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9
3월24일[사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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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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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5kLmW4Qi0U (서웅 마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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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택된 민족의 지나친 자부심, 그로 인한 불행!>
주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하늘을 찔렀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어깨에는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신들만 의인이요, 주님 구원의 대상으로 여겼지, 이웃 나라 사람들은 그야말로 개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자신들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단식과 자선을 많이 하는지? 자랑하고 우쭐댔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입니다.
목에 잔뜩 기브스를 한 그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즉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과 나약함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목이 하도 뻣뻣하다보니 하늘도 올려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던 나머지, 참 주님이신 분,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 예수님조차도 몰라봤습니다. 몰라보는 것 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분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틈만 나면 당신이 누구신지? 어디서 왔는지? 당신의 신원에 대해 그리도 자주 가르쳤는데, 뿐만 아니라 그리도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끝끝내 당신을 거부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니, 답답해 돌아가실 지경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성전에서 가르치던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0장 28~29절)
혹시 오늘 우리의 목과 어깨에도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진 게 좀 있다고 없는 사람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좀 배웠다고, 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우리, 목이 뻣뻣한 우리, 잔뜩 부풀려질 대로 부푼 우리를 주님께서는 절대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조만간 크게 한 방 제대로 치실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겠다.”(탈출기 32장 10절)
사순시기는 목을 부드럽게 하는 시기, 어깨에 힘을 빼는 시기, 거품을 제거하는 회개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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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려움은 내가 만든 껍데기 안에 산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곧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2학기가 되면서부터 성적이 곤두박질 쳤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대학에 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성적이 더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이런 두려움 때문에 경련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고3병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제 시험지만 받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귀에서 쇠 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집중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만 고민을 할 뿐 누구에게 상담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입시험 2달을 남겨놓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에이, 바보. 진작 내 말대로 정신병원에 가보지.”
저는 정신병원이라 하면 미친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도 제가 이것을 그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시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난 3학년 시작할 때부터 다니고 있어.”
이 친구가 말한 것은 신경정신과였습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신경안정제와 같은 것을 복용하며 공부를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2달 동안 의사에게 상담하고 약을 받아먹었습니다. 심리적인 이유인지 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2달은 성적이 더 이상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에게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친구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면 저의 성적은 더 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내 처지를 인정하고 솔직해 지는 것, 이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해지면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 감추고 있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솔직해지려는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정신과에서 약을 먹으면서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다녔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 사람들에게 하지 마.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거든. 취직하기도 힘들고 결혼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 그러나 저는 계속 하고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배우지 못한 분들이고, 집이 가난했다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합니다. 솔직하지 못하면 아무 두려움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계속 나에게 껍데기를 씌워 결국 나를 가두고 죽이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아예 두려워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면 결코 부끄러운 것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도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겁도 없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용기에 신기해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숨길 것이 없으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다가 잡혀갈까봐 두려워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져서 움츠려 들고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 모든 것을 대놓고 이야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바시 152회에 권율이라는 사람이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권율은 미국 태생 한국인으로 한국말도 잘 못하고 천성적으로 혀가 짧아 발음도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다 그가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 굉장한 차별을 받을 때였고 학교에서는 화장실에서 아이들에게 맞을까 봐 오줌이 마려워도 절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화관도 가지 못했고, 백인들과 여자들 앞에서는 온 몸에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긴장을 해서 아예 사람과 만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자신이 알았던 어떤 형도 그런 어려움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그렇게 계속 나가면 정말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움츠려들지 않기로 결심했고 학교에서 질문을 하나 이상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스피치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운동모임에도 가입하여 친구를 사귀었고 친구들과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늦기 전에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하라고 충고합니다. 지금은 성공한 회사의 리더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 TV쇼에도 출연할 정도입니다. 이 분이 이렇게까지 되기 위해서 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겸손한 진실함’이었습니다.
감추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거짓된 내가 만들어 놓은 나 자신 안에 갇히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곳엔 온통 두려움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십시오. 사실 나의 단점을 당당하게 말할 때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솔직함의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숨기고 싶어서 껍데기를 씌워놓은 그 집에서 거처합니다. 따라서 솔직해질 때 껍데기는 벗겨지고 두려움은 살 집을 잃게 됩니다.
부끄러운 것이 내 안에서 곪아서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빨리 터뜨려버리십시오. 자유는 솔직함에서 시작되고 솔직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거처할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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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으로 ‘사순특강과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며칠 여유가 있었는데 오타와에 있는 공동체에서 ‘미사와 사순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는 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꽃동네 피정의 집에서도 ‘미사와 고백성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차로 2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보통은 남는 시간이면 미술관도 가고, 시내 구경을 하러 갔었는데 이번에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맞이해서 주님께서 제게 ‘은총’을 주셨습니다. 오타와에서는 허리까지 올라온 눈을 보았습니다. 늦은 시간 사순특강을 듣기 위해서 오신 30여 분의 교우들을 보았습니다.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목하는 성당은 130년 역사를 지녔다고 합니다. 지역에서 ‘음악회’를 신청할 정도로 성당은 넓고, 크고, 아름다웠습니다. 미사 전에 반주자는 아름다운 성가를 연주하였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러 갔지만 오히려 저는 교우들의 열성과 아름다운 성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꽃동네 피정의 집에서는 아이티에서 사목하다 피정 때문에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대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끌러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헌신과 열정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왕복 10시간 차량 봉사를 하는 형제님의 노고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며,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하고, 복음을 읽고, 꽃동네 찬양 팀의 성가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여정이었는데 차 안이 마치 피정의 집 같았습니다. 차창 밖에는 하얀 눈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300㎞ 이상 직진으로 펼쳐진 도로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 같았습니다. 이민 생활의 애환을 듣기도 하였고, 성당에 있었던 사제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교우들은 사제의 영성과 인품 때문에 사제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허물이 있어도, 다소 고집이 있어도, 행정의 미숙함이 있어도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말처럼 신심이 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교우들은 그런데도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수록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신발 끈을 풀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깊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사제들의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온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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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7,1-2.10.25-30: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란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26절) 하고 말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 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하셨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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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는 것과 믿는 것>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예수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하나도 없다. 저자는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라는 말에서 ‘멜키체덱’이 연상됩니다.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선조 아브라함도 가장 좋은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히브 7,1-4)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멜키체덱처럼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모가 누구인지, 어느 가문인지 알려져 있었고, 고향이 어디인지, 직업이 무엇인지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의 가난한 목수이며, 어떤 랍비 문하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멜키체덱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족보도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다.”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은, 그런 것이 정말로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멜키체덱 이야기를 한 것은, 그가 그렇게 신비스럽고 위대한 인물이긴 한데,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히브 7,24-26)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로만 생각하지만,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이신 분”, 그리고 “멜키체덱보다 더 신비스러운 대사제이신 분”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멜키체덱처럼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었다면,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면, 그러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오히려 더 예수님을 안 믿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믿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그 ‘안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성경공부보다 먼저입니다. 누구든지 믿고 있으면서,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성경공부를 하면, 분명히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받고, 말씀을 통해서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안 믿으면서, 또는 안 믿으려고 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뿐입니다. 실제로 ‘안 믿는 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지식을 쌓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그 지식을 하느님과 예수님과 교회에 시비를 거는 재료로만 사용하면서, 신앙에서 점점 더 멀어집니다.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은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성경 탓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탓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ㄴ-29)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가 나자렛의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는,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이고,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입니다.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이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과 관계없이 살고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서 살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라는 선언입니다.
표현으로는,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이지만, 뜻으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므로,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믿는 것이 옳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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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여전히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지만 그래도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의인을 대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에서 봅니다. 그들은 다짐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이 말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갈등을 연상시킵니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서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의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2)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마치 악인들이 놓은 덫과도 같고 그들의 생각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에 대한 악인의 태도는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부 유다인들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어쩌면 지금도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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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헬레니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의 불신으로 박해당한 의인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의인에 대한 악인의 박해는 동시대인들에게 배척당한 예수님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의인은 성경을 왜곡하고 모세의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강하게 꾸짖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의인은 하느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화답송 시편처럼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고, 초막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그분의 때를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언자처럼 당신의 기원에 대하여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안다는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에 매우 위험한 인물로 여기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악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하느님을 조롱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오 복음 27장 42절)
하느님께서는 확실한 기적을 통하여 강요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유로운 믿음을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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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인규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진리는 평범한 가운데 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5장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아버지와 어떠한 관계에 계신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알아보기는 켜녕 오히려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피해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이 되자 명절을 지내러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초막절은 해방절, 오순절과 함께 3대 순례 대축제들 가운데 하나로서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하느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을 이집트종살이로부터 풀려나게 하셔서 40년간이나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하게 하셨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명절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방을 물으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요한복음 7장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1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선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당신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임을 거침없이 밝히십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예수님을 믿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도 알고 있고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예수님이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겉모습들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시지만 진정 중요한 예수님의 본래 모습, 곧 하느님께 근원을 두고 있는 예수님의 참모습은 ‘모른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알아보지를 못하고 불신만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평범한 가운데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거나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는 그런 목소리들이 곧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일상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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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요한 7,25-30)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하얀 대리석 벽에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금언을 아로새기고 생활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행동의 지표로 삼았다.
자아의 발견, 자아의 확립처럼 중요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다. "전 세계를 알면서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프랑스의 문필가 라 퐁떼느는 말하였다. 역사도 알고 법률도 조예가 깊고 문자에도 일가견이 있고 시사에도 밝으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 자신의 처지를 알고 형편을 알고 실력을 알고 사명을 알고 분수를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은 智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明이다"라고 말했다. 명은 지보다 높고 어려운 경지다.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가 어려운가? 이기심으로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자애심으로 자기에 관한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총명하면 재판관이 되기는 쉽지만 자기 자기 일에 슬기로운 판단자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 가지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세 개의 자아상을 그릴 수 있다.
첫째는 내가 보는 나의 이미지요, 둘째는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요, 셋째는 나 본연의 나의 이미지이다.
이 세 개의 자아상 중에서 가장 옳은 것은 세 째번 뿐이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어떤 분석과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빗나가는 수가 많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여 교만과 허영심의 노예가 되기 쉽고 어떤 이는 자기자신을 너무 과소 평가하여 비굴해지기 쉽다.
과대평가도 잘못이지만 과소평가도 틀린 것이다. 우리는 정당한 자기 평가를 해야 한다.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는 첫째 것보다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도 왕왕 오판하는 수가 허다하다.
우리는 가끔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사람의 이미지와 그 사람의 현실 행동이 어긋날 때 참으로 뜻밖이라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나 본래의 나의 이미지, 나의 본연적 자아상, 이것만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자아를 옳게 확립해야 한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나다. 나 아닌 너를 우리는 타아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 나는 정신작용의 통일체다. 우리는 의식하고 감정하고 의욕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통일하는 최고의 주체를 우리는 자아라고 일컫는다.
생각하는 나, 느끼는 나, 욕구하는 나, 행동하는 나, 여러 개의 나가 있다. 그 여러 개의 나를 통일하는 주재자가 곧 자아다. 만일 이러한 주재자나 주체가 없을 대 정신병 환자의 경우처럼 자아의 분열이 생긴다.
분열된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정신 작용의 통일이다. 이 통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적 통일이요, 또 하나는 횡적 통일이다. 종적 통일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작년의 나와 금년의 나 사이에 의식의 통일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약속을 할 수가 없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어제 내가 한 일을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작년의 나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건전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자기동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아의 종적 통일이다.
자아는 동시에 횡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감정하는 것과 의욕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일관된 횡적 통일, 내용적 통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智, 情, 意 상호간에 내용적 통일이 없으면 자아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내가 완전히 다를 때 나는 이중 인격, 이중 자아로 전락한다. 이중인격 이중자아는 는 분열된 병적 자아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 사이에 자기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자아관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자아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 자아관이요, 또 하나는 긍정적 자아관이다.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가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나는 지방 출신이다. 나는 일류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도 신통치 못하고 재주도 빈약하다.
집안도 볼 것이 없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요 무능력자다. 나같은 거야 사회의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하여도 성공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를 과소 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된다.
인생에서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는 생의 의욕을 잃고 전진의 기력을 상실한다. 그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는다.
"해가 비치면 먼지도 빛난다."고 괴에테는 말했다. 먼지는 더러운 것이지만 밝은 햇빛을 받으면 빛을 발한다. 희망을 품을 때 우리의 얼굴은 밝아지고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걸음걸이는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진다. "내일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어떤 사상가는 말했다.
희망을 갖는 자는 설사 내일 이 지상에 파멸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절망하는 자는 슬퍼하고 저주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희망과 절망은 그만큼 다른 것이다. 부정적 자아관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
우리의 가슴 속에 희망의 등불이 있고 우리의 정신에 자신이 있고 우리의 몸에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속삭인다. 힘있게 전진하라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왔고 무슨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자아관이 성립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셨고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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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마라>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해박한 지식도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자칫 교만에 빠지고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가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인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신앙인의 가야 할 길입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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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2만 원을 받는 것과 한 달 뒤 3만 원을 받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보십시오. 아마 지금 당장 받을 2만 원을 선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달이나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은 액수라도 지금 당장 받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교는 어떨까요? 1년 뒤에 2만 원과 13개월 뒤 3만 원을 받는 것 중에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3만 원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1년이나 1년 하고 한 달 더 기다리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 더 기다리면 1만 원이 더 생긴다고 하니, 이를 선택합니다.
이 두 상황은 똑같이 만 원과 1개월이라는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약 첫 번째 상황에서 지금 당장 받는 2만 원을 선택했다면, 두 번째 상황에서도 1년 뒤의 2만 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합니다. 지금의 한 달은 미래의 한 달보다 훨씬 더 큰 차이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다른 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리는 시간과 남이 누리는 시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시간을 맞이하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사랑의 실천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죽이는 시간이 아닌, 살리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뜻만을 펼치는 시간이 아닌, 주님 뜻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뒤로 미룰 시간은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시간뿐입니다. 후회와 좌절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기보다 오로지 지금 주님 사랑에 집중하고 실천해야 할 시간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다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다면서 예수님을 공공의 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그분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집중했다면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뜻만을 펼치려고 하고 있으니,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고 있으니, 사람을 살리는 시간이 아닌 죽이는 시간을 만들어갑니다. 이런 시간 안에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사람을 살리는 시간인지 아니면 죽이는 시간인가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 자기 뜻만 펼치는 시간인가요? 아니면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 뜻을 펼치는 시간인가요? 주님 뜻을 펼치는 사람만이 어떤 순간에서도 함께하는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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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알면서도 모르는 악>
주님께서 죽임을 당할 때가 점점 다가옴을 복음은 얘기하고, 독서는 주님께서 왜 죽임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얘기합니다.
죽임당하는 이유가 주님께 전혀 있지 않고, 죽이려는 자들에게 있음을 독서와 복음이 얘기하는데 주님께서 그들의 죄와 악을 들춰내시기 때문이고, 그들의 죄악을 들춰내시는 주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알면서도 자기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서 죽이는 정말 나쁜 자들과 자기의 죄악을 들춰내는 사람이 주님인 줄 모르고 죽이는 보통 사람들.
정말 나쁜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 옆에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사람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자기 옆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싫어하는 것이, 곧 어둠이라고 요한복음이 얘기하듯 악인은 선인을 싫어하기 마련이고, 선인을 싫어하고 죽이는 자가 곧 악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악인이고 그가 선인임을 알고도 선인을 악인으로 몰아서 죽입니다.
그런데 선인을 죽이는 사람도 악인인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죽이는 자들은 얼마나 악한 자들입니까?
그런데 이 정도로 악하지 않지만, 보통의 우리도 악한 구석이 있고,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에게도 악한 구석이 어느 정도 다 있습니다.
나의 죄와 악을 드러나게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악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죄인이고 악인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자기의 죄와 악을 드러나게 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인 것을 몰라 보고 그를 악인이라고 하는 죄와 악입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그래도, 자기가 죄와 악을 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죄악을 드러나게 한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회개할 것이고, 이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 지도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주님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온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은 모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세상 것은 알지만, 천상 것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이런 악이 있음을 오늘 인정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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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악인(惡人)이 아닌 의인(義人)으로 삽시다 -
어제의 강론 결론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회개의 은총은 겸손, 자비, 지혜입니다. 부단한 참된 회개를 통해 주님을 닮아 겸손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의인이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요 예수님이요 미사라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지는 길만이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입니다. 회개의 선택, 회개의 훈련, 회개의 습관 역시 현실적으로 참 중요합니다.
이런 요지의 강론이었고 오늘 강론 또한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삶-악인이 아닌 의인으로 삽시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 내용이 흥미진진합니다. “악인들의 삶과 생각”에 이어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이란 긴 내용입니다만 묵상할 좋은 내용이 많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생략된 부분을 일부 인용하여 나눕니다.
“악인들은 행실과 말로 죽음을 불러내고 죽음을 친구로 여겨 그것을 열망하며 죽음과 계약을 맺는다. 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의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
...
우리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고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해 줄 자 하나도 없으리니 우리의 삶은 구름의 흔적처럼 사라져 가 버린다. 햇살에 쫓기고 햇볕에 버티지 못하는 안개처럼 흩어져 버린다. 우리의 한평생은 지나가는 그림자 우리의 죽음에는 돌아올 길이 없다. 자 그러니, 앞에 있는 좋은 것들을 즐기고 젊을 때처럼 이 세상 것들을 실컷 쓰자. 값비싼 포도주와 향료로 한껏 취하고 봄철의 꽃 한송이도 놓치지 말자.”
너무 공감이 가는 내용들입니다. 악인의 생각의 단초가 이렇게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 역시 악의 시초입니다. 그러니 악인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떠날 때, 삶의 무의미, 허무감에서 감미로운 유혹처럼 시작되는 악인의 삶이요 알게 모르게 악인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의인에 대한 악인의 위해危害는 그대로 예수님의 수난에 관여된 악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흡사 이사야서 52장13절부터 53장12절까지 계속되는 ‘주님의 종’ 넷째 노래를 닮았습니다. 그대로 수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어 지혜서 저자는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밝힙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무지의 악이, 무지의 병이, 무지의 암세포가 골수에까지 스며든 이들이 악인입니다. 무지의 악에 눈이 멀 때 악인입니다. 그러니 악인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무지에 눈멀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오늘 제1독서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진면목입니다. 누구나 존엄한 품위의 인간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존엄한 품위의 회복이요, 이래서 은총과 더불어 회개를 비롯한 부단한 수행과 훈련이 필수라는 것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은총의 선물인 존엄한 품위의 참사람이, 의인이, 성인이 되기위해 평생수행의 공부와 노력과 훈련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무지에서 벗어난 참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공부와 평생훈련의 분투의 노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평생 영적전쟁의 요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사면초가, 흡사 악에 에워싸여 있는 모습입니다. 호심탐탐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는 악의 하수인들 유다인들입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 말미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손대지 못했다 합니다.
그대로 오늘 지혜서와 그리고 이사야서 주님의 종 네 번째 노래의 비극적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바로 이런 사면초가의 와중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중심의 삶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신원 확인을 통해 새삼 우리의 하느님 중심의 삶의 신원을 묵상하게 됩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하느님께 파견된 예수님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확고히 뿌리내린 삶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수행을 통해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는 우리의 삶일 때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악에서 벗어나 빛의 의인, 빛의 성인이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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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7,30)
<예수님의 때!>
오늘 복음(요한7,1-2.10.25-30)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러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그 때(kairos)에 관한 말씀'입니다. 전례적 시간으로 오늘은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주님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돌아가시는 때'입니다. '악인들이 쳐놓은 덫에 걸리는 때'이며, '십자가 수난의 때'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요한7,26)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인들의 마음을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2,19-20)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가?'
참으로 혼란스럽지만, 그 죽음이 우리의 인간성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일'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성 안에 갇혀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성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바라보고,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 '예수님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도 나의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살리는 일에 적극 동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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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2BaTEpg_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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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30)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때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시는
주님의 때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때에
눈을 뜨는
믿음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간 또한
치유의 때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목련과 산수유가
피어납니다.
지금이 가장
알맞은 봄꽃의
때입니다.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음을 믿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속에서
주님께서
일하시는 주님의
때를 진실로
믿습니다.
주님의 때가
이루어지기 위해
나의 때를 먼저
내려놓는 사순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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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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