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호수 대청호 둘레답사 8월 16일 장소 대청호주변 중봉 조헌묘소, 대청호 옥천 한반도지형, 대청호의 비단물결, 청마리 돌탑, 대청호의 오지마을 높은벼루. 답사길 : 37번도로-인포삼거리-575번도로 말목재-학촌재-도농리-조헌묘소-연주리 안남초교-둔주봉 고개-둔주봉전망대- 옥천 금강의 한반도지도 - 연주리- 독락정-금강의 물결따라-청마리- 금강의 오지마을 높은벼루
지난 7월 답사에서 찾아본 옥천군 안내면에서 37번도로를 따라 장계교로 이동. 인포교 삼거리에서 좌회전 575번 도로를 따라 말목재를 넘어 안남면으로 이동. 인포삼거리 우측으로 보이는 대청호가 푸른색을 띠고 있다.
도농리에 도착 중봉 조헌묘지 직전에 있는 신도비에 들려 살펴본 후 산소로 향한다. 중봉께서 후학을 기르던 후율당은 뒤로 보이는 큰음달산을 넘어 안내면 도이리에 있다. 도이리에 사당과 묘소가 함께 있었으나 1636년 인조 14년 이곳으로 이전 하였다고 한다.
조헌묘소 전경 하마산을 배경으로 송림이 우거진 아늑한 곳이다.
네이버에 올라온 내용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배천조씨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헌이 1592년(선조 25) 700의사와 함께 전사하자 동생 조범(趙範)이 시신을 거두어 옥천군 안읍 도리동에 장사지냈으나 1636년(인조 14)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역은 330㎡(100평) 정도이고 상석(床石), 문인석, 망주석(望柱石)이 갖추어져 있다. 묘비는 봉분 앞에 2개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시열(宋時烈)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면서 조헌의 공적을 기록하여 세운 것이다. 묘에는 제당(齊堂)이 설치되어 묘역을 관리하고 있으며 제당으로부터 100m 아래 마을 앞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중봉 충렬제(忠烈祭) 때는 옥천군수가 초헌관(初獻官)이 되어 제사를 지낸다. 조헌은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관 권지(權知), 호조·예조좌랑, 전라도사, 보은현감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와 함께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어 금산에서 수만의 왜군을 상대로 하여 700명의 군사와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얀 대리석이 아닌 자연석으로 만든 오솔길이 송림과 어울리고. 풍광이 수려하다. 뒤에 보이는 산이 큰음달산
모두 모여 인사를 하고, 청주문화의집 임병무 관장님이 조헌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대전 옛생돌의 백남우 선생이 예를 다한다.
조헌묘소를 나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물가에서 점심, 지난번처럼 큰 양푼에 싸온 점심밥을 넣고 단체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조헌 묘소에서 안남천을 따라 연주리로 이동. 안남면 소재지 모습. 조용한 시골분위기의 마을이다.
점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에 둔주봉과 한반도 지도모형의 전망대로 가는 등산로 입구가 있다. 약 1.2km 숲길을 따라가면 된다. 고갯마루에 서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숲길에서 잠시. 바람도 시원하고
둔주봉 정상 못미처 전망대에 정자를 세워 놓았다. 대청호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측 들판은 안남면 종미리, 대청호 건너편은 동이면 갈마골 그림처럼 펼처지는 자연풍광이 아름답고. 한반도 지도모습을 하고 있다. 우측 강기슭에 독락정이 있다.
전망대를 내려와 안남초등학교를 지나 연주리에 있는 독락정(지도에는 동락정으로 오기된 곳도 있다)의 모습. 금강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자연석과 잘 어울리는 모습인데 바로 앞에 있는 양수장이 좋은 풍경을 망가트리고 있다. 양수장이 옆으로 이동하면 좋을것 같다. 독락정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절충장군을 지낸이의 비석이 방치된 모습으로 처박혀 있다. 왠일인지 모르겠다. 이만한 풍광속에 잘 만들어진 정자도 흔치않던데 아쉬움이 남는다.
네이버에 올라온 독락정 내용 1998년 6월 26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년(선조 40)에 세운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 1칸과 마루가 있다. 처음에는 정자로 지었지만 후에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전당으로 사용하여 서원 구실을 하였다. 1772년에 중수하고 1888년,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보전해오다가 1965년 초계주씨독락옹파 문중에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 앞쪽에는 1668년 당시 군수였던 심후(沈候)의 ‘독락정(獨樂亭)’이란 액자가 걸려 있고, 대청에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의 ‘율시기문(律詩記文)’이 각자되어 걸려 있다. 이 정자로 인해 마을 이름도 독락정(獨樂亭)이라고 부른다. 정자 뒤쪽에는 층암절벽 바위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앞쪽에는 금강(錦江)이 흐르고 산들은 용이 춤을 추며 승천하는 기세로 선비들이 즐겨 모이던 곳이다.
독락정 앞으로 흐르고 있는 비단물결의 대청호. 전국적인 명소가 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자연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수 있도록 하면 좋을것 같다.
|
출처: 송태호의 하루 원문보기 글쓴이: 군자산 송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