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교 농장 평상,
김 교수, 넥타이 차림의 중구, 종문, 김 청자. 나.
“6일 전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흘렀군.
“저희도 이젠 중견사원 됐어요. 그리고 저, 월남 갈지 몰라요.
“거기 현장이 있나?
“요즘 다들 난리잖아? 우리 회사에도 생기는데 전쟁터니까 빠릿빠릿한 젊은 친구들 위주로 뽑는 대. 아마 나도 낄 거 같아.
“그런 소문 돌더라. 아무래도 다녀오는 게 좋겠지?
“그럼. 어차피 우리 목표도 해외 현장이니까.
“오파상, 잘 돼가요? 하 선배
“그게 뭐 돈 벌려고 하는 건가? 공부하는 거지.
얼마 전 이태리 다녀왔는데 노바라라고 밀라노에서 30분 거리야.
화면) 노바라 시가지, 코가 깨진 흉상들,
벽감 속 성모상, 거리의 예쁜 여인들.
“인구 5만 쯤 되는 소도신데 규모답잖게 고색창연한 유적들이 많아.
곳곳에 코 깨진 흉상들에 이끼긴 건물, 니치마다 모신 성모상,
무드 있더라야. 게다가... 여자들이 기가 막히게 예뻐,
(낄낄 댄다.)
여행하느라 오래 굶어 그렇게 보인 거 아냐?
연탄불에 노가리 굽던 종문이 초를 친다.
“그랬을지도 (헤벌쭉.),
여하튼 길가는 여자들 절반쯤은 돌아볼 만큼 예뻐. 거 신기하데.
“거긴 카에자르의 갈리아 전초기지였어.
제정 로마의 발상지 격인 유서 깊은 장소니 당연히 유적도 많았겠지.
(음흉한 표정)
" 짜아--식들 예쁘다 싶은 갈리아 여자는 죄 잡아와서... 히히
(흘겨보는 청자)
"예나 이제나 사내들이란 그저...
“요즘 OPEC에서 기름 값을 흔들던데 슬슬 시작 아닐까?
신문 기사) 오일 쇼크, 두바이 유 100% 인상.
OPEC, 서구의 이스라엘 지지 철회 압력
오일 쇼크로 세계 경기침체 우려.
서재,
탐험기를 보는 동수. 사전을 찾아가며 ATLAS 지도 해설도 읽는다.
화면)
AD 1,000년의 미 대륙 바이킹.
향료 항로를 찾아 떠나는 커티 샤크형 범선들,
피터 대제의 명을 받는 베링,
우랄에서 동부 시베리아로 가는 썰매와 마차들.
알라스카를 누비는 베링 선단.
개썰매로 타이가 삼림을 뚫고 툰드라 빙원을 달리는 환상 속의 동수.
부산의 해양대 기숙사로 떠나는 동수
1973년, 일우건설 개업식
서교동 택지개발 현장. 마포/여의도 개발 기사
택지조성 대상에 포함된 서교 농장.
말죽거리 농장간판을 다는 나와 친구들,
고속도로 건설현장.
해양대 졸업식장의 동수와 가족들.
일본 S라인 제복의 동수
일우 사무실,
“하 선배, 종문이 얘기 들었어요?
“응, D건설 중동 수주건? 큰 건 터질 거라던데.
“기술적으로 어려울 것 없는 막 공사래요. 하도급체 등록하라던데?
“할 수만 있으면 좋지.
근데 쟁쟁한 업체들이 죄다 뎀빌 텐데 잽이나 될까?
“에에--이, 선배답잖게,
맨 땅에 헤딩해 세차장 만든 분이 당당한 건설업체까지 가지고 우는 소리해요? 게다가 D건설 관리과장이 종문인데, 우리만큼 막강한 내통자 가진 업체도 드물걸요.
(계면쩍게)
"그런가? 그러 공사지명원을 준비하지. 난 종문이 한번 만나보고.
D건설 사옥,
로비의 나에게 손을 흔드는 와이셔츠 바람의 종문.
“하 선배, 여기
(반갑게 악수)
"몇 달만이지?
(주위를 살핀다)
"여긴 눈이 많으니 주차장으로 가죠.
지하 주차장, 차 속의 두 사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하도급체 평가항목, 서두르세요.
해외공사 실적이야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로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니
결국은 인력확보능력, 토목공사 시공경력 비중이 제일 커요.
해외인력 송출체계 정비하고 기능공 모집광고 때리죠.
광고도 실적으로 평가되니까.
“시공 경력은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을까?
“그건 청자한테 말해 놨어요.
진행 중인 서울시 개발공사는 물론이고 응찰예정도 모두 수주실적으로 올리세요. 급한 건 광고부터 시작해 기능공을 확보하는 겁니다.
“음, 알았어.
종문일 보니까 힘이 생기는데.
“하 선배도 참, 이게 어디 남의 일입니까?
김포 공항
현장인력 송출에 바쁜 김청자, 중구, 나
줄선 기능공들. 출국 수속으로 부산하게 오가는 김 청자.
“드디어 1진이 떠나네.
“정말이지 지난 석 달은 악몽 같았어. 기능공 면접해야지.
여권 수속해야지. 하도급 신청심사 받아야지.
신원조회 때마다 건수 잡았다고 경찰은 집적대지.
“어쨌든 중동행 티켓은 땄으니 다행이지요.
“종문이 없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벌개진 김 청자가 씩씩 대며 다가오더니 쏘아본다.
“이 바쁜 와중에 무슨 잡담들이셔?
저기 새치기 하는 녀석들이나 막아.
머쓱한 얼굴로 기능공들을 향하는 두 사람.
1974년,
소공동 해남 빌딩, 3, 4층이 모두 일우건설 차지다.
방마다 가득한 책상, 직원들.
중구의 방 (결재판을 든 과장)
"부장님, 이 건은 이번 주말까지면 되는 거지요.
“음, 시방서 몇 군데 손봤으니까 수정해.
“예. 알겠습니다.”
물러가는 직원과 엇갈리는 종문.
“영업부장 노릇 할만 해?
“어, 왔어. 좀 바빠.
아무래도 시방서 작성파트를 보강해야할 것 같아.
근데 야. 그런 걸 일일이 말해야 돼? 알아서 좀 챙겨주라.
이제 우리도 명색이 중견업체 잖아?
관리부에서 알아서 좀 여유있게 뽑아 달라구.
“가급적 현장에서 승진 시키려고 그래.
모르는 게 펜대 잘못 놀리면 현장에서는 죽어나거든.
“그건 그래. 그거야 유능한 관리부장께서 알아서 하시고.
어디서 데려오든 제발 사람 좀 주라.
이런 식으로 일이 늘다보면 조만간 큰 사고 나.
지난 번 H건설 사건도 결국 사무능력이 딸려 터진 거야.
“하이, 와까리마시다. 부쪼오.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부장님.)
신천지
“하 사장, 언제 식사나 합시다.”
한동안 뜸 햇던 김 교수다.
곱게 다린 모시 옷으로 나타난 그는 에어컨 바람에
연달아 재채기를 터트린다.
“개도 안하는 오뉴월 감기 들겠구만.
북창동 전주 중앙회관
“재력가께서 아직도 이런 서민식당을 출입한다니 반가워.
“세차장 노가다 출신 아닙니까? 근본을 잊지 말아야지요.
“그런 생각이 참 귀해.
살림이 피어갈수록 인간은 천박해가는 세상이라.
여전히 거칠지만 예리하다.
“자꾸 그런 말씀하시면 학교에서 미운 털 박힐텐데요.
“그래 봤자 지. 나야 별 볼일 없는 여행가 한량일 뿐인데.
“무슨, 저명한 사회 지도층이신데.
“예끼, 지도층이 더위 먹고 다 죽었대?
“십년쯤 전인가 박통이 독일 갔던 적 있지? 뤼프케 대통령 만나고,
“예, 그때 광부, 간호사들 사연이 많았지요.
“그래, 나 감동 먹었댔어. 이런 양반이면 믿어도 되지 않겠냐,“
맥주에서 소주로 바뀌었다.
소주를 좋아하지만 맥주부터 찾는 김 교수다.
“하지만 그 비전에 감읍하는 자들. 정글의 포식자들이 문제야.
근데 묘한 게 그 작자들이 일은 제법 한단 말야,
워크 홀릭과 천민자본주의는 짝궁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하지만 꼴 사나운 건 어쨌든 꼴사나운 거지.
그런 거 보기 싫어 자꾸 해외로 떠도는지도 모르겠어.
식상한 얘기도 그가 하면 신선해진다.
너무 좋거나 독한 환경에선 문명이 싹트지 못한다.
에스키모, 폴리네시아처럼.
토인비의 말을 잘 인용하는 그는 사회현상을 언제나
문명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노마드 시대가 온답니다. 일부는 이미 와 있고...
다국적기업이 신시장 30% 먹긴 여반장이라지만 하다보면
추가 1% 확보에 드는 공력이 들어간 것과 맞먹는 임계점이 온대요.
이 경우 그들은 미련 없이 발을 빼
새로운 30%를 찾아갑니다.
순식간에 움직이죠. 수익이나 세금 피난처를 찾아...
“바꾸는 데 드는 공력이 새로 하는 것보다 크다면 어쩔래, 뭐 이런 얘긴가?
“천적에 포위된 이스라엘은 유지Cost가 너무 비싸다.
하지만 구약이 있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이게 미국의 딜레마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얘기들도 했었지요.
선입관과 과거에서 자유로운 신천지.
학창 시절의 리포트, 북극권의 꿈.
“그런데 하 사장, 개척에 필요한 게 돈만은 아니잖아?
“....?
가까운 조선호텔 커피숍.
맥주를 주문하면 길다란 치즈 스틱을 무제한 서비스 한다.
공짜 치즈 스틱에 맛들인 김 청자와 자주 왔었다.
“요즘 말이지, 인력 시장이 섰어. 해직기자들.
그제야 감을 잡았다. 유신체제와 반체제인사. 변증법적 현상.
1974년의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는 기자 대량해고로 이어졌다.
언론이 침묵하자 이들의 소문은 은밀한 유언비어로 퍼져갔다.
“ 갹출한 주머니 돈으로 종각 뒤에 소굴을 열었대.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서 미운 털 박힌 자들을?
김 교수 같은 괴짜 아니면 힘든 말이다.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리라.
“사회사업 하자는 건 아냐. .
우리 프로젝트, 고급 인력이 아쉽잖아. 이건 기가 막힌 찬스야!
여전한 설득력. 세상살이에 물들지 않는 것도 재주였다.
말죽거리 농장의 지리자료실을 내주기로 했다.
회사 입장을 배려해 서류상으로는 임대료 받는 걸로 하고. |
첫댓글 얘기 벌어지는 판이 "불모지대"처럼 스케일이 크고
시점은 불모지대보다 더 다이내믹합네다.
등장인물들 대사도 다양한 관점이어서 누가 읽더라도 부담이 없을 듯.
너무 극찬했나요?
사실입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