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파업 돌입한 美 영화·방송작가들
콘텐츠 제작 늘자 대본 수요 급증
임금은 최근 10년간 23% 떨어져
“글쓰기를 우버로 만들지 말라”《AI-OTT 맞서 파업 나선 할리우드 작가들
요즘 미국에서는 영화·방송작가들의 시위가 한창이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가 과실을 독점하고 인공지능(AI)에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16년 만에 파업에 나선 미국 작가들의 얘기를 들어 봤다.
17일(현지 시간) 미국 타임스스퀘어 파라마운트 본사 앞에서 미국작가조합(WGA)이 ‘공정한 계약’을 요구하며 파업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작가 1만 1500여 명이 소속된 WGA의 파업은 16년 만이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17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그룹 파라마운트 본사 앞. TV 및 영화 작가 수십 명이 피켓을 들고 “공정한 계약(Fair Contract)”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2일부터 파업 중인 미국작가조합(WGA) 소속 작가들이었다. 영화사와 CBS 방송국, 스트리밍 서비스 파라마운트+(플러스)를 운영하는 파라마운트 앞에서 작가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것은 내가 원하는 글쓰기가 아니다’를 비롯해 여러 문구가 쓰여 있었는데 ‘글쓰기를 우버로 만들지 말라(Don‘t Uber Our Writing)’가 가장 눈에 띄었다. 대형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가 작가들을 플랫폼에 종속된 소모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작가 제이디는 “넷플릭스는 작가에 대한 보상과 고용 기간, 일하는 방식을 전부 바꿨다. 작가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일을 손에서 놓는 선택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작가의 창의적 업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에도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2007년 이후 16년 만에 파업에 나선 작가들 시위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환호로 응원하거나 주먹을 맞부딪치며 지지를 표했다. 뉴욕 지역 대학생들도 동참했다. 작가 파업을 단순한 노사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파괴적 혁신’ 부작용과 빅테크(대규모 기술 기업) ‘전횡(專橫)’에 대항하는 몸부림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파업은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 달 제작사 측과 기존 협약이 만료되는 미국감독조합과 미국배우방송인조합(SAG-AFTRA)도 행동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 16년 만의 파업, 쇼가 멈추다
“넷플릭스죠.”
이달 초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WGA 행사에서 데이비드 굿맨 협상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은 ‘최악의 제작사가 어디냐’는 질문에 한목소리로 이같이 답했다. 한 참석자는 뉴욕타임스(NYT)에 “그 자리에 있던 1800여 명이 한꺼번에 폭소를 터뜨렸다”고 전했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스트리밍 업체에 대한 작가들의 반감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번 파업을 ‘넷플릭스 파업’이라고 부른다.
영화 및 방송 산업 중심지 LA에선 뉴욕보다 훨씬 많은 작가들이 디즈니를 비롯해 워너브러더스, 폭스 같은 거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그룹 본사 앞에서 매일 피켓 시위를 벌인다. 역시 넷플릭스 본사 앞에 모이는 작가들이 가장 많다. 2007년 파업 때만 해도 넷플릭스는 DVD를 우편으로 배송해주는 신생 기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작가 1만1500명 이상이 소속된 WGA와 가장 크게 맞서는 지배적 콘텐츠 제작사다.
크리스 키서 WGA 협상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우리가 이 순간에 이른 것은 우리 선택이 아니다. 제작사들이 우리를 실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작가들은 WGA를 통해 3년마다 영화·TV 제작자연맹(AMPTP)과 최저임금을 비롯한 단체협약을 맺는다. AMPTP는 넷플릭스 아마존 애플 디즈니 디스커버리-워너 NBC유니버설 파라마운트 소니 등이 소속된 콘텐츠 제작사 스튜디오협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한 2020년 이후 3년 만의 협상은 처음부터 난항이 예상됐다. 팬데믹은 스트리밍 시대를 더욱 앞당기며 TV와 영화 제작 시스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2020년 맺은 계약이 만료되는 1일까지 양측 협상이 평행선을 걷자 작가들은 펜을 놓기로 했다. 파업 찬성률이 98%나 됐다. NBC ‘더 투나이트 쇼’, ABC ‘지미 키멀 라이브’, CBS ‘더 레이트 쇼’ 같은 심야 토크쇼 프로그램이 영향을 받아 재방송으로 대체됐다.
미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작가 파업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제이 레노, 세스 마이어스 같은 심야 토크쇼 진행자들도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위대에 간식을 제공하고 있다. 넷플릭스 최대 히트작 ‘기묘한 이야기’를 제작, 연출한 맷 더퍼, 로스 더퍼 형제는 트위터에 “제작이 시작되면 글쓰기는 멈출 수 없다”고 올리며 파업 동참을 위해 시즌5 제작을 멈추겠다고 밝혔다.
다음 달 기존 계약이 만료되는 배우와 감독들도 처우 개선을 위해 제작사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다. 배우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이달 초 뉴욕 패션 행사 ‘멧 갈라’에서 WGA 파업에 대한 질문을 받자 “스트리밍 서비스가 모든 것을 바꿨고, 모두가 일한 만큼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 ‘오징어게임’과 할리우드의 경쟁
노동쟁의의 핵심 쟁점은 임금과 처우 개선이다. 미국 작가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번 파업이 WGA 밖에서도 지지를 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새로운 기술 등장과 일자리 파괴’라는 모든 직업인의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파업이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산업은 움직임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촬영과 영사, 소리를 담아 들려주는 녹음을 비롯한 기술의 산물이다. TV라는 신기술 도전에 응전하는 등 기술 혁신에 가장 민감한 산업이다. 역대 대규모 WGA 파업도 파괴적 기술 혁신이 있을 때마다 벌어졌다. 1988년 파업은 비디오테이프 재상영 분배금(residuals)이 협상 관건이었다. 2007년 파업은 인터넷 등장에 따른 수익 배분이 핵심 문제였다. 이번 파업의 중심에는 단연 스트리밍, 즉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 TV, 영화관이 안방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작가 처우는 엉망이 됐고 직업적 자부심도 잃었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WGA에 따르면 콘텐츠 제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대본 수요는 급증했지만 최근 10년 동안 TV 작가 및 프로듀서 주당 임금 중간값은 약 23% 떨어졌다.
특히 스트리밍 서비스 특유의 제작 환경이 작가들의 고용 안정성과 임금, 작업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TV 드라마는 시즌당 평균 20회차로 제작돼 매주 한두 편 방송됐다. 작가들은 적어도 1년은 ‘작가실’에 모여 정기적으로 공동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트리밍 오리지널 콘텐츠는 시즌당 8∼10회로 회차가 준 데다 한 번에 모든 편이 공개된다. 그러다 보니 수익도 줄고, 고용기간도 몇 달에 불과하게 됐다. 공동 작업장인 작가실도 ‘미니룸’으로 불리는 임시 작업실로 대체됐다.
작품 재판매에 따른 재상영 분배금 지급 방식도 핵심 쟁점이다. WGA는 TV 재방송이나 DVD처럼 시청 건수당 로열티를 받고 싶어 하지만 제작사 측은 거부하고 있다. WGA가 공개한 교섭안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임금상승률이나 해외상영 재상영 분배금에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최소 고용기간 보장’ ‘사전 제작 시 작가실 설치’ ‘에피소드당 최소 작가 인원 보장’ ‘시청 건수 기반 수익 분배’ 등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승자독식’이라는 플랫폼 경제 특성상 넷플릭스를 제외한 나머지 OTT는 대부분 적자이기 때문이다.
TV는 시청자가 많으면 광고비가 오르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는 구독자가 많아야 한다. OTT가 적자를 줄여 보려고 구독료를 올리면 구독자가 줄고 그렇다고 계속 출혈 경쟁을 하자니 본업조차 흔들릴 위기에 놓여 있다. 결국 경영진 교체나 대규모 감원 같은 ‘비용 쥐어짜기’ 카드만 남은 것이다. 디즈니는 스트리밍 부문의 지난해 2분기(4∼6월) 적자 폭이 6억5900만 달러(약 8751억 원)로 시장 전망치(8억4100만 달러)보다는 줄었지만 구독료 인상으로 구독자 400만 명이 떠났다. 디즈니 주가는 이날 실적 발표 직후 8% 가까이 폭락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스트리밍 산업은 규모의 경제이고, 비용 절감이 중요하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평했다.
OTT 산업이 콘텐츠의 국경을 뛰어넘은 점도 할리우드 파업에 영향을 미쳤다.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오징어게임’, ‘더 글로리’ 같은 한국 콘텐츠가 세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지만 세계 각국 콘텐츠 종사자들에겐 새로운 경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할리우드 파업이 길어져도 넷플릭스에는 유럽이나 한국 등 다른 제작사들이 있다. 2007년 파업 당시처럼 제작사들에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코노미스트는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가 지역 시장의 저예산 작품으로 글로벌 히트를 기록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현장에서 만난 작가 시위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넷플릭스가 글로벌 기업임을 지적하며 “한국에서 좋은 콘텐츠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안다. 이들이 미국 창작자들을 제대로 처우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 AI 등장까지 “모든 일자리의 문제”
“이것은 할리우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노동의 미래에 영향을 줄 중차대한 파업입니다.”
스타벅스 노동조합원인 바리스타 타일러 키링은 “비번일 때마다 LA 폭스사 앞에서 진행되는 작가조합 시위에 참여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작가조합은 키링의 사연을 전하며 “안무가, 카메라 직군처럼 엔터테인먼트 산업뿐 아니라 다른 산업도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할리우드 작가들의 파업은 2007년 당시보다도 더 지지를 받는 분위기다. 우버와 도어대시(미국판 배달의민족) 등 기술과 결합한 플랫폼 기업이 부상하며 이른바 ‘기그(Gig·단기노동자) 이코노미’가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이들 단기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일자리의 미래에 미칠 파괴적 영향을 현 시점 ‘노사 교섭안’에 제기한 첫 노동쟁의란 성격도 띠고 있다.
작가조합은 임금 협상 요구안에 “협약이 적용되는 모든 (창작) 프로젝트에 AI 사용은 규제돼야 한다”며 “AI는 문학(창작 대본)에 사용될 수 없고, 작가들의 작업물은 AI 학습 훈련에 쓰이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 AI가 사람이 쓴 초안을 수정하는 제2의 저자 역할을 한다면? 혹은 AI가 쓴 초안을 사람 작가가 다듬는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AI가 작가들의 작업물로 공부한다면 저작권은? 이 같은 질문에 지금부터 대답할 수 있어야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이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선 이미 작가들이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 제작사에 종속되고 있다는 불만이 높다. 순수 창작 영화보다 마블 시리즈나 슈퍼 마리오처럼 유명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대형 프랜차이즈 시스템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제작사의 기획안에 따라 초고를 쓰는 작가, 2단계 대본을 쓰는 작가 등 대본 작업도 단계별로 분업화되고 있는데, 미래에는 AI와 업무를 나눌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작가들은 보고 있다.
제작사 측은 작가조합의 AI 사용 불가 제안을 거절하면서 “연례 회의를 열어 기술 발전에 대해 논의하자”고 밝힌 상태다.
케이트 포트뮬러 조지아대 교수는 미 시사매거진 디 애틀랜틱에 “작가들의 파업은 할리우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AI의 부상이 가져올 잠재적 결과를 검토하고, 노동자들이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첫댓글 바둑에서 인간과 AI 대결이 시작됐는데, 점점 확전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