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터울 나의 작은 형님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누워있다. 40년 가까이 그러고 있다. 아흔이 다 된 노모는 유월만 되면 우울증을 앓는다. 당신 사십 대에 팔팔한 이십 대 자식을 앞세운 까닭이다. 나 또한 유월만 되면 안절부절못한다. 꼬박꼬박 묘지 참배를 하는 성의 있는 동생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맘만 힘들다. 어느 시인은 '시간이 사람을 죽인 증거로는 수유리가 있고, 사람이 사람을 죽인 증거로는 동작동이 있다'고 했던가. 1977년 그 당시 동작동이 포화상태라 산등성이 거의 마지막 묘역에 형님은 자리 잡았다. 유독 무더웠던 유월에 입대한 지 넉 달 만에 훈련 중 순직한 것이다. 고3 때에 겪은 그 충격으로 사춘기 시절 롤 모델을 잃은 나의 대학생활은 방황과 좌절 그 자체였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느 대학동창은 술만 먹으면 울부짖던 이상한 아이로 나를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충일이 있는 유월, 나의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 풍경이다.
군대에 관한 과도한 공포감으로 나는 학군단 입단이라는 역설적 선택을 한다. 그런데 부마항쟁이 벌어졌던 바로 전날 대운동장에서 입단체력검사를 하고, 다음 날 바로 그 운동장에서 데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나의 머리는 혼돈과 불안 그 자체였다. 까다로운 신원조회 끝에 어렵사리 학군단에 입단한다. 그 후 거센 후보생 생활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 후 광주보병학교에 입교한다. 그런데 그때 전남대, 조선대 출신의 같은 내무반 동기들에게서 들은 오월 광주의 참상은 경악 그 자체였다. 대학 때 알고 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큰일이 수습된 지 이 년이 지났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공포와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옆 침상의 광주 출신 동기의 악몽과 잠꼬대를 통해 절감했다. 이 친구 또한 군대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장교단에 입단한 사연이 나와 비슷해서 꽤 친하게 지냈다. 그해 유월에 각자 자대 배치를 받아 헤어지고 말았지만. 이 또한 나의 유월의 기억의 한 조각이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헌병 장교 출신임을 평생 자부심으로 안고 사신 분이다. 처가 식구들은 지겹다고 듣기 싫어하는 군대 무용담을 맞장구쳐드리는 둘째 사위를 무척 좋아하셨다.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이 직접 전투를 겪었다는 강원도 인제, 대구 부근 다부동, 전남 순천 일원 등 6·25전쟁 당시 전국의 격전지를 모시고 다녔다. 그때 복잡미묘한 느낌이 얼굴에 피어오르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결국,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6·25 전사자 패널 앞에서 감정에 겨워 털썩 주저앉으셨던 장면도 유월 기억의 한 편린이다.
서울 명문대 법대를 다니던 사촌 동생의 구속은 온 집안의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좌경운동권 배후 등 무시무시한 죄목임에랴. 투옥 중인 홍성교도소에서 면회하고 나오던 1987년 유월의 바람은 왜 그리 후덥지근하던지. 그해 서면, 남포동을 필두로 전국을 휩쓸던 유월항쟁의 함성이 한국 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게 될 줄은 정작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대학원생 신분인 나는 서울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팸플릿이나 영어, 일어 원서 등을 부지런히 구해 읽으며 나름대로 교내 잡지나 대학신문 등을 통해 사회비판적 주장을 펼쳤다. 지금 생각하면 조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시국비판 일변도의 거칠기 짝이 없는 글들이다. 하지만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가는 한 청년의 우국격문(憂國檄文)이라고 위안하는 것도 유월의 또 하나의 기억이다.
1960년대 초, 시골에서 부산으로 오신 숙부님은 평생을 철강회사에서 그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생활하셨다. 40여 년을 앞만 보고 성실하게 근무한 대가로 지금도 당신 댁 벽면에는 당시 대통령의 이름과 봉황무늬가 선명한 산업훈장이 가보처럼 걸려 있다. 그 훈장은 산업화의 진정한 역군이셨던 숙부님의 성실성에 대한 이 사회의 최소한의 보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영광의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하다. 산업재해 개념이 거의 없는 시절이라 관절의 깊은 질환, 순환기계통의 다양한 질환이 철강 노동자들의 전형적인 산업질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퇴직 후 한참 지나서이다. 그로 인해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계셔서 마음이 아프다. 그 훈장증에 적힌 포상 날짜인 유월 어느 날도 나의 유월의 복잡한 기억 가운데 하나다.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 해방, 건국, 전쟁으로 채워진 근대화, 가난과 헐벗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 군사독재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주화의 국가적 과제를 힘겹게 헤쳐나왔다. 근대화기에는 번듯한 국민국가를 만들고 지키는 것, 산업화기에는 가난과 빈곤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민주화기에는 사회 전체의 민주적 절차를 정착하는 것이 시대적 가치이자 온 국민의 공감대였다. 그러나 그 도도한 물결 속에 상처받은 이들, 아픔을 겪은 가족, 소외되었던 계층이 너무나도 많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나의 가족사에도 국가를 지키다가 순직한 작은 형님, 평생을 전쟁의 기억 속에서 살다 가신 장인어른, 산업화의 상징적 역군인 숙부님, 민주화의 여정에 젊은 청춘을 바친 사촌 동생 등 대한민국 건국 이후 60여 년의 시대 흔적이 한 가족사에 아프게 상감(象嵌)되어 있다.
나의 이 모든 기억의 저수지인 아픈 유월이 자랑스러운 유월로 될 수는 없는가? 이 사회와 국가가 시대의 희생과 소외자들을 좀 더 따뜻하게 포용할 수는 없는가? 나아가 보훈(報勳)의 의미를 더 확대할 수는 없는가? 국가가 공훈을 세웠거나 희생된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마련해 주는 일련의 보상제도인 보훈제도가 과연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의 시대적 흐름을 잘 보듬고 있는지를 이 시점에서 근본적으로 되물을 일이다.
근대화의 과제인 호국(護國)보훈의 의미는 여전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나아가 산업화의 제민(濟民)보훈, 민주화의 참여(參與)보훈의 의미로 그 범위가 확대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탈북자 구제 및 각 분야의 통일사업 등 민족 최대의 과업인 통일(統一)보훈은 어떤가? 나아가 최근 일자리 부족의 난세(亂世)를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선구자들의 경세(經世)보훈으로까지 말이다. 그래야만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시대적 좌표를 제시할 수 있지 않겠나.
첫댓글 호국보훈의 달 - 유월
소외됨, 배제 없는 그런 추모의 달이 되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