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楊貴妃
조현상
사진 동호인들과 함께 유월의 새벽공기를 가르며 네 시간을 달려간 곳은 ‘함양 한들 플로리아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경남 함양이었다. 그렇게 큰 꽃밭은 처음 보았다. 경지 정리가 잘된 30여 만평의 들판에 바둑판처럼 심고 가꾼 양귀비꽃과 안개 꽃, 수레국화, 금영화 등 색색의 꽃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전국에서 무려 80여 만명이 이 꽃길을 사뿐히 밟고 갔다니 그들에게서 샘솟은 앤돌핀은 얼마나 될까?
뜨거운 유월의 태양에 송알송알 땀이 쉴 새 없이 솟아났지만 양귀비에게 홀린 듯 카메라 셔터를 분주하게 눌렀다. 마치 절세미인과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거리는 꽃잎에 렌즈를 바싹 들이대어 찍기도 하고, 쭉 뻗은 미녀의 뽀송뽀송한 솜털다리의 각선미를 치켜보듯, 아니, 곱고 잔잔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쓰다듬듯 여러 각도에서 양귀비꽃의 아름다운 자태와 그의 숨결을 내 가슴과 필름에 차곡차곡 주워 담았다. 황홀경이었다.
양귀비는 일명 앵속, 약담배 또는 아편 꽃이라고 부른다. 꽃은 5~6월에 붉은색, 자주색, 흰색, 연분홍색 등 여러 빛깔로 핀다. 그러나 화려함에 비하여 향기는 은은하다. 덜 익은 열매에 상처를 내어 채취한 유즙을 건조시키면 까맣고 찐득찐득한 아편으로 태어난다. 모르핀, 파파베린, 코데인 등의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어 중추신경 계통에 작용하여 진통, 진정, 지사 등의 효과가 있다. 옛날에는 집 근처 채마밭에 몇 그루 정도의 양귀비를 심어 열매와 줄기를 채취해 두었다가 배탈이 나거나 기관지염이 생겼을 때 민간요법으로 요긴하게 써왔다. 신통하리만치 잘 듣는 약이었다. 일본이나 그리스,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는 아편을 합법적으로 생산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드넓은 함양 벌판에서 아름다운 양귀비꽃 축제에 모습을 드러낸 꽃은 개양귀비로 일명 꽃양귀비라고도 한다. 원래 양귀비는 열매에서 젖빛 같은 하얀 진액(아편)이 나오고 줄기에 털이 없이 매끈하지만 개양귀비는 진액도 없고 줄기에 많은 솜털이 나 있어 쉽게 구별되는 소위 짝퉁 양귀비이다.
당나라 6대 현종(玄宗 685~762)의 후궁이었던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원래 그의 며느리였다. 양귀비는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녀의 본명은 양옥환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하여 그녀를 가리켜 수화羞花라고도 불렀다. 양귀비라는 꽃 이름도 수화 양귀비처럼 예쁘고 아름답다하여 붙여졌다.
그녀는 현종 황제의 아들인 수왕 이모李瑁의 왕비가 되어 5년이 지난 어느 날 시아버지인 현종의 눈에 띄었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넋을 잃은 현종은 결국 그녀를 자기의 후궁으로 삼는 패륜을 저질러 귀비貴妃로 책립하였다.
백거이白居易가 현종과 양귀비와의 사랑을 읊은 <장한가長恨歌>를 보면 ‘후궁가려삼천인後宮佳麗三千人’ ‘삼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이라는 시구가 있다. 즉,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이 있었지만 삼천의 총애가 모두 그녀에게 있다’는 뜻이다. 현종은 그녀의 구름 같은 귀밑머리와 꽃보다 아름다운 옥안에 매료되어 짧은 밤을 한탄했다. 해가 중천에 떠야 기상하고 정사政事보다는 연회에 정신을 팔았다. 해가 거듭될수록 국운이 기울어 결국 심복이던 안록산安綠山의 반란으로 사랑하는 양귀비를 목전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명을 내려야하는 수모를 당했다. 가인박명이라 했던가. 그녀는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上天願作比翼鳥)/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在地願爲連理枝)”라는 시를 읊으며 서른여덟의 청춘을 외줄에 걸어 타의에 의한 자결을 했다.
경국지색으로 아름다운 양귀비! 그녀의 미모처럼 예쁜 양귀비꽃은 그들의 불타는 사랑처럼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더욱 빨갛게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드넓은 함양에서의 양귀비꽃과의 만남은 첫사랑처럼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조현상 / 2004년 《책과 인생》(수필). 《조선문학》(2009년, 시), 《시조시학》(2016년, 시조)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세월』, 시집 『명주솜 봄햇살』 외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