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의 둥지
새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살 곳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둥지를 튼다. 가는 곳마다 기후나 생활 환경이 달라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각오와 행동으로 대처한다. 또 어미가 둥지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다 정을 떼고 독립하도록 떠나보낸다. 사람들도 자식을 길러 짝을 지어 떠나보낸다. 결혼하지 않고 살더라도 독립하여 새 둥지로 보내야 한다. 사람은 한 인격체로서 각자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곳에 오래 머물면 침잠하여 데면데면 산다. 거기에 익숙해지면 변화를 두려워하여 늘 하던 대로 하며 산다. 그래서 어떤 이는 수십 년을 한 둥지에서 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일정한 주기로 옮겨가면서 새롭게 적응하며 새 모습으로 산다.
어떤 삶이 좋을까? 나도 십여 년 주기로 둥지를 새롭게 마련한 것 같다. 그러면서 환경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이 바뀐다.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삶이 개인적으로 변화와 쇄신의 기회로 새로운 삶이며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딴 곳으로 삶의 둥지를 옮겨갔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적응하지 않고 옛 둥지를 찾아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나는 대구(시지)에서 경산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신앙생활의 교적도 옮겨 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만나 교분을 맺고 친교를 나눔이 새로운 신앙의 복음화가 아닐까 싶었다. 경전의 말씀에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지 않는가.
새 삶(복음화)은 지금까지의 삶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과 정신, 행동으로 변화시키라는 말이다. 고인 물이 썩듯이 사고의 전환으로 삶을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경전 요한묵시록에도 적그리스도(666)와 싸워 승리하여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창조를 하라고 한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수명이 칠십 년인데, 사십 년을 살다가 결정의 순간에 놓인다고 한다. 그때 독수리는 그대로 몇 년 더 살다 죽느냐 아니면 자기의 부리로 날개와 발톱을 뽑고 마지막으로 부리를 부러트리는 환골탈태의 고통을 겪느냐에 있다. 그런 고통을 통한 변화와 쇄신으로 거듭 태어나 삼십 년을 더 산다고 한다.
나에게도 또다시 삶에 대한 변화의 기회가 왔다. 새로운 둥지로 가야 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눌러있어야 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살면서 새 삶의 복음화를 가져오느냐의 문제이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곳 삶에서 튼튼한 터전의 뿌리를 거두어야 한다. 한편으로 새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교의 삶도 하고 싶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늘의 뜻을 기다리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