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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암태도
목포에서 서쪽으로 28.5km 지점(동경 126。16′, 북위 34。39′)에 자리한 암태도는 동쪽으로는 목포시의 유달산을 바라보고 있고, 남쪽으로는 팔금면, 북쪽으로는 자은면과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목포항에서 뱃길로 1시간 20분쯤 걸리며,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면 25분 정도 소요된다.
돌이 많이 흩어져 있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져 있다고 하여 암태도라 하였으며, 섬 한복판에 장부의 기상인 양 우뚝 솟은 승봉산(해발 355m)이 늠름한 기백을 자랑하며 나그네를 반긴다. 멀리 상고시대까지 올라가는 긴 연혁을 간직한 암태도는 총 40.08㎢의 면적 중 13.25㎢나 되는 많은 농경지에서 볼 수 있듯이 예로부터 쌀과 보리, 마늘 등 논, 밭작물이 풍성하며, 해태양식업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암태도는 자은도와 연결된 은암대교의 개통으로, 역사의 숨결과 함께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얘깃거리가 풍부한 섬 기행 코스로 각광받고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는데, 암태도의 쌀은 일찌기 간척지 특유의 우수한 미질로 널리 알려진 바 있으며, 이러한 토지와 더불어 암태도는 선인들의 피와 땀, 눈물과 통곡이 스며있는 역사와 무게를 짊어진 고장이기도 하다.
1924년에 일어난 ‘암태도 소작쟁의’는 우리나라 소작쟁의의 효시였다. 이것은 암태도 소작인들의 고율 소작료 인하운동으로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암태도 소작료 불납운동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구속, 희생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8년, 높이 6.74m에 면적 1,360㎡의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을 세워 암태도의 숭고한 소작인 항쟁을 기념하고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
농업을 삶의 근본으로 살아온 신안군 섬들은 역사적으로 땅을 지키기 위해 피와 땀을 많이 흘렸다. 소작쟁의 시조가 되는 하의도 소작쟁의’가 330년 동안 계속된 기록이 있고, 서태석과 열성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농촌계몽운동과 애국독립 운동이었던 농민항쟁사가 암태도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 섬 주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암태도는 보잘 것 없는 섬이었는데 근대사에 길이 빛날 소작항쟁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암태도는 일제시대에 소작쟁의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섬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가혹한 소작료 수취가 발단이었다. 당시 암태도의 지주는 문재철, 천후빈 등이었다. 이 가운데 문재철은 논 29만 평, 밭 11만 평을 소유한 제일 지주였다. 당시 50% 정도를 소작료로 수취했는데, 문재철은 60~80%에 이를 정도로 가혹했다. 따라서 암태도민들은 이러한 가혹한 소작료로부터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년 서태석, 서창석 등은 1923년 말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지난해 진주소작노동자대회와 순천소작쟁의에서 결의한 대로 논 40%, 밭 30%로 하며, 불응하는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지 말 것, 소작료로 내는 농작물 운반은 1리(0.4km) 이내로 결의하였다. 이 결과, 지주 천후빈은 이를 대체로 수용하였으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소작료 납부 거부와 함께 협상을 시도하던 중 문재철 측은 암태소작인회 간부에게 폭력을 가하여 부상을 입히자 화가 난 소작인들은 문재철의 부친 송덕비를 무너뜨리는 등 고소와 고발, 구속 등으로 분쟁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지주측에게 유리한 집행으로 농민들 13명이 구속됐다. 소작인회는 13명의 구속석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면서 쟁의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6월 4일과 5일, 7월 두번에 걸쳐 암태면 주민 1천여 명이 수십척의 풍선을 타고 목포까지 나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앞에서 6월 8일까지 단식 농성을 계속하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마음으로 아사동맹결의 때문에 그 당시에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신문의 보도로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13명의 석방은커녕 공판에 회부되고 말았다. 그러자 다시 500명의 섬주민이 목포법원 마당에서 밤낮을 불문하고 6박 7일에 걸친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이에 서울 · 평양 등 전국적으로 지원하는 강연회와 지원금을 모금하였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로 변호를 자청하면서 파문이 계속 확산됐다.
13명이 형무소로 이감되자, 소작인회는 광주법원에서 다시 단식농성을 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목포경찰서장이 암태도로 달려와 중재를 시작하였다. 전남도청과 무안군청 쪽도 문재철을 설득하여, 결국에 소작료 40%, 10%는 농업장려금을 주 내용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된 13명 중 4명은 실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지주 문재철 역시 간평소작료 감정을 거부하여 목포경찰서에서 나서기 전까지 농민들이 추수를 못해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소작인회를 방해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고 약속된 기금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협상안을 뒤집어 엎기도 했다. 심지어 구속과 앙갚음을 일삼았으며, 지주간의 카르텔을 주동하여 종래에는 도초도와 자은도의 소작쟁의를 초래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섬주민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다른 소작쟁의에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소작쟁의였던 것이다. 9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빛나는 항쟁의 맥은 이 섬에 남아 있는 듯하다. 쟁의위원들이 뛰던 고샅길과 아사투쟁에 나서던 결의에 찬 섬주민들의 목포행 뱃길 따라 그들의 자취를 이곳 암태도 사람들은 가슴 속에 그대로 새겨두고 있다.
오도선착장 가는 길에 「암태도농민항쟁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사적비에는 항쟁에 대한 내용이 적시되어 있었고 그 옆에 서태석 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삼거리 가운데에 큰 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국내 첫 소작쟁의였던 암태도 소작인 항쟁을 기리는 기념탑인데 주변에 암태도 농민소작쟁의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암태도 농민항쟁유적비▼
기념탑 비석에는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날의 투쟁을 증거하는 글이다. 1998년에 암태면사무소 옆 부지 4백여 평에 높이 7m, 폭 1.2m의 크기로 건립된 이 기념탑에는 소작인 항쟁사와 항쟁에 참여했던 농민 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필자가 전술하기도 했지만, 좀 더 상세하게 재고하기 위해 기념탑에 안내된 사건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암태도 소작인 항쟁은 1923년 9월부터 1924년 9월까지 전남 암태도 소작인과 목포의 지주 사이에 벌어진 쟁의이다.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으로 지주의 수익이 감소함에 따라 지주 측에서는 소작료를 증수하여 손실을 보충하려고 암태도에서도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한 것이 발단이었다.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9월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에 대하여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재철이 이를 묵살하자 소작회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동맹에 들어갔다.
경찰의 위협과 지주의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소작인들은 불납동맹을 계속하는 한편, 1924년 4월 면민대회를 열어 문재철을 규탄하였다. 문씨 측이 면민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소작인을 습격하고 면민대회의 결의를 무시하자, 소작회는 전조선노농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자, 5월 22일 수곡리에 있는 문재철 부친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이를 저지하는 문씨 측 청년들과 충돌하여 소작회 간부 13명이 검거되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암태 청년회장 박복영은 면민대회를 열어 목포로 가서 항쟁할 것을 결의하게 하고, 이에 따라 농민 400여 명이 목포경찰서와 재판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집단농성을 벌였다. 각계각층의 지원 속에 소작쟁의가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일제 관헌이 개입하여 9월 30일 전남 경찰의 고등과장과 박복영 사이에 소작료는 4할로 인하하고, 구속자는 쌍방이 고소를 취하하며, 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는 약정서가 교환되었다.
약 1년간 지속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20년대의 대표적인 소작쟁의로 특히 서해안 여러 섬인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 등에서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농민들의 승리로 당시 7할이 넘는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5할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세율보다 더 낮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암태도 농민의 승리가 아니라 전국 농민들의 승리이며 모든 지주들에게 파급효과를 주었다.
지금도 한 해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송기숙 작가의 소설 암태도의 현장을 찾는다. 농민항쟁의 아픔을 딛고 분연히 일어난 섬 암태도는 이제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섬으로 인식되었다. 21년 전에 암태도를 방문하여 소작쟁의 배경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요즈음도 공권력과 맞선다는 것은 자신과 가정을 희생해야 되는데, 90여 년 전 그것도 총칼로 지배하던 일제시대에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니 더욱 의미가 깊다.
소작회장으로 쟁의를 이끌었던 서태석(1885~1943)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는 1913년부터 7년간이나 암태면장을 지낸 바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서태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3.1운동 1주기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돼 1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1923년에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소작쟁의 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수차례 투옥됐는데 그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조현증을 앓았다. 서태석은 정신병자처럼 거리를 전전하다 압해도의 어느 논에서 벼 포기를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서태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친일파의 나라가 만든 비극이었다. 서태석은 2003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았다. 서태석의 며느리는 1923년 11월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의거의 주역 박기옥이었다.
그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것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이다. 암태면사무소 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그동안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기념탑 조성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소작쟁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난 1998년 우여곡절 끝에 조성된 암태도 소작인항쟁 기념탑이 전부이다.
유관순 누나와 서태석은 둘 다 똑같이 독립만세를 불렀지만 한 사람은 오래전에 교과서에 실렸고 한 사람은 2003년에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을 하면 후손이 불행해진다는 속설이 실감난다.
암태도를 이곳 사람들은 항쟁의 섬으로 부른다. 일제치하에서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발한 농민항쟁은 보기 드문 승리를 얻어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암태도는 소작쟁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무용담이지만 그러나 묻힌 역사가 되어 안타깝다. 암태도는 1973년도에 주민수 88,340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산업화와 이농바람으로 인구가 줄어 현재 2천여 명이 살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소작항쟁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자랑스러운 역사의 땅에서 긍지를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암태도 소작쟁의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다. 소작쟁의 뒤에 섬을 휩쓸고 간 이념의 생채기는 아직도 기록에 담아내진 못하고 있다.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6.25 전쟁 당시 극심한 좌우대립이 있었고, 60년대에는 섬을 떠나야 했던 토박이들의 아픈 사연들이 그렇다. 그 동안 안기부의 방해 공작으로 항쟁비도 1990년대에 세워졌다. 곡절이 너무 많은 암태도의 진실을 밝히는데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장고리에서 동쪽으로 2㎞정도 떨어진 ‘비석거리’에 위치한 송곡리 매향비(埋香碑)는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서너군데 해안지역에서만 발견된 미륵신앙의 유적이다. 높이 157㎝, 너비 65㎝, 두께 30㎝인 매향비(埋香碑)는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에 음각되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향나무를 바다에 묻어 언젠가 환생할 미륵과 인연을 맺고자 하는 신앙의례의 한 가지로 매향의식을 행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송곡리 매향비는 남북한 전 지역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점이 특이하다.
수곡리 승봉산 기슭에 위치한 노만사는 신안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1873년에 창건되었으며, 해남 대흥사의 말사(末寺)로 작은 규모의 사찰이다. 해상산중에 세워졌다는 점이 각별한 의미를 던져주는 이 절은 대웅전 1동, 칠성각 1동, 요사체 1동으로 구성되었으며, 법당 뒷편에 10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자궁모양의 약수터가 있고 발 아래 펼쳐지는 바다 경치도 놓치기 아까운 비경이어서 암태기행의 필수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이 외에도 암태도에는 신석리 익금우실, 송곡리 송곡우실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암태도 관광과 명소
익금우실
1830년경 우씨가 배를 타고 와서 지금의 익금, 신석 일대를 돌아보고 방풍 및 방파제로서 사대문을 건립하기 위해 농치를 동문, 생김을 서문, 오루골을 남문, 익금을 북문이라 하였다. 현재는 북문인 익금우실만이 남아 있다.
송곡마을 어귀에 기다란 담장이 있는데, 1905년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 번창과 우환을 막으려면 이곳에 담을 쌓아야 한다고 하여 돌을 이용해 우실을 만들었다.
송곡우실▲
매향비
매향은 향을 묻는 신앙의례이다. 말단 향촌사회를 단위로 해서 구현되며 특히 발원자들이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에서 시작된 순수한 민간신앙이다. 1405년 건립된 매향비는 암태면 장고리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비석거리에 위치한다. 매향비의 특징은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향비▲
소작인항쟁기념탑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의 대표적 소작쟁의로 1923년 8월~1924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해안 섬들과 전국적인 소작쟁의가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1998년 5월에 조성면적 95평에 높이 6.74m의 기념탑을 건립하여 암태도의 숭고한 소작인 항쟁을 기념하고 있다.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
추포노두비
수곡리와 추포리를 잇는 노두는 여느 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명물인데, 썰물 때 2.5km에 이르는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이 징검다리는 오래전부터 전천후 바닷길 구실을 해왔다.
추포 옛 노둣길▲
추포해수욕장
길이 1.2km, 폭 40m, 수심 1.5m의 해수욕장으로 후반구에 걸쳐 해송이 형성되어 있다.
남강수사휼은선정비
1799년에 나주제도민의 이름으로 건립된 이 비는 당시 전라우수사 김처한의 공덕을 기린 것으로, 여기에는 1755년 이후 건비 당시까지의 민막 내용과 그 제역(除役)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노만사
신안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1873년에 창건되었으며,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규모가 작다. 해상산중에 세워진 이 절은 대웅전, 칠성각, 요사채 1동으로 구성되었으며, 법당 뒤편에 10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자궁모양의 약수터가 있다. 발 아래 펼쳐지는 바다경치도 놓치기 아까운 비경이어서 암태기행의 필수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노만사▲
약수터▲
심 산
천사대교▲
마당바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