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로 불리는 정보 요원은 외교관 등 공식 직함이 있는 ‘화이트’와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블랙’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영국 비밀정보국(MI6) 소속 블랙요원입니다.
블랙요원의 일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경우가 많은데, 이스라엘 모사드의 블랙요원 엘리 코헨은 시리아 사업가로 위장, 시리아 권부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당국에 제공했고,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을 6일 만에 승리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블랙요원은 존재 자체가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들 정체가 발각되면 파견국은 자기네 요원인 것을 부인하는데, 국가정보원 청사에 새겨진 19개의 ‘이름 없는 별’은 국가를 위해 일하다 순직한 블랙요원들을 무명으로 놔둔 채 추모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안보 최전선에서 싸우는 블랙요원들이 자기 정부나 타의에 의해 신분이 노출된다는 것은 주요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런데 대한민국에선 심심찮게 나타나니 한심할 뿐입니다.
2008년 9월 12일 정부 인사가 와병 중이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에 대해 “스스로 양치질 할 만큼 회복된 것 같다”고 말했고, 심지어 “쓰러진 뒤 2, 3주 후 정보를 입수했다”고까지 언급했습니다.
김정일 주변에 첩자가 있다고 떠든 셈이고, 북한은 블랙요원 색출에 나섰고 공든탑은 무너졌습니다. 재중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과 접촉하고 김정일과도 만난 ‘흑금성’ 박채서씨는 90년대 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의 정치 공작 와중에 신원이 노출됐습니다.
그의 대북사업도 허사가 됐습니다. 국군정보사령부 전·현직 간부가 5년여 간 블랙요원 신분 등이 담긴 군사기밀을 건당 100만원에 팔아넘기다 2018년에 들통이 나기도 했습니다.
정보사 군무원 A씨가 블랙요원의 신상 정보 등을 중국 동포에 유출한 혐의로 지난 30일 구속됐습니다. 신변 우려에 중국 동남아 등에 있던 블랙요원들이 급거 귀국했다고 합니다.(국민일보. 오피니언[한마당], 블랙요원의 비애, 고세욱 논설위원)
<첩보전의 성패는 기밀 유지에 달렸다.
요원들의 신상 정보 유출은 최악이다. 신분이 노출된 이상 첩보 활동의 일선에 다시 나서기는 불가능하다. 구축돼 있던 정보망이 일거에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복구에 엄청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정보 공백은 국가 안위도 위협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에서 목도한 일이다. 정보망 복구를 위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짚어야 할 것은 또 있다. 군사법원은 지난달 30일 이런 다수의 기밀을 중국 동포에게 유출한 혐의를 받는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기밀 유출 혐의가 적용됐다.
간첩죄 적용이 가능한 국가보안법 혐의는 빠졌다. 이는 북한과의 연계성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다. 군 수사당국이 정보유출 사실을 확인한 것은 지난 6월. 바꿔 말하면 A씨 조력자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일부러 잡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군 관계자는 “간첩 잡는 대공 수사의 기본은 조용히 수사를 진행해 대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라며 “그러려면 은밀하게 덫을 놓고 기다려야 한다. 1년도 좋고, 2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며 수사가 꼬였다. 결국 공개수사로 전환해 사흘 만에 영장이 청구됐다. A씨만 ‘추궁하는’ 수사가 된 셈이다. 사건 관련자들은 이미 다 도주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얼마 전 미국 연방검찰의 한국계 북한 전문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 기소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정보원의 허술한 정보 수집활동과 다를 바 없다. 말 그대로 ‘정보 참사’다.
보안 유지가 필요한 첩보 유출 사건인데도 보도유예조치(엠바고) 등을 사전에 조율 못한 국방부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 친화적인’ 신원식 국방부 장관의 성향을 고려할 때 납득이 쉽지 않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국방부가 이번 사건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더 큰 문제다.
최근 정보사 내에서 대북 휴민트(HUMINT·인적정보) 수집 업무를 맡고 있는 여단장(준장)이 상급자인 정보사령관(소장)에게 폭언하는 항명사건도 빚어진 마당이다. 부대 내 기강 해이가 도를 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보 유출까지 빚어졌으니 윗선 보고가 제대로 됐을 리 있겠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진상규명이 될지 못내 걱정이다.
더구나 군형법상 간첩죄는 ‘적’(북한)에게 군사상 기밀을 누설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북한 이외 국가에서 기밀을 빼가도 간첩죄로 처벌할 구실이 없다. 간첩죄 대상을 확대하는 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탓이다.
2018년 정보사 공작팀장이 각종 기밀을 건당 100만원에 중국과 일본 첩보 요원에 팔아넘기다 적발됐지만 고작 실형 4년을 살고는 출소했다. 마찬가지로 A씨에게도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기밀을 넘겨 받은 이가 중국 국적이라서다. 사건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관련 법을 서둘러 보완해야 한다. 70년 넘게 대치 중인 남북이고, 첩보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첩보를 소홀히 한 나라는 역사의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정치권이 각성해야 한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세계일보. 박병진 논설위원
출처 : 세계일보. 오피니언 [세계포럼], 정보 유출로 드러난 대공수사 난맥상
저는 간첩죄가 북한에만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습니다.
1953년 제정된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해 간첩을 하거나 군사상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를 처벌하도록 돼 있어 ‘적국’이 아닌 ‘외국’ 간첩에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첩죄 범위를 ‘외국’으로 확대하는 법 개정을 통해 국가안보를 더 튼튼히 해야 한다는 데엔 이론이 있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중차대한 안보 사안마저 여아가 정치 공방의 소재로 소비하고 있으니 황당할 뿐입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21대 국회에서 간첩법 개정이 안 된 책임과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이 막았다”고 주장했고, 민주당은 당시 법원행정처가 반대하고, 여당 의원들이 법 개정에 우려를 표한 사실을 들어 오히려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 대표의 책임이 더 크다고 반박했습니다.
국가 위기 상황에도 정치권은 네 탓 타령과 정쟁만 벌인 셈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한시라도 빨리 법을 개정해 더 이상 간첩들이 활개 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국가정보원부터 정보사까지 국가정보 역량을 다시 정비하는 것도 시급한 일입니다. 별의 별 소리를 다해도 대북 정보를 소홀하게 만든 것은 문재인 정권이었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