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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묵상글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가난하기에 기쁜, 고통스럽기에 행복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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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가난하기에 기쁜, 고통스럽기에 행복한 < 2023.08.11. 05:18 >
올해는 ‘클라라의 기쁨’을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클라라를 아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가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 것이고,
그래서 그의 삶은 거룩하기는 해도 기쁨이 없었을 거라고
많은 분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 제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라라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시련이나 수치도,
세상의 멸시도 마다하지 않고,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유언 27-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의 종 프란치스코를 통해 한번 알게 된 다음부터는,
어떤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어떠한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 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클라라 전기 41)
그러니까 거룩하면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사람이 기쁘고 행복함을 클라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칼부림과 그것을 보고서 모방 범죄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서
전문가들은 심리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차원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말하지만
저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불행한 많은 젊은이의 행복한 이에 대한 분노입니다.
나만 불행하고 다른 이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실은 젊은이들이 거의 불행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생각하면 어찌 이리 쉽게 불행할까,
행복하기가 왜 이리 힘들까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바이지만
건강에는 육체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 정신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
이 네 가지가 있는데 많은 젊은이가 육체만 빼놓고 다 불 건강하거나
육체도 허우대만 크지, 면역력 면에서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거룩한 사람이 제일 건강하고,
영적으로 제일 건강하기에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며,
그렇기에 가난도 고통도 제일 잘 견딜 수 있으며,
견딜 뿐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클라라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지
마음의 고통이나 정신과 영혼의 고통은 아닙니다.
가난이나 병은 육체를 괴롭힐 뿐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이고,
이런 것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타게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가난이나 고통은 두려워하고 피하면 오히려 쫓아오고 달라붙지만
껴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껴안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것들을
땔감 삼아 사랑이 불타오르고 기쁨과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가난하기에 오히려 기쁘고,
고통스럽기에 오히려 행복한,
클라라의 그 사랑의 경지를 배우라고 주님으로부터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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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모집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모집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것은 곧 앞에서 예고하신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서 보듯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곧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다.’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끓어 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의미이기에, 십자가는 마지못해 억지로 떠맡아지는 것이 아니라,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요, 사랑으로 끓어 안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곧 자신의 죄와 허약함을 소중히 맞아들여 품고 사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며,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제거할 수 없으면 그것을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십자가를 피해갈 수 없기에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시고 기꺼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견디기 힘들어서 건너 띠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 띠지도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어도, 그것을 벗어나려 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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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다른 이의 부족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넘어지셨다 다시 일어서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걷고 또 걷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맞추고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자신을 버린다,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마지막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세상 것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클라라 성녀는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바라보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행한 대로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십자가의 성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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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묵주반지가 있습니다. 2016년 은경축에 선물로 받았던 십자가를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묵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묵주는 손가락에 끼고 다니니 늘 곁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묵주를 보면서 어머니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묵주는 신앙인임을 드러내는 표지이지만 그 묵주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묵주를 이용해서 매일 기도할 때에 나의 신앙은 성장하고, 나의 신앙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직원 중에 매일 혼인성사의 징표인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혼인한지 4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지를 끼고 다닙니다. 반지를 늘 끼는 그 정성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혼인반지가 아닙니다. 혼인반지를 아끼는 그 정성으로 배우자와 가족들 돌보는 헌신과 사랑이 있기에 그 가정은 성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가정에는 대부분 벽에 ‘십자고상(十字苦像)’이 있습니다. 십자고상은 신자라는 표식은 되지만 그것이 그 가정을 지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삶을 따를 때 그 가정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쫓아오는 파라오의 군대를 피해서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굶주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응답할 차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신앙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응답해야 합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 십계명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은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꼭 젖과 꿀이 흐르는 장소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도록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표징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표징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랐고, 그 표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표징이 제자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징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표징은 우리를 구원에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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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까요?
‘그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과 목숨을 얻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는 ‘목숨’은 이 세상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그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곳이며 이 세상이 아닌 다른 모든 세상도 그분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이곳도 그분의 땅이요 저곳도 그분의 땅입니다. 이곳에 사는 우리도 아버지의 백성이고 저곳으로 넘어간 이들도 아버지의 백성입니다.
목숨을 얻는다는 뜻은 이곳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세상의 생명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숨은 ‘각자의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인은 이러한 영생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자기 뜻과 의지를 비워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버지의 뜻과 하늘을 향한 믿음을 채워 넣었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말할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내 뜻을 비워내고 그 안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채우고 있는지요. 혹여나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은 하면서 순간순간 세상에 가치에 눈이 멀어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저의 행실이 주님 보시기에 흐뭇하기를 바랍니다. 그 희망으로 오늘 하루를 가열차게 보내려 합니다.
충동 소비
충동구매, 혹은 충동 소비를 하시나요?
이런 소비의 습관을 지니고 있나요?
솔직하게
저는 이런 충동적인 소비를
아주 가끔 합니다.
어느 날 유.땡.브를 보던 중
광고가 나왔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흰 가운의 사람들….
순간 충동 소비했습니다.
어느 날 유.땡.브를 보던 중
불쌍한 동물들에게 달려가는
안전모 쓴 사람들….
순간 또 충동 소비했습니다.
유.땡.브를 끊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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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날씨만 좋으면, 매일 새벽 일어나 먼저 기도한 뒤에 곧바로 운동하러 나갑니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아싸~ 운동하러 간다.”라면서 신나게 밖으로 나갈 것 같지만, 새벽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날씨도 별로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새벽에 다른 것을 하고 싶기도 하고, ‘낮에 자전거 타면 안 될까?’ 등의 유혹이 계속 몰려옵니다. 하지만 싫은 일을 먼저 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음을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처음 30분까지는 힘만 들고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30분 이상을 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감이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운동하시는 분들은 이 과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를 ‘러너스 하이’라고 합니다. 보통 심박수가 1분에 120회 이상 되면서 느끼게 되는 쾌감입니다. ‘러너스 하이’라는 쾌감에 도달하면 새로운 힘이 생기면서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 쾌감을 얻게 되는 이유는 힘들게 달려온 과정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힘들게 달려온 과정을 통해서 ‘러너스 하이’와 같은 또 다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과정은 경험하기 싫고 대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새로운 힘만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과정 없이 결과를 얻을 수 없듯이 힘든 과정을 거쳐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그 이후에 있을 ‘러너스 하이’를 기대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무엇인가라도 한다면 여기에 맞는 결과를 분명히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지만, 그 영광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십자가가 곧바로 영광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이에 따른 고통과 시련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함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피하고만 싶습니다. 남들도 피하고 싶어 하는 그 길을 내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 데 가야 하냐고 따지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에 또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 있기에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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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았던 슬픈 저녁은 잊히지만, 어느 행복했던 아침은 잊히지 않는다(장 가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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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따라 “해맞이꽃 사랑”으로-
오늘날을 정의하면 길을 잃은 사회, 희망을, 꿈을 잃은 사회, 중심을 잃은 사회, 한마디로 요약하면 병든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도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고 있습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입니다. 특히 한국은 더한 것 같습니다. 정말 총체적 난국같습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자살자들도 많고 이해하기 힘든,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곳곳에서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대부분의 자살自殺은 희망을 잃은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지옥과 같은 비정한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타살他殺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물심양면의 연대와 도움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심리적 무정부 상태 같습니다. 세대가 서로간 단절도 너무 크고 좋은 전통도 끊겼습니다. 도대체 사람되는 공부가 학교 교육현장에도 전무해 보입니다.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들의 죽음후의 화장에 이들을 보관한, 사람들로 하면 납골당같은게 있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사실 반려견의 화장터에서 슬피우는 동영상의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참 괴이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분이 몹시 얹짢았습니다.
“병든 사람, 병든 사회다! 그것도 중병이구나! 이를 어쩌나?”
하는 말이 저절로 탄식처럼 새어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입니다. 주제가 참 고마웠습니다.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강론 제목에 대한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면 됩니다.
길을 잃은 사회, 희망을 잃은 사회, 중심을 잃은 사회, 병든 사회라 했습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아주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희망이요,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내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건강한 삶의 회복입니다.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참 희망이자 참 기쁨, 참 평화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요즘 곳곳에 청초한 샛노란 달맞이꽃들이 한창입니다. 아무도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때되면 저절로 피어나는 달맞이꽃들에 다양한 들꽃들입니다. 7-8월에 한창 피어나는 칠레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인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밤의 요정’, ‘소원’, ‘무언의 사랑’등 많은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들이 때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야생화 들꽃들입니다.
어제 달맞이꽃들을 보며 새삼스런 감동에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달맞이꽃만 있고 ‘해맞이꽃’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달맞이꽃이 아닌 “해맞이꽃 사랑”이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바로 거기가 꽃자리이다
누가
봐주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상관치 않는다
때되면
샛노란 청초한 사랑으로 하늘 향해
피어날뿐이다
하늘 사랑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인데 더 무엇을 바라리
너는
달맞이꽃
나는 해맞이꽃 사랑이다”-2023.8.10.
‘해맞이꽃 사랑!’ 얼마나 멋진 명칭인지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면 됩니다. 태양인 해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이자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우리 영혼의 태양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중심에 모시고 살면 됩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적절하여 고맙습니다. 주 하느님의 위대함과 선택받은 이스라엘에 대한 신명기의 말씀이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쳐 주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 주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오늘”이 거푸 두 번 연속 나옵니다. 한마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누구나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 수 있는,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활짝 열린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만고불변의 구원의 진리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기 버림의 여정에 항구한 이들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습니까? 얻은 것은 덧없는 삶이요 잃은 것은 영원한 삶이라면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바로 영원한 삶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자기 버림이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때, 구원의 잣대가 됩니다.
어제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축일이고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영적도반으로 깊은 영적우정을 나눴던 성녀 글라라 기념일입니다. 성녀 글라라 예외없이 해맞이꽃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평생 시종여일 한결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이름 뜻 그대로 “주님의 빛”으로 살았습니다. 40여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말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섬기며 살았습니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여 모든 일을 이루었습니다. 1253년 8월11일, 바로 오늘 성녀 클라라는 선종했고 그 임종어입니다.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받으소서.”
선종 2년만인 1225년, 최단기간에 성인품에 올린 교황 알렉산드로 4세의 성녀에 대한 소감은 바로 성인품에 올린 근거가 됩니다.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해맞이꽃 사랑으로 주님 따라 성인의 삶을 살라고 삶의 좌표의 선물로 주어진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해맞이꽃 사랑으로 성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다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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