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14> 1076년 겨울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왜 북이탈리아로 향했을까? (下)
“파문 취소해 달라” 교황 앞에
무릎 꿇은<카노사의 굴욕> 황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앞에서 참회하는 하인리히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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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 교황, 황제가 쥐고 있던 성직자 서임권 박탈
하인리히 4세 황제 반발하자 교회법 근거로 파문시켜
백성들과 주교·수도원장들까지 교황 쪽으로 줄줄이 돌아서
교황 머물던 카노사 성으로 달려간 황제, 성문 밖에서 3일간 참회
젊은 시절부터 교회 정화(淨化)의 필요성을 절감해온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교회개혁을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평신도(황제)의 개입을 금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궁극적으로 이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었고, 실제적으로는 주교와 수도원장에 대한 서임권을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 갖는 것이었다.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1075년 2월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주재한 신임 교황은 향후 어떠한 주교나 수도원장도 세속 통치자에게서 서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또한 ‘교황의 교의’라는 공식 문서를 발행해 오직 로마교황만이 보편적 존재이고 그에게는 황제를 폐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임명권을 행사해온 황제가 이를 좌시하지 않으리란 점은 분명했다. 더구나 이는 표면적으로는 성직자의 서임에 관한 문제였으나 내면적으로는 ‘누가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가?’라는 중세사회의 헤게모니와 관련돼 있었다. 때마침 작센의 반란을 진압하고 한숨을 돌린 하인리히 4세는 1076년 1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독일지역 주교들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는 조치로 대응했다. 황제는 로마교황과의 절연을 담은 선언문에서 “신의 뜻으로 황위에 오른 나 하인리히는 나의 모든 주교와 더불어 선언한다.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교황의 자리를 떠나라. 너, 몇 세기에 걸쳐 저주받을 인간이여!’”라고 맹비난했다.
황제가 자신을 폐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해 2월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즉시 반격을 가했다. 하늘로부터 지상에서 맺고 푸는 권세를 부여받은 교황의 권한을 근거로 내세우며 교회법에 따라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독일인 신자들의 충성 의무를 해제했다. 교황은 교황청에 운집한 추기경과 주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인리히 4세는 더 이상 교회의 신실한 아들이 아니기에 독일 백성의 황제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젊은 사제 시절부터 교황청 내의 수완가로 명성을 날린 교황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교황이 되기 전 힐데브란트로 불린 그는 “교회 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는 역사가 랑케의 평가처럼, 개성이 강한 개혁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산전수전을 겪은 노련한 교황의 눈에 하인리히 4세는 철부지 청년에 불과했으리라.
독일 내 힘의 역학관계를 꿰뚫고 있던 교황은 그동안 하인리히 4세와 대립각을 세워온 작센의 제후들과 손잡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동안 황제의 간섭에 불만을 품어온 독일의 제후들로서는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초기의 기대와 달리 점차 정세가 황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점차 교황 쪽으로 돌아섰다. 더구나 신앙이 개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중세사회에서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이상 백성들 앞에서 권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황제에 대한 파문으로 인해 독일 내 모든 교회에서의 예배는 금지됐고, 독일인들에게는 성례가 집전되지 않았다. 요즘이라면 쉽게 무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기적으로 예배와 성찬을 못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고 있던 당시 정서에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작센 제후들과의 무력충돌은 물론, 일반 백성들조차 황제를 비난하면서 등을 돌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급기야 황제에 반대해온 제후들을 주축으로 교황을 초청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재판을 개최한다는 결의가 채택됐다. 만일 재판정에서 교황이 유죄를 선언할 경우 하인리히 4세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로 약속했다는 소문마저 들렸다. 실제로 얼마 후 교황은 재판을 주재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을 떠나 독일 남부의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사태의 긴박성을 간파한 하인리히 4세는 하는 수 없이 1076년 말에 알프스를 넘어 교황이 머물고 있던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으로 달려갔다. 앞선 회의에서 이미 제후들이 1077년 2월까지로 시한을 정해놓은 상황인지라 그에게는 머뭇거릴 만한 시간도, 그렇다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황이 독일 땅에 발을 들여놓는 사태는 막아야만 했다. 그나마 서둘러 강행군한 덕분에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일행은 1077년 1월 카노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냉대로 그는 카노사 성문 앞에서 참회복을 입은 채 장장 사흘 동안 교황의 대면을 간청해야만 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상황에서 성문을 두드리는 공허한 울림과 용서를 호소하는 황제의 처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3일 후 교황이 그의 참회를 인정하고 알현을 허락한 다음 파문을 풀어줬다. 아무리 상황이 절박했다고 하더라도 하인리히 4세의 입장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서양 역사에서 교회의 권위가 세속 권력의 위에 서는 계기로 회자되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었다.
사건의 역사적 영향
그렇다면 이 사건으로 교황권과 황제권의 관계가 정녕 전자의 우위로 결론이 났단 말인가? 아니다. 교황과 황제 간의 힘겨루기는 무려 1122년까지 이어졌다. 무려 반세기에 걸친 충돌 끝에 하인리히 4세의 계승자 하인리히 5세와 새로운 교황 간에 타협이 이뤄졌다. 일명 보름스 협약(Concordat Worms)에 따라 주교와 수도원장에 대한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으나 이들에게 봉토를 지급하고 그에 따른 봉건적 충성을 받는 권한은 황제에게 부여됐다. 성격상 절충적인 결정이었으나 이후로 신성한 왕권이라는 카롤링거 왕조 이래의 전통은 유명무실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모든 세속의 통치자들에 맞서서 독립적인 사법권을 갖게 됐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상징되는 서임권 투쟁에서의 승리로 교황의 권한은 지속적으로 강화됐다. 마침내 1092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성지 탈환’을 향한 메시지는 십자군 원정의 빗장을 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볼 때, 중세 교권의 강화는 ‘양날의 검’이었다. 절제해 사용할 경우 교회 부흥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으나 자칫 남용할 경우 세속사에 몰입돼 교회를 파탄으로 이끌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후 교회는 후자로 흘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비대해진 교회는 점차 부패와 비효율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새로운 종교적 변화의 열망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화석화된 집단으로 변하고 말았다. 로마교황청의 폐단은 더욱 심화돼 급기야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철퇴를 맞고야 말았다.
<이내주 전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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