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44]아, 백(기완) 선생님!
존경하는 백 선생님께.
정말로 못나고 게으른 제가 선생님 돌아가신 지 2년도 넘었는데, 이제사 편지를 씁니다. 오직 죄송할 따름입니다. 엊그제(8일) 오로지 ‘선생님의 집’이었던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선생님의 시나 말씀을 적어놓으셨던 대문이 잠겨 있더군요. <백기완 기념관 개관 준비중>이라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아항, 기념관을 만드는 중이구나”알게 되면서 저의 무심함을 탓했습니다. 아쉬웠지만, 곧 뵙게 될 것을 믿고 약속합니다. 선생님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난해 초인가, 국보급 전각예술인 친구가 직접 쓰고 새긴 <노나메기재단> 현판과 선생님이 작시한 <님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베틀북에 새긴 작품을 선생님의 '알뜰한 지킴이' 간사에게 직접 전달해준 적이 있었답니다. 그것으로 저의 모든 부족함에 대해 변명합니다. 흐흐.
그날은 쌍문동과 인수동에 있는 <함석헌 기념관>과 <문익환 통일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후, 마지막 코스로 대학로의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아 선생님의 체취를 맡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선생님을 비롯한 함석헌-문익환, 이 세 분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와 민주화과정에 있어 가장 우뚝 선 ‘삼두마차’라 하겠지요. 거물이라면 좀 표현이 거시기할까요? ‘청사靑史에 빛날 위인偉人’이라는 지칭이 훨 낫겠습니다. 물론 장준하 선생님을 빼놓으면 안될 일이구요. 간사도 못만났지만, 연말께 개관할 예정이라구요. 참으로 궁금합니다. 선생님 기념관에는 어떤 컨텐츠로 얼마나 선생님의 뜻을 헤아려 꾸며질까요? 함석헌-문익환기념관에 못지 않겠지요. 선생님도 두 분 못지않게 어머무시한 컨텐츠가 있으니, 꾸미기 나름이겠지요. 거기에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가야 할 터인데, 그것이 걱정입니다. 허나, 조금은 소박한들 무슨 상관일까요? 대륙을 넘나드는 선생님의 ‘큰 뜻’만 느낄 수 있게 한다면 훌륭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친하게 뵙게 된 것은 제 인생의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1999년인가, 제가 동아닷컴(전신 마이다스동아일보) 뉴스부장일 때 기자와 불쑥 선생님 연구소를 찾았지요. 인터넷 뉴스가 세상에 첫선을 보일 무렵, 인터뷰 동영상을 내보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의 첫 마디가 “최부장, 편집 안하고 내보낼 자신이 있수?”였습니다. 제가 장담한 인터뷰 동영상은 편집없이 13분이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간간히 찾아뵌 선생님은 시종일관 당신의 일생처럼 여실如實했습니다. 참치회, 그중에서도 엔삐라(지느러미부분)을 좋아하신다하여 광화문에 모신 적도 있었지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각별하시던지, 제가 무심코 한 일본투나 영어말에 대한 민망할 정도로 신랄한 꾸중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지요. 선생님의 머리 뒤로 어쩌면 ‘광휘’(아우라)가 비치는 것같았어요. 선생님의 등록상표(트레이드 마크)인 말갈기머리를 손가락빗으로 쓰으쓱 빗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시던 모습이 잊혀지겠습니까? 그야말로 ‘민중대통령 만세’였지요.
대체, 선생님과 함선생님 그리고 문목사님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통일세상은 언제나 올까요? 그날이 오면, 그동안 애썼던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열사들이 살아나오면 좋겠어요. 신명난 춤과 노래로 몇날 며칠을 광화문광장에서 지샌들 무슨 흉이 되겠어요. 아, 선생님이 걸핏 하면 우시며 부르던 유행가 소리도 듣고 싶습니다. 눈을 감으시는 그 순간까지, 영원한 투사의 길을 좋지 않으셨지요. 선생님이 걸어오신 가시밭길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던가요? ‘이제는 됐다. 이만하면 내 할 일 하고 간다. 눈 감자’고 생각하셨을까요? 아직도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세상의 온갖 ‘쓰레기’들을 직시하며 호령을 하겠다고 생각했나요? 어느새 2년이 넘었습니다. 추모글 모음집이라고 할까요? 짱짱하게 두 권이 나왔습니다. 내년 2월에는 3권째 추모글 모음집이 나오겠지요. 제 나름으로 독후감을 썼더니, 돌베개출판사에서 편집을 아주 잘해 놓아 나름 흐뭇했습니다. 읽어보시라는 말하기도 창피하지만요.
선생님, 고은 시인의 만인보를 뒤지다 <백기완> 제목의 시를 찾았습니다. 선생님도 보셨겠지요?
강한 것이
이렇게도 자아인 것을
50년대 폐허 명동의 쌍도끼!
강한 것이
이렇게도 웅변인 것을
웅변이었다가
쓸데없이 눈물 한 방울인 것을
그의 손은 가방을 들어본 적 없다
보따리를 든 적 없다
오직 두 눈과 입 하나뿐
그것만이면 천군만마에 채찍이니
눈 감았다 뜨면
그도 없고 그의 전사들도 다 달려가
오로지 누런 먼지만 인다
자아 이외에
자아의 조국 이외에
자아의 조국에 있어야 할 무력 이외에
그에게는 장차 드높이 휘날이는 고독이 있어야 한다
고은 시인, 정말 대단하지요? 어쩌면 그렇게 선생님의 ‘강한 자아’를 한눈에 꿰뚫어 봤을까요? 모란공원에서도 ‘드높이 휘날리는 고독’을 즐기고 계시는지요? 내년 2월에는경기도 마석에 있는 '모란공원'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전태일 열사도, 문익환목사도 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찹니다. 그보다 먼저, 오는 11월초, 선생님의 기념관에서 선생님의 자취를 더듬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영원한 지킴이' 채간사가 잘 꾸며놓겠지요. 뵙고 싶습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요.
후기 1: 2005년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어떤 책 출판기념회를 유서깊은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가졌지요. 가객 정태춘이 반주없이 육성으로 <황토강으로>을 불러, 좁아 메워터진 다방을 온통 ‘아우성’으로 만들었지요. 그때 제 수필집을 한 권 드렸는데, 한 달쯤 후엔가 “최부장, 다 읽어봤어. 그런데 말이야. 잡것이 많으면 배탈이 나는 법이야”라며 점잖게 제 글과 소행을 나무라셨지요. 혜화역 4번출구 <빈대떡신사>에서 활짝 웃으며 사진도 함께 찍어주셨지요. 눈물나게 고마웠었습니다.
후기 2: 참고로 제가 선생님께 쓴 졸문 몇 편을 링크합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레터 97]“기죽지 마라-우리가 백기완이다”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77/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또 무엇인가?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76/추모문집]”내 안에 백기완이 있다“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직딩일기/20070117]'부심이' 백기완 선생님께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우천 생활칼럼/20070117]백선생님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우천 우리말 톺아보기]백기완 선생이 쓰시는 우리말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편지 36신]아, 백선생님 - Daum 카페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79/우리말]세상에 다시 없을 두 권의 책 - Daum 카페
2023년 6월 14일 밤
고향 우거에서 최영록 엎드려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