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
소는 보고 양은 보지 않았다는 뜻으로, 무엇이나 보지 않은 것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한층 더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見 : 볼 견
牛 : 소 우
未 : 아닐 미
見 : 볼 견
羊 : 양 양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가엾이 여겨 놓아 주고 양으로써 대신하라고 명한 데서 나온 말로, 소는 보았으므로 가엾게 여기고, 양은 보지 않아 가엾은 줄 몰랐다고 한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는 그 대상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가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이라는 문구 속에 들어 있다.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에 나오는 구절로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맹자(孟子)가 왕도(王道)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가 배경입니다.
齊宣王問曰; 齊桓晉文之事可得聞乎.
제선왕문왈; 제환진문지사가득문호.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질문했다.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일을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孟子對曰; 仲尼之徒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 則王乎.
맹자대왈; 중니지도무도환문지사자. 시이후세무전언. 신미지문야. 무이, 즉왕호.
맹자가 대답했다. “공자를 따르는 제자들 중에는 환공과 문공 같은 패도에 대해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후세에 그런 가르침이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면 왕도뿐 일 것입니다.”
曰; 德何如, 則可以王矣.
왈; 덕하여, 즉가이왕의.
제선왕이 묻기를 “덕이 어떠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曰; 保民而王, 莫之能禦也.
왈; 보민이왕, 막지능어야.
맹자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며 왕노릇을 하면 누구도 능히 그를 막지 못합니다.”
曰; 若寡人者, 可以保民乎哉.
왈; 약과인자, 가이보민호재.
제선왕이 말하기를 “과인 같은 사람도 백성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曰; 可.
왈; 가
맹자 말하기를 “가능합니다.”
曰; 何由知吾可也.
왈; 하유지오가야.
제선왕이 물었다. “어떻게 내가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曰; 臣聞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왈; 신문지호흘왈, 왕좌어당상, 유견우이과당하자.
맹자 대답하기를 “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흘이 말했습니다. 왕께서 당상에 앉아 있는데 아래에 소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王見之, 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鐘.
왕견지, 왈; 우하지, 대왈, 장이흔종.
그러자 그것을 보고 소를 어디로 데려 가느냐고 묻자 이 소를 잡아 새 종에 피를 바르고 제사하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 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鐘與.
왕왈; 사지, 오불인기곡속, 약무죄이취사지. 대왈; 연즉폐흔종여.
왕께서 그러지 말고 소를 내버려 두어라. 나는 그 소가 벌벌 떨면서 죄없이 사지로 가는 것을 차마 못보겠다라고 하자 그럼 종에 피바르는 제사를 폐지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曰; 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有諸.
왈; 하가폐야 이양역지. 불식유저.
그러자 왕께서 어찌 그런 제사를 폐지하겠는가 다만 양을 소 대신 잡아 사용하라.’고 했다 합니다. 잘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曰; 有之.
왈; 유지.
제선왕이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曰; 是心足以王矣. 百姓皆以王爲愛也, 臣固知王之不忍也.
왈; 시심족이왕의. 백성개이왕위애야, 신고지왕지불인야.
맹자 말하기를 “그런 마음이면 왕 노릇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왕께서 소가 아까워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신은 왕께서 차마 불쌍한 것을 보지 못해 그랬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王曰; 然. 誠有百姓者. 齊國雖褊小, 吾何愛一牛. 即不忍其觳觫, 若無罪而就死地, 故以羊易之也.
왕왈; 연. 성유백성자. 제국수편소, 오하애일우. 즉불인기곡속, 약무죄이취사지, 고이양역지야.
왕이 말하기를 “그렇소 진실로 그런 백성들 있습니다. 제나라가 비록 좁고 작습니다만 내 어찌 소 한 마리를 아끼리오. 즉 그 벌벌 떨며 죄없이 사지로 나가는 것 같음을 참지 못해 그래서 양으로 그것을 바꾸었소.”
曰; 王無異於百姓之以王爲愛也. 以小易大,彼惡知之. 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 則牛羊何擇焉.
왈; 왕무이어백성지이왕위애야. 이소역대, 피오지지. 왕약은기무죄이취사지, 즉우양하택언.
맹자 말하기를 “왕께서는 백성들이 그것으로써 왕이 탐욕을 행했다는 것에 대해서 괴이해 하지 마세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니 저들이 어찌 그것을 알리오. 왕께서 만약 그 죄없이 사지로 나아감을 가엾어 했다면 어찌 소와 양을 가려 선택 했을까요.”
王笑曰; 是誠何心哉? 我非愛其財, 而易之以羊也, 宜乎百姓之謂我愛也.
왕소왈; 시성하심재? 아배애기재 이역지이양야 의호백성지위아애야
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참, 대체 무슨 마음에서였던가? 내가 그 재물을 아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백성들이 나더러 인색하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曰; 無傷也. 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
왈; 무상야. 시내인술야, 견우미견양야.
맹자 말하기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仁)의 방법이니, 소는 보였고 양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君子之於禽獸也, 見其生, 不忍見其死, 聞其聲, 不忍食其肉.
군자지어금수야, 견기생, 불인견기사, 문기성, 불인식기육.
군자는 새나 짐승을 대함에 있어서 그 산 모습을 보고서는 그들의 죽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 죽는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是以君子遠庖廚也.
시이군자원포주야.
그러므로 군자는 주방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원문에 나오는 포주(庖廚)는 짐승을 도살하는 푸줏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방을 말한다. 옛날에는 주방에서 직접 짐승을 잡아 요리를 만들었다. 포주는 요리사를 지칭하기도 한다. 옛날의 요리사는 대부분 직접 도살을 하여 요리했으므로 도살부(屠殺夫)를 겸했다.
후일에 맹자(孟子)가 묻기를 “소나 양이나 죽음으로 가는 것을 불쌍히 여겼다면, 어째서 소는 놓아주고, 양으로 바꾸도록 하였습니까?”했습니다. 선공은 대답하지 못하고 “글세, 어째서 그랬을까?”하였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죽음으로 끌려가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하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소가 벌벌떨며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없어 하는 제선왕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적해 내어 부족하나마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반면, 소나 양이나 똑같은 생명을 가진 동물인데 큰 것(소) 대신 작은 것(양)으로 바꾸어 죽게 하였으니 군주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백성들이 군주를 아끼는 사람이라 평할 것이라고 제선왕의 단견과 치우침을 지적해 줍니다. 눈 앞의 소는 보았는데, 양은 어찌 보지 못하였느냐고...
인간은 모두 개체로 태어났으므로 현재 자신의 감정에 우선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감정이 비록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일지라도 그 마음의 발로가 개체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은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의 적절치 못한 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牛)를 통하여 느낀 측은지심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양(羊)에게 까지 그리고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개개 존재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적용되어야 했던 것이고 그랬다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는 말은 할 수 없었겠지요.
우리 일상생활의 현실로 돌이켜 볼 때 양으로 소를 대체해 버리고 아주 당연한 일을 했다고 자기합리화한 행동은 없었는지 또, 개체성의 한계에서 생기는 수많은 단견들을 당연히 옳은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개체성의 한계와 기준으로 만든 보잘것 없는 생각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마구 난도질하지는 않았는지, 내 감정에만 빠져 타인의 감정을 소홀히 여기고 지나치지 않았는지, 내 고집에만 집착하여 타인의 환경과 어려움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내 자고(自高)함에만 취하여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내 경험의 범주에만 갖혀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발전의 길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명은 하나인데 나누고 쪼개서 보지는 않았는지, 그랬다면 오직 소에게만 집착하는 제선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겠지요.
작은 생명체 하나에서 느낀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도 이 우주 전체에 대입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보신탕이 문제 거리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개는 늘 가까이 기르며 보고 있기 때문이고, 소는 농사하는 이들이나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보면 개보다 소가 훨씬 더 불쌍하고 애착이 갑니다. 소고기 먹는 것은 괜찮고, 개고기 먹는 것은 나쁘다 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위선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반달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른 생명을 취하여 내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면서 홀로 자비로운 척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과 동물을 막론하고 내 살과 피는 결국은 다른 생명의 피와 살로 된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이르는 동물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파라독스라는 책에서 악어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악어의 눈물은 위정자를 빗대어 말하는 통속어이다. 악어가 먹이를 씹으며 먹히는 동물의 죽음을 애도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에서 전래된 것으로 패배한 정적 앞에서 흘리는 위선적 눈물을 가리킬 때 쓰인다. 우리의 눈물이 그런 것은 아닐까?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맹자(孟子)
무엇이 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정치란 한마디로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다. 정의의 핵심은 억강부약(抑强扶弱)이다. 하지만 정치는 오히려 스스로 강자가 되어 정의를 무너뜨리기 일쑤이다. 이러한 정치는 세상에 평안은 커녕 고통을 주게 된다.
아마 정치의 일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가 보다. 일찍이 맹자(孟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설파한 바 있다. 첫째는 집안의 무고함이요, 둘째는 하늘과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삼락을 열거하고 굳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들지 않는다.”
옛날에 왕은 타고나야 한다. 그러니 맹자 같은 일반인에게 왕 노릇은 곧 정치 참여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맹자는 그것이 결코 군자의 즐거움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렇듯 정치를 멀리한 그의 모습은 얼마나 고고(孤高)할까. 이러한 상념을 떠올리며 그의 대화집인 맹자(孟子)를 펼쳐 보면, 놀랍게도 첫 장부터 의외의 반전이 전개된다.
맹자는 맹자가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다로 시작한다. 그가 살던 전국시대는 양육강식의 혼란기였다. 당시 수많은 야심가들은 제후국을 순방하며 저마다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설파하였다. 만약 어떤 제후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면 곧바로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맹자 역시 혜왕에게 자신의 등용을 요청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혜왕은 다짜고짜 “무슨 이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왔느냐”고 채근한다. 맹자는 “어찌 이익만을 묻느냐”고 대꾸하며 “아래위가 이익만 추구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한다. 또한 패도정치는 잘하든 못하든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며, 인의(仁義)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곧 왕도정치를 제안한다.
다음으로, 맹자는 제(薺)나라 선왕(宣王)을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 전에, 그가 전해 들은 선왕에 관한 일화를 언급한다. 어느 날 신하가 잔뜩 겁을 먹은 소를 끌고 지나갔다. 왕이 무슨 소냐고 묻자 신하가 제물(祭物)이라고 답한다. 왕은 소를 살려주고 그 대신에 양을 잡으라고 명한다. 소의 측은함을 직접 보고는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 소는 보고 양은 안 본 것이라는 뜻)의 고사이다.
그는 왕의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칭송하며 인(仁)의 정치를 베풀 자질이 다분하다고 한껏 치켜세운다. 그의 유세술이 제법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이어서 그는 덕치를 베풀면 천하의 백성이 모여들고, 일정한 생산활동을 보장해주면 정신적 기풍이 안정된다고 주장한다. 여기로부터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이다.
또한 그는 왕으로부터 “신하가 왕을 죽일 수 있느냐”는 도발적 질문을 받는다. 그는 “인의를 해친 사람은 이미 왕이 아니고 한낱 범부(凡夫)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범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둘러댄다. 실로 절묘한 응수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왕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설파한다.
다음으로, 그는 등(藤)나라 문공(文公)을 찾아간다. 왕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그는 항산항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토지, 세금 등에 대한 제도개혁을 건의한다. 실제로 이러한 시책이 일부 실시되자 무리를 이끌고, 쟁기를 짊어지고 등나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등나라는 뜻을 펴기에 너무 작고 미약한 나라이다.
본래 맹자는 공자(孔子)의 고향과 가까운 추(鄒) 지방 출신이다. 나이 50세(또는 40대 중반) 무렵 유세에 나서 양(梁), 제(齊), 송(宋), 설(薛) 나라 등을 오가다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시 등(藤)나라로 갔다가 노(魯)나라를 거쳐 거의 20년 만에 늙고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한다.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공부를 하며 말년을 보낸다.
맹자는 그가 세 나라 양(梁), 제(齊), 등(藤)에서 유세한 내용과, 제자들과 공부하며 나눈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정치적 삶을 추구했지만 끝내 이상을 펼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장래는 이미 양혜왕과의 첫 대면에서 예견되었다. 그는 이(利)를 원하는 군주에게 인(仁)을 내놓았다. 이런 간극을 알면서도 그는 평생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맹자의 일생은 공자(孔子)의 일생과 놀랍도록 닮았다. 공자는 40~50대에 노(魯)나라의 관직에 나아가 여러 가지 정사를 담당했다. 특히 무법한 대부(大夫)를 단숨에 주살(誅殺)하는 과단성도 보였다. 그러나 점차 쇠락하는 노나라의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쉰여섯에 주유천하에 나섰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를 벌였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석달 동안 섬길 임금이 없으면 안타깝고 초조해 하고, 국경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예물을 싣고 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떠도는 공자의 모습을 보고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라고도 표현했다. 이를 통해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정치적 기회를 얻고자 애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자 역시 끝내 뜻을 펼치지 못했다. 결국 늙은 몸을 이끌고 나이 일흔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며 말년을 보냈다. 이처럼 공자와 맹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판박이 삶을 살았다. 특히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역사 속에 유학을 굳건히 확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한편 플라톤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는 정치명문가 출신이지만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자 정치를 등졌다. 그는 아카데미아를 열어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60대에 이르러 두 차례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해 그곳 군주를 통해 자신의 철인(哲人)정치를 실현해 보려고 했다. 그의 시도는 번번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공자, 맹자, 플라톤은 한결같이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정치를 갈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고전은 군자가 자신의 몸만 청결하게 하고자 한다면 큰 인륜이 어지럽게 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몸을 던져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대의가 있었다. 무엇보다 맹자는 맹자가 자신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 정치 현장의 보고서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정치적 성공보다 더 값진 불멸의 교훈을 남겼다. 그들은 결코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무엇을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정치는 막무가내로 무엇이 되려고만 한다. 이러한 정치의 유일한 양식은 상대의 파멸이다. 이것이 작금의 정치가 살벌하고 음습한 이유일 것이다.
견우 미견양(見牛未見羊)으로 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
영화 레미제라블는 우리에게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묻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책의 두께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100만부 이상 팔리는 기적을 낳았다.
서양의 정의와 동양의 정의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서양의 정의가 머리에서 사고하는 이성의 정의라면 동양의 그것은 가슴(心)에서 느껴지는 정서의 정의다. 정의(正義)의 義에 양(羊)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양은 고대 중국에서 맛의 상징이었다. 맛은 멋으로(美) 그리고 좋은 것(善)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즉 동양에서 아름다움, 선함, 의로움은 혀가 맛있는 음식을 느끼는 것처럼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아름다울 美자가 羊으로부터 나오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설, 즉 양대즉미(羊大則美)와 양인위미(羊人爲美)의 설이 있다. 양대즉미의 설은 양이 큰 것이 아름답다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가설이다. 양은 맛있기에 양이 큰 것을 아름답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의 맛은 거친 맛이 없는 것이며, 동양의 멋은 거칠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동양의 정의는 마음에서 거친 느낌이 없는 상태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맹자의 양혜왕편에 나오는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 이야기이다.
제나라 선왕은 자신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맹자에게 자신이 왕의 자격이 있는지를 묻자 맹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맹자는 그 이유로 선왕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를 논거로 내놓는다.
하루는 선왕이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벌벌 떠는 소를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묻자 흔종(釁鐘; 새로 만든 종에 소를 죽여 그 피를 바르는 일종의 의식)을 위해 라고 답한다. 그러자 선왕은 그 소를 살려 두고 대신 양으로 흔종의식을 행하라 명했다.
선왕이 그렇게 한 이유는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見牛未見羊). 그 산 모습을 보고 차마 죽는 꼴을 보지 못하며 죽는 소리를 듣고 그 고기를 먹지 못하는 그러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 즉 인(仁)의 마음을 선왕이 가졌다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면 백성을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 이것은 서구의 합리적 관점에서 보면 논리에 맞지 않는 말도 안되는 일이다. 소를 죽이든가 아니면 흔종을 폐해서 양도 죽이지 말든가 해야 합리적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에서 제사의식을 거스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생명을 다 살릴 수 없다면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내 마음에 들어온 생명을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괴로워 못견디는 것이다. 차마 못하는 마음, 그런 민감함이 동양의 정의이며 인(仁)의 정신이다. 그런 감수성이 동양의 정의이다. 동양의 정의(正義)는 정의(精義)이다.
그런 면에서 빅토 위고르는 불쌍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것에 기반한 정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동양적 사유의 맥락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 시대를 뛰어 넘는 고전에는 서양과 동양의 사유구조를 뛰어 넘는 보편성이 있음을 그는 위대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見(견)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見(견)은 보다, 보이다, 당하다, 견해 등의 뜻과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牛(우)는 상형문자로 뿔이 달린 소의 머리 모양을 본뜬 글자로 소를 뜻한다. 뿔을 강조하여 羊(양)과 구별한 글자 모양으로, 옛날 중국에서는 소나 양을 신에게 빌 때의 희생의 짐승으로 삼고 신성한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글자도 상징적이며 단순한 동물의 모양은 아니다. 牛(우)는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소 축(丑), 짐승 축(畜)이다. 용례로는 소를 잡는 데 쓰는 칼을 우도(牛刀), 소의 젖을 우유(牛乳), 소의 털을 우모(牛毛), 소 시장을 우전(牛廛), 소를 부려 밭을 갊을 우경(牛耕), 소 잡는 것을 금함을 우금(牛禁), 외양간을 우사(牛舍), 고기로서의 소의 혀를 우설(牛舌), 쇠고기를 우육(牛肉), 소의 뿔을 우각(牛角), 소의 머리를 우두(牛頭), 소의 뼈를 우골(牛骨), 소가 끄는 수레를 우차(牛車), 소 걸음이란 뜻으로 느린 걸음을 우보(牛步), 소의 궁둥이를 우후(牛後), 소가 가고 말이 다닌 온갖 곳을 다 다님을 우왕마왕(牛往馬往), 소가 물을 마시듯 말이 풀을 먹듯이 많이 먹고 많이 마심을 우음마식(牛飮馬食), 쇠 귀에 경 읽기라는 우이독경(牛耳讀經), 소의 뿔에 책을 걸어 놓는다는 우각괘서(牛角掛書), 소가 밟아도 안 깨어진다는 우답불파(牛踏不破),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우도할계(牛刀割鷄), 소를 삶을 수 있는 큰 가마솥에 닭을 삶는다는 우정팽계(牛鼎烹鷄), 소 궁둥이에 꼴 던지기라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쳐도 소용이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우후투추(牛後投芻) 등에 쓰인다.
▶ 未(미)는 상형문자로 나무끝의 가느다란 작은 가지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나중에 분명하지 않다, 희미한 모양, 아직…하지 않다란 뜻에 쓰인다. 음(音)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여덟째 글자로 양을 상징한다. 未(미)는 어떤 명사 앞에 쓰이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음을 나타낸다. 아니다, 못하다, 아직 ~하지 못하다, 아니냐? 못하느냐?, 미래, 장차 등에 쓰인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비(非),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그 동안이 그리 오래지 아니함을 미구(未久), 아직 오지 않은 때를 미래(未來), 아직 다 갖추지 못함을 미비(未備), 편안하지 아니함을 미편(未便), 아직 끝마감을 하지 못함을 미감(未勘), 아직 미치지 못함을 미급(未及), 아직 도착하지 아니함을 미도(未到), 끝을 다 맺지 못함을 미완(未完), 아직 작정하지 못함을 미정(未定), 아직 결혼하지 아니함을 미혼(未婚), 돈이나 물건을 아직 다 거두어들이지 못함을 미수(未收), 아직 결정되거나 해결되지 아니함을 미결(未決), 열매가 채 익지 못함을 미숙(未熟), 정한 수효나 정도에 차지 못함을 미만(未滿), 아직 정하여지지 아니함을 미연(未然), 아직 넉넉하지 못함을 미흡(未洽), 아직 모름을 미지(未知), 아직 다하지 못함을 미진(未盡), 아직 내지 못함을 미납(未納), 그 동안이 오래되지 않고 가까움을 미구불원(未久不遠), 아직도 속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미능면속(未能免俗), 모든 일에 밝아도 오직 한 부분만은 서투름을 미달일간(未達一間), 아직 듣지 못한 일을 미문지사(未聞之事), 그렇지 않은 바가 아님을 미상불연(未嘗不然), 아직 그렇게 되기 전을 미연지전(未然之前), 옳지 않다 할 것이 없음을 미위불가(未爲不可),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을 미증유(未曾有), 누가 옳은지 모름을 미지숙시(未知孰是),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송장이라는 미랭시(未冷尸),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것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과부가 스스로를 겸손하며 일컫는 말 미망인(未亡人) 등에 쓰인다.
▶ 羊(양)은 상형문자로 양의 머리를 본뜬 글자이다. 양의 머리 모양을 도형화한 것이며 牛(우; 소)자와 비슷하다. 아주 옛날에 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짐승 중에서도 특히 존중된 것이었다. 羊(양)은 면양(綿羊), 의지할 가지가 없이 약하다는 뜻에서 신자(信者)를 비유하는 말, 성질이 퍽 온순한 사람의 비유하는 뜻으로 양(羊), 상서롭다, 배회하다, 바라보다, 자세하다 등에 쓰인다. 용례로는 양의 털을 양모(羊毛), 양의 젖을 양유(羊乳), 양의 가죽을 양피(羊皮), 양털로 촉을 만든 붓을 양호(羊毫), 양의 무리를 양군(羊群), 양고기를 양육(羊肉), 양 뿔을 양각(羊角), 양가죽으로 만든 옷을 양구(羊裘), 양의 머리를 양두(羊頭), 양을 가두어 기르는 우리를 양사(羊舍),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휘고 좁은 길이라는 양장소경(羊腸小徑), 속은 양이고, 거죽은 호랑이라는 양질호피(羊質虎皮)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