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제 옛날 직장 선배의 글입니다。수필가로 등단한 적은 없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입니다。 매주 한편씩 글을 써서 토요일 아침이면 카톡으로 보내 옵니다。 벌써 258회나 되었네요。 문학성보다 진정성이 우선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카페로 옮깁니다。
=====================
[토요단상(土曜斷想)] (2026.10.17.) ========{제258회}=========
.
농담(弄談)은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서로를 더욱 가깝게 이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특히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 사이에 오가는 농담은 친근감과 우정을 자연스레 확인시켜 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농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그 선이 어디쯤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막역한 사이라면 어떤 농담이든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일방적인 기대일 수 있음을 최근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한 사람 있습니다.
나이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막역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지요.
그를 아는 이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듯, 그는 자신에게 엄격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른바 ‘원칙론자’입니다. 때로는 너무 고지식하다 싶을 만큼 원칙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놀라움과 존경심을 느끼면서도, 가끔은 그 반듯함을 살짝 비틀어 농담을 건네곤 했습니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
“계산 확실히 잘해.”
그의 인격이나 평소 처신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었지요. 실제로 그에게 인격이나 정직성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만일 그리 여겼다면 오히려 그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름으로는 분위기를 즐겁게 하려는 농담이었고, 함께 있던 사람들도 그 뜻을 알아듣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농담을 거듭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때그때 가볍게 건넨 말이었지만, 정작 그에게는 더 이상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말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그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지요. 수화기 너머로 격앙된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기색이 느껴졌습니다.
요즘 자신을 향한 저의 농담이 지나치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몇 번은 자신도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같은 말을 거듭 듣다 보니 정말 자신의 인격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화도 난다는 것이었지요.
그의 말에 배어 있는 심각함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생각 없이 한 농담으로 마음을 상하게 해 정말 미안하다고 즉시 사과했습니다.
실제로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겠느냐는 설명도 덧붙였지요.
그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제 뜻을 설명하고 경솔했던 말에 대해 거듭 사과했습니다.
저의 진심이 충분히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의 당혹감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농담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업무적이거나 의례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농담을 주고받게 됩니다.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끼리 지난 실수를 들추어 웃기도 하고, 달라진 외모를 두고 한마디씩 보태기도 하지요.
그러나 즐거웠던 모임에서 돌아와 대화를 떠올리다 보면 어느 한마디가 자꾸만 마음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말한 사람은 벌써 잊었을 터인데, 들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말을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함께 웃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했던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웃었을 수도 있고, 친한 사이에 그런 말 한마디를 두고 정색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지요.
저 또한 앞에서 이야기 한 그 친구의 웃음을 스스로의 농담에 대한 동의로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에는 말 한마디도 고릅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 잘 모르므로 함부로 짐작하지 않고, 혹시 실례가 될까 싶어 표현을 누그러뜨립니다.
그러다가 가까운 사이가 되면 경계가 풀리고, 그 편안함 속에서 때때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일까지 함께 내려놓습니다.
저와 그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겠지요.
더구나 그 친구에게 원칙과 정직함은 오래도록 지켜 온 삶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존중하면서도, 농담을 할 때에는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거듭 건드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중국의 고전 《예기(禮記)》 에는 ‘압이경지(狎而敬之)’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친숙하게 지내면서도 공경한다는 뜻이지요.
현명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설명하는 대목인데, 가까움 속에서도 상대방에 태한 존중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의 인간관계에도 새겨 볼 만한 말입니다.
이는 함께 밥을 먹고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친숙한(狎) 사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까지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그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 마음대로 건드려도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의 아픈 곳을 많이 알게 된 만큼 말을 고를 이유도 많아지는 것이지요.
농담을 주고받는 즐거움은 여전히 소중합니다. 다만 그 즐거움 속에 상대도 함께 하는지, 웃는 얼굴만 보고 너무 쉽게 짐작하지는 않았는지 한 번 더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고, 그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 점입니다.
“농담의 성공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귀에 달려 있지, 말하는 사람의 혀에 달려 있지 않다. (A jest’s prosperity lies in the ear Of him that hears it, never in the tongue Of him that makes it.)”
영국의 대문호 '월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
》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여선(다니엘)/관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