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자 위가 관구검을 보내어 반격할 정도로 그 위치는 상당히 중요한 곳
이었습니다. 물론 서안평의 위치를 압록강하류 단동, 또는 봉성, 또는 요하하류 해성, 또는 난하
하류, 심지어는 요 임황부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우선 통설에 따라 서안평을 단동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단동이란 증거는 마지수가 압록수로도 불리었고 마지수가 국내성을 둘려싸고 있었다는
전한서와 구당서의 기록입니다. 우선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고구려는 남쪽경계는 살수
였습니다. 살수는 흔히 청천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평양의 낙랑국(?)의 땅을 차지하
여 낙랑군을 만듭니다. 그때부터 고구려와 낙랑군의 경계는 살수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나라가 바다를 통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만약 서안평이 낙랑과 요동을 육지에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면 차라리 육지에서 서안평을 거처서 오면 되지 않을까요. 왜 바다를 건넜을까요?
아마도 동부도위(개인적으로는 낙랑군이 처음에는 요동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요동을
가르는 천산산맥이 단단대령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멸망 후 한은 육지로 평양남도와 통하
는 거점을 상실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통해서 평양남도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요동군은 천산이서를 중심으로 천산이동의 요동의 해안가만 차지한 기형적인
모습을 한 군 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서안평이 단동이라면 단동까지 차지했을 것입니다. 즉 서
안평으로 가는 통로만 확보한 것이죠.]
그러면 이제 서안평이 왜 중요한지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오나라가 요동과 교류할 때 서안평
(안평구)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서안평이 중국의 황해무역독점을 위한 기지라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즉 평양남도의 낙랑군과도 서안평을 통해야만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해로
는 주로 발해만을 돌아서 가는 길이였기 때문에 서안평은 고구려가 해상권을 장악하느냐, 중국
이 해상권을 장악하느냐가 달린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위치상의 불합리도 있지만 이
곳을 요동태수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이 곳을 장악하면 중국은 우
선 낙랑군과 통하던 바다통로마저 빼앗기게 되고 낙랑은 자연스럽게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산
동을 거쳐서 가려고 해도 이미 고구려는 오와 교류할 정도로 해상력이 강하였습니다. 즉 고구려
해상력의 방해로 고립될 수밖에 없던 것이죠. 낙랑이 왜 중요할까요? 바로 낙랑이 동부도위를 대
신하던 최후의 세력(현도군이 무순으로 옮긴 후 낙랑의 동부도위가 옥저를 관할하였을 것 입니
다. 그러나 낙랑의 동부도위가 망하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결국 낙랑의 위치를 평안남도로 옮
겨서 이 곳을 대신 통치하게 한 것입니다. 옥저가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그 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고래나 바다표범이 당시 경제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이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이 곳을 고구려가 차지하면 그들은 낙랑군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낙랑군에서 오는 경제적인 이익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위(당시는 삼국시대라서 위는 오와
촉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우세한 경제력도 필요하였을 것입니다.)는 고구려를 공격한 것 입니다.
아마도 낙랑군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은 상당한 것이었을 것이고 또 이곳을 차지하면 군사적
으로 한과 고구려가 연합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공손씨가 낙랑과 대방을 공격한 이유
는 바로 태조왕이 마한(백제라고 생각합니다)과 연합하여 요동을 공격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고구려와 마한이 도와주러 오는 통로를 미리 막아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공손씨
는 고구려와 싸울 때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입니다. 즉 서안평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
로나 중요한 낙랑군과 통하던 유일한 통로인 것입니다. 고구려 역시 낙랑을 차지하여 평양남도
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당시 낙랑군과 요동군이 유일하게 통하는 통로인 서안평을 친 것
입니다. 그리고 서안평을 친 이 후 고구려는 손쉽게 낙랑군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요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여 모용씨를 요하유역으로 몰아내고 요동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나중에 고구
려는 요하유역마저 차지하여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한편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서지역의 대릉하 유역으로 갔다가 진말(아마도 동진의 사마덕종과
사마덕문 때에) 백제의 공격을 받습니다. 낙랑군이 우선 점령당하고 뒤에 대방군이 430년에 북
위에 의하여 패지 됩니다. 그리고 북위는 이를 공격하나 오히려 동성왕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러
나 북위는 백제가 계속 요서에 있게 놔두지 않습니다. 아마도 북위는 백제가 북평과 조양(유성)
사이의 난하하류를 차지하자 조양을 거처서 대릉하유역을 계속 지배하여 백제를 포위합니다. 그
러나 백제는 아마도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망할 때까지 가진 것 같습니다. 뒤에이 지역에 있
던 백제인들은 나중에 돌궐에게 투항합니다. 이 후 발해가 마도산을 공격하나 요서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차지하지 못하여 결국 거란에게 망하고 맙니다.
[백제는 진말이라는 시기에 요서에 진출합니다. 흔히 근초고왕 때라고 하지만 과연 모용씨와 아
무런 마찰이 없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아마도 여암이 모용씨에 반기를 든 이후 요서지방의 낙
랑, 대방사람들은 차츰 지배민족인 모용씨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 백제는
일본을 완전히 백제의 세력권으로 만든 후 이 지역에 대하여 손을 뻗게 됩니다.
당시 백제는 아마도 그들에게 다시 지배권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반대 없이(?) 이 지역을
차지합니다. 아마도 중국인이 백제에 많다는 것은 이미 낙랑, 대방사람들이 백제인과 융합하였
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아마도 진서에 기록이 없는 것은 우선 진서가 당대에 지은 책
이고 너무 당시 백제와 교류가 적어서 이러한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송서에 나온 이유는 그때
는 이미 백제와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미 백제는 요서를 지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제서
에 보면 나오는 7군태수는 아마도 전시의 임시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결과적으로는 북위
가 이긴 것이죠.]
[아마도 근초고왕이 낙랑태수의 칭호를 받은 것은 실질적인 것일 겁니다. 당시 낙랑군은 발견되
는 유물로 보아 이미 황해도에 있는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곳이 남평양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즉 백제는 남평양(대동강 이남의 평양)까지 공격하였고 이 일대(고 낙랑, 대방군)에 대
한 지배권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낙랑태수라는 칭호는 결코 대외적인 칭호는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
[고구려에게 낙랑태수를 준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이미 살수이남, 대동강 이북지역을 차지하였
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에게 준 낙랑태수도 실질적인 칭호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신라에게도 낙랑태수를 주었던가? 아마도 당시 신라가 한수유역을 차지하자 중국에서
는 낙랑과 대방이 한(아마도 한수유역의 백제, 신지는 백제가 마한의 남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
어들이기 위한 대외적 가명이라고 생각된다.), 왜를 복종한 적이 있음(아마도 복종하였다는 말
은 그들이 조공을 바치거나 아니면 형식적으로 복종하였을 것이다.)을 알고 신라에게 낙랑태수
의 칭호를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