 본문 역시 우리의 관용이 아니라 주님의 관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바울이 ‘너희 관용’이란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행하는 관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관용이 주어진 자에게 ‘너희 관용’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에게 ‘너희 관용’이란 말을 한다면 인간이 스스로 행하는 관용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관용’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관용이 주어진 성도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관용을 보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관용을 알게 하라는 뜻입다. 즉 빌립보 교회가 받은 주님의 관용에 대해 다만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임으로서 다른 이들을 주님의 관용으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관용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렘13:14절에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관용이란 말을 언급하는데 이 구절에서 관용치 아니한다는 말은 심판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관용치 아니한다, 아끼지 아니한다는 말들이 마지막의 ‘멸하리라’는 말과 연결된 것을 볼 때 관용은 심판할 자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롬9:22절의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는 구절에서도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관용’은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라는 구절과 연결된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된 구절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용으로 죄가 용서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는 성도는 그 누구도 죄에 대해서 떳떳한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얼마든지 떳떳하고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에 허물 있는 자에게 큰소리치며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며 타인을 공격하게 되고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 책망을 하게 되며 자신에게 실수한 자에 대해 용서하고 안하고의 권리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벗어나 있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용하심으로 죄인의 죄가 가려지고 용서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용을 알고 마음에 두고 사는 자라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관용은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 관용을 보이라’는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관용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용은 진노의 대상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써 보여졌습니다. 진노의 대상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만의 고유 권리입니다. 그 누구도 이 권리에 대해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도한 자리를 벗어나 있을 때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처리할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 권리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보류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용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해 반대한 무리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심판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하심으로써 피조물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관용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예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관용의 의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를 고집하는 주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관용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지 않고자 하는 자세가 관용인 것입니다. 성도가 관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몫을 잃지 않고 챙기려는 습성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기억하면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할 때 관용보다는 판단과 다툼이 나오게 됩니다. 자신의 권리와 몫을 주장함으로써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성도가 관용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관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당하게 한 불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는 분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를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행한 대로 보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벧전2:21~23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음을 말합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예수님 스스로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신 것이고, 고난을 받으시되 그들을 위협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관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관용을 보이라는 말을 하고 이어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관용을 보이라고 말하고 왜 갑자기 주께서 가까우신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오셔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질 때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관용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이렇게 당할 수 없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매하게 당한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게 되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싸우게 됩니다. 따라서 욕하는 자에 대해서 함께 욕하게 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보복할 기회를 찾기도 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에서 성도의 관용이 보여지고 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도의 행위가 아름답다기보다는 그가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관용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용하라는 것이 어떤 부당한 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세상 것을 위한 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쉽게 판단하지만 그것은 심판자이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에는 우리도 예외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욕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게 한 그들만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됨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2: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합니다. 관용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고 모든 원수 갚음을 주님께 맡길 때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악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항상 판단은 나를 중심으로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도다움은 불의를 행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불의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있어야 할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억울함을 받을 수 있고 뜻하지 않은 오해로 괴로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겪든 그에 대한 보복을 마음에 두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까우시고 그분이 오시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누군가에 대한 행위를 보고 불의하다는 확신이 드신다면 그것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그 불의함으로 심판 받을 그를 생각하며 불쌍히 여기는 성도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